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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탑 등반자-180화 (180/230)

회귀한 탑 등반자 180화

180화 성녀 (1)

어두침침하고 고요하다.

찍찍.

사람 팔뚝만 한 쥐들이 기어 다니고, 썩은 물이 고여 지독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손으로 코를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유희는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몇 번이고 길을 확인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지 않았다.

왕성 밑에 있는 지하수로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러웠다.

애당초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니 관리가 안 되어 더러울 수밖에 없지만, 비위가 좋은 편인 그녀조차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악독한 환경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장소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돌아갔을 터이다.

“어?”

이내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

순간 밑을 보곤 발걸음을 멈추었다.

통로 끝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 존재했다.

쏴아아아-

같이 흘러 들어온 물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원통형의 절벽에 뚫린 수많은 구멍에는 물이 흘러나왔다.

‘준석이가 말했던 대로야.’

지하수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 있다고 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찔함마저 들었다.

‘저기로 뛰어내리라고?’

절로 고개가 흔들어지는 풍경이었지만 시험 장소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탓!

유희는 가볍게 몸을 튕겨 밑으로 뛰어내렸다.

펄럭!

그녀의 등에서는 휘황찬란한 새하얀 한 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깃털에 빛이 서려 있어, 주변을 밝혀 주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사방에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도 환하게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샤이닝 라이트.

우웅!

그녀의 손에 커다란 구체가 생겨났다.

구체의 빛은 매우 강력해 칠흑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

퐁!

지면에 도달한 것인지 발에서 굼실굼실 물결이 쳤다.

유희는 샤이닝 라이트를 하나 더 만들어 공중에 띄웠다.

점차 가려져 있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좌측에서 되돌아온 물결이었다.

그녀는 물결이 되돌아온 곳을 따라 걸었다.

곧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기 천사 두 명이 얼싸안고 있는 낡아 빠진 문이 드러났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문틀에서 빛이 번쩍였다.

[이미 신성한 시험을 치를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유희는 눈앞에 있는 메시지를 보고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

긴장감을 덜어 놓으려 숨을 크게 내뱉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치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전해 둔 샤이닝 라이트도 무용지물이었다.

덜컹!

우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유희는 소리에 반응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무대 조명이 비추듯이 땅 아래서 빛이 쏘아 올려졌다.

그리고 빛이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석상 하나가 있었다.

검과 방패. 갑옷을 껴입은 여성이 두 쌍의 날개를 접은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툭.

유희는 한 발을 내디뎠다가 이내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날 바라보고 있어.’

고정되어 있어야 할 석상의 눈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용기와 희생을 보여라.]

쿠구구구-

석상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니, 껍질을 벗겨 내듯 석고를 털어 내고 본모습을 드러낸다.

[눈물을 흘리는 천사 라니에스타가 등장하였습니다.]

붉은 띠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라니에스타의 눈가가 촉촉했다.

유희는 굳은 표정으로 날개를 펼친 라니에스타를 바라봤다.

석고를 털어 내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지자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지이잉!

라니에스타가 들고 있는 검과 방패에서 누런빛이 방출됐다.

이내 허리와 팔을 움직여 자세를 취한 라니에스타가 검을 휘둘렀다.

쿠콰가가가!

날아든 검기에는 어마어마한 풍압이 실려 있었다.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 낸 유희는 우측 눈썹 옆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냈다.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정답은 명확했다.

라니에스타를 쓰러트리는 것.

그러나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 자리가 그녀의 무덤이 되리라.

어떠한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도록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다졌다.

[강철의 의지가 깃듭니다.]

두 눈에는 강렬한 정기가 깃들었다.

타앗! 펄럭!

새하얀 날개가 활짝 퍼졌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유희는 기합을 내지르며 어느덧 머리 위로 쳐든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빛의 섬광이 라니에스타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검격을 휘두르는 건 라니에스타도 마찬가지였다.

쿠콰아앙! 콰가강!

둘의 공격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충돌음이 커져 갔다.

“흐아아!”

하나, 시간이 지나며 유희가 서서히 우세를 차지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그런데 그때 시야에서 환각이 일어났다.

라니에스타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준석……?’

이내 하성태로 바뀐다.

가까운 지인들이 형상으로 나타나며 그녀의 집중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촤악!

“끅!”

집중이 풀리니 자연스레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꽤 공격이 깊게 들어왔다.

강한 치유력으로 회복을 시작했지만 계속 상처가 늘어가니 점점 출혈이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정말로 치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엄마? 아빠……?”

“유희야.”

“제발 그만해, 유희야……!”

유희는 저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마음이 멎어 온몸이 굳어졌다.

푹!

시린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쿠억!”

심장은 비껴나갔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틀림없었다.

“허어억. 허억…….”

급히 뒤로 물러난 유희는 방패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대신 손으로 상처 난 가슴을 압박했다.

채앵!

유희는 기습적으로 파고든 공격을 가까스로 튕겨 냈다.

“허읍.”

더욱 거리를 벌린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덕분인지 오히려 잃어버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가오는 라니에스타가 보인다.

