회귀한 탑 등반자 186화
186화 숙청 (1)
“우음.”
따스한 햇볕 아래 잠에 취해 있던 유희는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세운 그녀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머리를 묶은 에레나는 그녀에게 대뜸 유리 컵부터 건네왔다.
반사적으로 컵을 받아 든 유희는 컵을 들여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뭐야?”
“과일 주스. 먹고 어서 일어나.”
단맛과 신맛이 느껴지는 오렌지였다.
그런데 먹고 보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에레나는 남들에게 친절하고 또 잘 챙겨 주는 편이기도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걸 챙겨 줄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의아한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에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아주 큰일이 생겼어.”
“뭔데?”
미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희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실 복도에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성태가 서 있었다.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성태가 몸을 틀자 복도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복 차림을 보고 교단에서 찾아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유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교단 사람들이 찾아온 걸 가지고 아주 큰일이 생겼다고 하는 건 이상하지 않는가.
애초에 성녀가 됐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직접 교단에서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유희가 현관문 앞으로 가자 맨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예를 취하며 말했다.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뒤이어 다른 교단 사람들도 유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유희는 손을 뻗어 만류했다.
“굳이 예를 취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어찌 성녀님께 예를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소 과한 예를 표한 남자는, 예를 다 차린 후에야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디곤 에스페레라고 합니다. 짧게 아디곤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유희는 흘깃 그의 어깨를 쳐다봤다.
“대주교시네요.”
교단에서 쓰이는 직급 표시는 이미 전부 파악이 되어 있었다.
“예. 부족하지만 제가 성녀님을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아디곤은 말했다.
“교단에서 성녀님을 찾으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말을 마친 아디곤은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뒤에 서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희가 따라나서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안 움직일 기세이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유희에게 있어서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고개를 드세요.”
그제야 아디곤을 비롯해 교단 사람들이 허리를 세웠다.
유희는 이들을 따라나서기 전에 잠깐 하성태와 말을 섞었다.
“성태 씨. 제가 없는 동안 길드 좀 맡아 주세요.”
“그것보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하성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한테 하는 거 못 보셨어요?”
“그야 보긴 봤지만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교단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죠. 최근에 교황도 작고했잖아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교단은 교황의 부재로 인해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을 터.
이때 성녀가 된 자신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최대한 조심하도록 할게요.”
“내가 따라가지.”
거실에서 엿듣고 있던 카를로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카를로 씨.”
“한 명 정도는 따라가도 상관없을 거다.”
유희는 카를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기는 했다.
그러나.
“성녀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굳이 보디가드가 없어도 저희들이 최대한 안전하게 모실 겁니다.”
아디곤은 성녀 말고 누군가가 따라나서는 것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카를로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댁들은 나 혼자 상대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누가 누굴 보호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뭐, 뭣이!?”
“왜? 너무 정곡을 찔렀나?”
“감히 교단을 무시하다니! 어리석구나!”
“교단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댁들이 약하다는 걸 말하는 거지. 아님 어떻게든 날 떼어 놓으려고 교단을 들먹이는 건가?”
“이놈이!”
“그만하세요!”
유희가 중재에 나서자 금세 조용해졌다.
“이쪽은 데려갈 겁니다. 만약 거부를 하신다면 저도 따라가지 않겠어요.”
“성녀님!…….”
“선택하세요.”
딱히 아디곤은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카를로의 동행을 허락했다.
“그럼 가시지요.”
아디곤이 문을 여는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 성녀니이임!”
“성녀다! 성녀야!”
“와아아아!
대체 집 앞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 모인 것인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제야 유희는 에레나가 말했던 큰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장난이 아니야.’
성녀에 대한 관심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절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그때 카를로가 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충격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카를로를 바라봤다.
카를로가 앞을 나서자 길을 막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비켜섰다.
멍을 때리던 유희는 재빨리 따라나섰다.
둘이 필두로 나아가자, 아디곤을 비롯한 교단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유희는 앞을 걷고 있는 카를로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녀의 한마디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길을 막는 바람에 직접 카를로가 나서서 길을 뚫어야 했다.
성녀의 행렬은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카를로를 도와 길을 뚫은 아디곤과 교단 사람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카를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 그들은 대교회 안으로 출입했다.
대교회는 밖에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적막한 대교회에 서 있던 네 인영 중, 직급이 가장 높아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예를 취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저는 라자 클리시엥. 다들 라자 주교라고 부릅니다. 성녀님께서도 편하게 라자 주교라고 불러 주십시오.”
