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79화
179화 전조 (3)
화아아악!
아멜을 처단했지만 여전히 불길은 치솟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교회가 다 타 버릴 텐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지팡이를 정면으로 내세우며 체내에 응집되어 있는 마나를 외부로 방출시켰다.
마나의 형상이 지팡이를 타고 올라가 끝자락에서 팽창을 일으켰다.
파앙!
그 반발로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바람처럼 주변에 있던 불길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불을 끄기에는 한참 부족했으나, 애초에 충격파로 진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우웅, 우웅-
촘촘히 흩어진 마나 알갱이들이 소멸되지 않게 유지시켰다.
프로스트쇼크!
쿵! 쩌저적!
전 방위로 마나 알갱이들이 있던 위치에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꽃처럼 피어나 위협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형상을 띠었다.
기세등등하게 타오르던 검붉은 불꽃은 한순간에 잠식되어 버렸다.
스으으-
되레 마법의 여파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와 주변에 있는 것들이 전부 하얗게 물들었다.
더 이상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갈무리를 시도했다.
“후~.”
급한 불은 껐다.
“준석 신자?”
고개를 돌리니 사뮤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준석 신자가 어떻게 알고 여길…….”
사뮤엘에게 다가갔다.
“그보다 어디 다친데 없습니까?”
“예. 멀쩡합니다.”
쿵! 쿵!
누군가가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사뮤엘과 나는 동시에 정문 쪽을 바라봤다.
밖에 있는 성기사들이 안으로 쳐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사뮤엘이 다급히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그럴 순 없습니다.”
기사단장인 아멜이 죽었다.
지금 내가 물러난다면 사뮤엘은 꼼짝없이 아멜을 죽인 살인자에 교황을 시해한 반역자로 몰리게 된다.
쿵! 쿵!
“준석 신자! 어서!”
그러나 사뮤엘은 자신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내 안위를 신경 쓰고 있었다.
“크릉.”
-올곧은 사내로군.
다칼의 말에 동감하는 바였다.
‘탑에서 보기 드문 사내이지.’
밖에서도 이런 인물은 만나 보지 못했다.
그가 보여 준 신뢰에는 상응하는 보답을 하는 게 맞았다.
거기다 향후 내게 큰 도움이 되어 줄 인물이다.
쾅!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철커덕, 철커덕!
열리자마자 철갑옷을 껴입은 성기사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성기사들은 우릴 옭아매듯 반원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직급이 높은 성기사 한 명이 나서서 소리쳤다.
“사뮤엘 주교는 들어라! 감히 교황을 시해한 죄! 기사단장인 아멜을 살해한 죄!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엄중한 죄를 지었다! 지금 당장 사뮤엘 주교와 그 밑에 있는 추종자는 투항하라!”
그러자 사뮤엘은 나를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자는 우리 교회를 다니는 평범한 신자일 뿐이오. 잡아가려거든 나만 잡아가시오.”
“반역자의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 투항하지 않겠다면 무력으로라도 진압해 주지.”
쿵, 타앙!
그들은 훈련을 받은 대로 방패를 앞세워 방어진을 펼쳤다.
철커덕, 철커덕!
이어서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크하아앙!”
다칼이 거대한 몸집으로 변해 그들을 위협했다.
압도하는 크기에 다가서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아우우우우-!”
“으아악!”
“으윽!”
하울링 소리에 성기사들이 귀를 틀어막는다.
“그만.”
내 명령에 다칼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뮤엘 님, 이만 물러나십시오.”
“준석 신자…….”
“이제 신자가 아닙니다. 주교입니다.”
“그럼 회의에 불려 간 이유가……?”
“네. 대악마를 처치한 공적을 인정받아 주교로 승급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준석 신…… 아니 주교.”
짧은 찰나, 사뮤엘이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
사뮤엘은 나를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사뮤엘이 굳은 표정으로 남들이 들리지 않도록 작게 얘기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러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준석 주교는 이곳에서 벗어나십시오. 다만……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교단 내부에 악마들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내 부디 처단해 주십시오.”