한데 어느 순간 다른 시야가 보였다.

“으아아앙!”

애처롭게 울부짖는 어린아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모르는 아이었지만 누구든지 상대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행동을 멈칫하게 될 것이다.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푹!

“끄어억!”

이번에는 옆구리를 찔렸다.

‘환각에 속으면 안 돼!’

유희는 정신을 번뜩 차리고 환각이 아닌 진짜를 보려고 노력했다.

[극도로 집중력이 올라갔습니다.]

[일시로 정신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내 환각을 걷어 내고 상대의 공격이 흐릿하게 보였다.

채앵!

유희는 파고드는 검을 튕겨 낸 뒤 재빨리 성역을 발동했다.

그리고.

[대천사의 축복을 받습니다.]

다친 상처들이 아물어 간다.

유희는 검을 번쩍 들어 땅을 가르듯 아래로 내려쳤다.

레이 블레이드!

쿵. 쩌저저적!

바닥에 있는 어둠을 두 쪽 내고, 벌어진 틈으로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빛이 물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신성력이 전신으로 뻗어 나왔다.

지잉-

칼날이 황금빛으로 도광됐다.

대천사의 난도질!

일순간에 유희는 수많은 동작을 했다.

촤자자자자자잣!

라니에스타의 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선들이 생겨났다.

조각조각 나 버려야 정상이지만 라니에스타는 깊고 얕은 상처들만 얻었을 뿐.

여전히 멀쩡히 서 있었다.

“칫!”

완전히 잘라 내기에는 신체가 너무나도 단단했다.

유희는 그것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일시로 올라갔던 정신력이 다시 떨어지며, 보이지 않았던 환각이 다시 보이고 있었다.

위기였다.

어중간한 기술들은 전부 배제하고서 최고의 기술들만 사용했다.

한데 상대는 그 기술을 받아 낸 것도 모자라 강력한 환각까지 걸었다.

‘어떻게 하지?’

그저 부딪혀 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분명히 목숨이 위태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희는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럴수록 오히려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고 뛰어들었다.

라니에스타가 퍼붓는 공격에 갑옷이 엉망이 되고 곳곳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허억, 헉.”

점점 회복되는 속도보다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아졌다.

유희는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보며 혼잣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안 돼…… 여기서 절대 쓰러질 수 없어.’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퍼엉!

“쿠웨엑!”

발길질을 당한 유희는 피를 토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하나, 현실은 무겁고 차가웠다.

탱캉!

라니에스타가 방패로 그녀의 몸을 밀치곤 하늘 높이 쳐들은 검을 내리찍었다.

푹!

“허, 허윽.”

검이 정확하게 심장에 박힌다.

‘아, 안 돼…….’

머리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을 넘어서인지 통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손과 발은 마비가 된 듯 움직여 주질 않았고.

오장육부가 뒤틀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이대로는 안 돼.’

탁!

어디서 샘솟은 힘인지 유희는 라니에스타가 찌른 검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우우웅!

그리고 체내에 있는 모든 신성력을 퍼부었다.

쩌저적, 채앵!

도저히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검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 순간, 라니에스타에게 빈틈이 생겼다.

유희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전력으로 내뻗었다.

푸학!

검이 닿은 곳은 라니에스타의 목.

유희는 싸우면서 어디 부분이 약한지 파악한 상태였다.

쩌적, 쩌저적!

목에 닿은 칼날로 인해 라니에스타의 몸이 거미줄처럼 틈새가 벌어지고 있었다.

틈새 안에서는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드드드드! 콰아앙!

곧 라니에스타 몸이 폭발하며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유희는 거적때기처럼 충격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갔다.

“하아, 하아.”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여력도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그저 숨을 쉬려고 호흡을 쥐어짤 뿐이다.

눈이 감겨 오기 직전.

새로 뜬 메시지들이 그녀의 멀어졌던 의식을 다시 데리고 왔다.

[눈물을 흘리는 천사 라니에스타를 처치하였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대단한 용기를 보여 주였습니다.]

[희생이라는 개념을 깨우칩니다.]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모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당신을 성녀(聖女)로 승격합니다!]

[주어진 통합 미션이 변경됩니다.]

[성녀(聖女)에게만 주어지는 ‘선택받은 자의 성복’을 획득합니다.]

[성녀(聖女)만이 가진 정화와 축복 스킬을 획득합니다.]

[성녀(聖女)가 되어 이명의 격이 대폭 오릅니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당신에게 성녀의 축복을 내립니다.]

싸늘하게 죽어 가던 그녀에게 초월적인 힘이 깃들었다.

그 힘은 죽어 가던 몸을 되살리고, 그녀의 잠재된 힘을 외부로 끌어냈다.

그리고 성녀에게만 주어지는 선택받은 자의 성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찬란하고 단아한 새하얀 정복은 성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우웅! 콰아아아아아앙-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어둠을 뚫고서 위로 치솟았다.

지하수로에서 벗어나 밖에 하늘로 치솟은 빛줄기는 왕성에 있는 모두가 목격했다.

하늘에 빛이 만들어 낸 역삼각형은 성녀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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