“김유희예요.”
“성녀님의 이름을 직접 들을 수 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내 라자는 아디곤을 뚫어지게 보았다.
“지금부터 안내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게.”
분명히 라자는 아디곤보다 낮은 직급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하 관계가 거꾸로 된 것처럼 느껴졌다.
유희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갔다.
라자는 유희를 안내하며 그 옆에 같이 걷고 있는 카를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옆에 서계신 분은?”
“아, 제 동료예요.”
유희는 그를 길드원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교단에 길드 얘기를 꺼내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 그렇군요.”
한순간 라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여깁니다.”
라자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고위직 사제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성녀님을 모셨습니다.”
유희가 입장하자 사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나 몇몇은 예를 취하지 않았다.
“저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라자는 유희에게 앉을 자리를 말해 주었다.
유희가 의자에 앉고 카를로는 뒤에 서 있었다.
유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까 살펴봤지만 전부 낯선 얼굴뿐이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빈자리가 있었다.
정확하게 반대편에 있는 금칠 된 의자는 딱 봐도 가장 높은 직위와 높은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앉을 자리로 보였다.
‘교황 자리인가.’
하지만 교황은 이미 죽은 상태.
‘잠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인 숫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물론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파악한 대주교와 추기경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자, 오실 분들은 다 온 것 같군요.”
라자가 교황 좌석 옆에 앉은 채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아니. 저희들의 지주가 되실 분이죠.”
라자가 유희를 손을 뻗어 가리켰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유희는 그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성녀라고 해서 대단한 오오라라도 풍길 줄 알았는데. 별거 없어 보이는군. 정말로 우리가 찾는 성녀가 맞는 건가?”
누군가 딴지를 걸듯, 누가 들어도 불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오그 경! 이 무슨 무례인가!”
부기사단장 라오그는 붉은빛이 띠는 눈동자로 유희를 노려보았다.
유희도 차가운 눈빛으로 라오그를 노려봤다.
“내가 알기로 성녀가 등장한 것은 수백 년 전의 일이다. 물론 성녀의 탄생을 알리는 표식이 있었으니 어디엔가 성녀가 있는 건 확실하겠지만. 그게 저 여자라는 확신은 없지. 그저 들려오는 소문을 추측해서 데려온 것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라오그 경.”
라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내 말뜻은 성녀인지 아닌지 증명해 보란 소리이다. 성녀라면 필히 성복을 부여받았을 터.”
지금 유희는 성녀가 되고 나서 받은 성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입지 않은 이유는 너무 튀기 때문이었다.
“음. 라오그 경 말에 일리가 있군.”
“맞아. 성녀에게는 성복이 지급되지. 그런데 그대가 입고 있는 옷은 도저히 성복이라고 볼 수 없군.”
아까 전에 예를 취하지 않은 이들이 라오그의 말에 동조했다.
듣고만 있던 라자가 손을 들어 모두의 말을 끊어 냈다.
그리고 유희를 쳐다보며 사과의 표시를 했다.
“성녀님을 데려다놓고 괜한 무례를 저지른 것 같군요.”
“아, 전 괜찮습니다.”
“저는 유희 씨께서 성녀님이라는 걸 의심치 않지만 아무래도 몇몇 분들이 의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례가 안 된다면 직접 성녀님께서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 어떠할지…….”
성복을 보여 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성녀라고 무턱대고 데리고 와서는 뒤늦게 자신이 성녀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확 엎고 나가 버려?’
굳이 이들에게 성녀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이들의 관심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미션을 깨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션이라는 것이 교단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대로 막 나가 버리기도 애매했다.
“후우~”
유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어서 두 눈을 크게 뜨곤 입을 뗐다.
“좋아요.”
유희는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선택받은 자의 성복을 꺼내 들었다.
옷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새하얀 구체.
유희는 그 구체를 손으로 꽉 쥐었다.
사아아아아!
순간 구체에서 퍼져 나온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빛은 곧 아름다운 역삼각 무늬를 가진 새하얀 드레스로 변신했다.
“오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방 안에는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 흘러넘쳤다.
동시에 유희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쳐다봤다.
[선택받은 자의 성복 ‘악령 감지’ 효과가 발동합니다!]
[악령과 계약을 맺은 자들을 감지합니다.]
[단 악령의 힘이 강력할 경우 감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뭐야……?’
유희는 주변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교회라는 신성한 곳에 악령과 계약을 맺은 자들이 존재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다섯 명이 넘는 고위 사제들이 시커먼 형상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