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85화
185화 헬리오스의 숨결 (3)
주위에 남은 것은 잔해뿐이었다.
화력을 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나 소모는 크고 효율도 그다지 좋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내에 남아 있는 마나량은 수백 번 이상 같은 마법을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마법을 사용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마나량 체크였다.
앞일까지 예측하며 마나를 써야 하기 때문에 마나량 체크는 마도사에게 있어서 숨을 쉬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이젠 메테오 같은 광범위기만 아니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물론 가지고 있는 습관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내 등을 문질렀다.
고개를 돌리자 몸집을 사람 키로 줄인 다칼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일이 잘 해결된 것 같군.
“보다시피.”
다 끝난 것 같은 그때.
쿠구구궁!
하늘에서는 비가 떨어지듯 빛줄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숨이 막힐 듯 공기를 뒤덮는 묵직한 기운과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존재.
‘르켈라.’
화가 잔뜩 난 그가 현현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 주는 헬리오스의 숨결을 내가 흡수해 버렸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했다.
“크르르르!”
르켈라의 등장에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서려는 다칼을 저지했다.
“크응?”
-왜 막아서는 거지?
다칼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금은 아냐.”
다칼이 나서려고 하는 이유는 아마 달의 여신 페르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터.
하지만 르켈라를 상대하기에는…… 아니 신좌를 상대하기에는 시기가 적절치가 않다.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려면 최대한 변수는 없애야 돼.’
만일 이곳에서 르켈라와 목숨을 건 전투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곧 부유섬으로 떨어진 빛줄기들이 하나로 모여들어 인간의 형상을 갖춰 나갔다.
화려한 왕관을 쓰고 황금 머릿결을 지닌 여성이 하얀 천을 몸에 두른 채 나타나 고함을 질렀다.
고함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날아 들어온다.
등가교환.
소리 차단과 함께 보호막을 둘렀다.
콰웅!
직접적인 공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호막은 불안정하게 떨어 댔다.
이내 입을 다문 르켈라가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한다.
소리 차단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호막을 걷어 낸 뒤에 귀에 손을 올리고 되물었다.
“잘 안 들렸어. 뭐라고?”
“으으으으! 건방진 노옴!”
귀가 시뻘게진 그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에 무기를 소환했다.
나는 하얀 불꽃을 두른 흑색 창을 보며 언제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신기를 꺼내 들다니.’
이미 르켈라는 신좌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
하지만 르켈라가 선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탑은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르켈라는 거침없이 창을 휘둘렀다.
크과가가가가!
그녀는 자신이 신좌임을 증명하듯 초월적인 힘을 드러냈다.
가디언들과의 전투에도 끄덕도 하지 않던 부유섬이 완전히 반쪽으로 갈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피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센 공격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나저나 이만 물러나야 되는데…….’
다만 물러나기 전에 한방은 먹이고 물러나도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활성화해 두었던 마나를 곧바로 마법으로 변환시켰다.
염옥.
화르르륵!
머리 위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태양이 떠올랐다.
화악! 화악!
지름 20미터가 넘는 크기의 태양은 주기적으로 고리 형태를 취하는 불을 내뿜었다.
자연스레 르켈라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그 순간 나는 명령을 내리듯 손짓했다.
구구구구-
거대한 태양이 르켈라를 향해 날아갔다.
“이까짓 거!”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르켈라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사용한 염옥은 헬리오스의 힘이 담겨 있는 마법이었다.
본래 신좌의 힘이었으니 당연히 일반 마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물론 그만큼 소모되는 에너지도 거대했다.
르켈라는 순식간에 수백, 수천 번의 찌르기를 하며 태양에 구멍을 내어 아예 소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절반만 소멸되고 나머지 절반이 코앞에 당도했다.
콰아아아아아우웅!
폭발은 공기를 증발시켜 버린 것도 모자라 주위의 것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 사이에 나는 다칼을 붙잡고서 귀환석을 꺼내 들었다.
“쥐새끼 같은 녀석! 어딜 가려고!”
폭발 속에서 걸어 나온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손을 내뻗었다.
우리가 도망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르켈라가 눈치챈 것 같지만 알아채도 이미 늦었다.
나는 르켈라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으아아!”
분노한 르켈라가 창을 내던졌다.
‘위험하다!’
이미 귀환석이 발동 중이기 때문에 피하기도 어려웠다.
급히 배지로 보호막을 두르고 등가교환으로 보호막의 강도를 높였다.
쨍그랑!
하지만 신좌의 힘이 담긴 신기를 막아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창이 단숨에 보호막을 뚫고 파고듦과 동시에.
우우우웅!
몸이 다른 곳으로 이동된다.
나는 뺨에 난 자그만 상처를 손으로 훑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했겠어.’
하지만 위험을 감수한 만큼 얻어 낸 성과도 있었다.
[등반자들 중 최초로 신좌와 대적한 것도 모자라 타격을 가했습니다!]
[등반자의 이명의 격이 오릅니다!]
격이 오른 것은 덤이고. 더 이상 내게 있어 신좌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르켈라의 모습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비록 헬리오스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신좌에게 공격이 통한다는 걸 알아냈다.
이내 왕성으로 되돌아온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이 밝았던 썬즈 부유섬과는 달리 왕성의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케헹!
한편 다칼이 삐친 표정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뜬금없이 왜 삐쳐 있어?”
대답이 없자, 이름을 불렀다.
“다칼! 야!”
묵묵부답이던 다칼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나보고는 나서지 말라고 해 놓고 자기는 나서다니. 난 그대에게 복수를 대신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삐친 이유를 알게 되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거야 내가 대신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 그저 신좌와 대적이 가능한지 가늠을 해 본 것뿐이야. 오해라고.”
-대신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도 그댄 날 말리고 직접 나섰지. 나도 그 녀석에게 한방을 먹여 줄 수도 있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제대로 토라진 듯하다.
‘쉽게는 안 넘어가겠는데?’
솔직히 다칼의 입장에서는 삐칠 만한 일이긴 했다.
나는 아기처럼 작아진 다칼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안.”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최대한의 양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칼은 등을 돌린 채였다.
“설마, 먼저 사과를 하는데 신수가 쪼잔하게 안 받아주고 그러는 건 아니…….”
목석같던 그의 목이 돌아갔다.
다칼은 날 보며 소리쳤다.
-대체 누가 쪼잔하다는 것인가!
“사과. 받는 거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자, 다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살포시 내 손 위에 발을 올렸다.
“이걸로 화해! 그만 가자고.”
볼일을 끝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위이이잉!
갑자기 이상한 굉음이 울리며 어둡던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자가 자신에게 한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자가 네놈의 펫에게서 페르라의 기운이 느꼈다고 말합니다!]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자가 다만 지금이라도 흡수한 헬리오스의 숨결을 내놓고 페르라가 있는 곳을 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웃기는 소리.”
어떻게 얻어 낸 숨결인데, 이걸 되돌려 달라고 하다니.
아무리 신좌라지만 염치가 없다.
차라리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더욱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페르라의 위치는 말해 주고 싶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지금 존재했어도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멀리 들리도록 소리쳤다.
“어디 빼앗으려거든! 빼앗아보시지!”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까 전에 르켈라가 현현하기 전에 나타났던 징조 현상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마치 시간이 되돌려지는 것처럼 빛이 역류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왔군.’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에페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었다.
태양과 달을 가진 르켈라이지만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에페르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자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힐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에페르는 내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번씩이나 교회를 구해 낸 영향이 큰 모양이다.
이내 대낮이던 하늘은 다시 밤으로 물들어 있었다.
“크르응.”
-아쉽군. 다시 나타났으면 이번엔 내가 한방을 먹여 주려고 했건만.
그러며 다칼은 입맛을 다셨다.
꼬르륵.
그때 배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간만에 전력으로 움직여서인지, 일을 끝내자마자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 몰려 왔다.
‘돌아가서 뭐라도 먹어야겠군.’
구아아아앙!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곧장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다칼이 배를 달래기 위해 앞발로 문지르고 있었다.
‘무슨 배 속에 무전기라도 넣어 놨나.’
황당해하던 것도 잠시.
나는 아까 전에 벌어졌던 일을 되새겼다.
‘탑이 당연히 개입해야 할 상황에 개입을 하지 않았어.’
상층부면 몰라도 중층부에서 만약 신좌가 신기를 드러내면 그 순간 즉시 탑이 개입을 하게 되어 있다.
‘혹시 내가 헬리오스의 힘을 흡수해서 그런 건가.’
힘의 일부이기는 하나 아무튼 신좌의 힘을 흡수했으니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이명의 격이 반 신좌급에 올라선 상황이다.
여러 가지를 빗대어 보았을 때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걷고 있고.
그것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는 행동할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전까지는 탑의 개입으로 인해 신좌를 아무리 도발해도 크게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다른 등반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언제나 내게 복수를 하려고 벼르고 있던 몇몇 신좌들을 조심해야만 했다.
보통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고서는 시도하지 않을 테지만.
이젠 그들의 영역에 들어설 때면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르켈라처럼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남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신좌에게도 치명적인 패널티가 부여되기 때문에 걱정할 부분은 아니었다.
다만 르켈라보다 조심해야 할 놈이 있었다.
최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신좌이자 수많은 계약자들을 데리고 있는 제우스가 마음을 먹으면 당장에라도 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아직 제우스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 그러한 일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힘을 키워야만 한다.
나는 양 주먹을 꽉 쥐고선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빨리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또 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