사뮤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교단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를 두고 가는 건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다.
“다칼, 물러서.”
“크하아앙!”
다칼이 그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후 나 혼자서 그들에게 다가섰다.
“준석 주교! 안됩니다!”
사뮤엘이 뛰쳐나오는 걸 다칼이 제지했다.
나는 다칼을 보며 속으로 잘했다고 칭찬을 하곤 다시 정면을 내다봤다.
“추종자는 얌전히 투항하라! 그럼 목숨만이 살려 주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웃어?”
“목숨을 구걸해야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일 텐데.”
“뭐라?”
“알고 있었나? 기사단장 아멜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기사단장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리 말하는 것인가? 아님…….”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살기를 내뿌렸다.
“크윽!”
음영 바다의 팔찌 능력인 극한의 공포가 성기사의 목을 옥죄었다.
“너도 악마와 손을 잡은 건가?”
일부 몇몇이 내 얘기를 듣고서 동요하고 있었다.
극한의 공포에 걸린 성기사가 힘겹게 말을 잇는다.
“모두 악마의 혀에 농간당하지 마라! 저자들이야말로 교황님과 기사단장님을 죽인 악마 녀석들이다!”
그 말에 동요의 눈빛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기껏 흔들어 놨더니만.
뭐. 딱히 상관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내 들었다.
“저건!”
다들 놀라다 못해 당황한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교단 사람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단심판관.
두려울 것 없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성기사들마저도 이단심판관을 보면 벌벌 떨었다.
“이곳에 이단심판관이 있을 리가!”
나와 말을 섞던 성기사는 현실을 부정했다.
“감히 이단심판관을 사칭하다니! 저자를 척결하라!”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지금 움직이려는 성기사들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이단심판관을 공격할 경우 즉결 처형이 가능한 것은 알고 있나? 그리고 공격한 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인척도 즉결 처형하도록 되어 있지. 어디 그리 확신하면 공격해 봐. 그 후 어떻게 되는지 몸소 보여 줄 테니.”
단순한 말 한마디였지만 그것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철커덩!
그중 한 명이 검과 방패를 떨구었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확실한 표현을 한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성기사들도 차례로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성기사들에게 말했다.
“기사단장 아멜은 악마와 손을 잡고 죄 없는 사뮤엘 주교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다. 그렇기에 이 손으로 직접 처단했지.”
성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직 그 악의 뿌리가 남아 있는 듯하군.”
짧은 침묵이 흘렀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흡수해.”
스아아아악-
지팡이 끝에 달린 검은 구슬이 강하게 진동을 일으키더니 이내 주변에 있던 모든 악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으윽!”
“크하아아!”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던 성기사들의 몸에서 악령이 튀어나왔다.
“악, 악령이다!”
악령이 없는 성기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신실한 동료였던 자가 악령을 데리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어어!
우어어어어!
악령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구슬에 빨려 들어갔다.
악령은 제거했지만 아직 처단은 끝나지 않았다.
홀리크로스.
신성한 십자가가 한순간에 허공을 뒤덮었다.
“으, 으아악!”
“도, 도망쳐!”
지레 겁을 먹은 타락한 성기사들이 도망을 쳤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나의 손짓에 허공에 떠 있던 십자가들이 움직였다.
십자가는 그들을 추격해 징벌을 내렸다.
“으아아아아!”
씨이이이-
뼈와 살을 남김없이 소멸시켰다.
잔재라고는 검은 잿더미뿐만 남았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철커덩!
끝까지 무기를 들고 있던 이들마저도 무장을 해제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고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너희들은 에페르 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신성한 교회를 망가트리고 태우려고 했다! 그리고 죄 없는 자들을 잡아다 징벌을 내리고 교단을 어지럽히려고 했지. 이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일.”
그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본래는 그대들한테 징벌을 내려야 마땅하나! 용서의 기미가 보이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또한 교단에 속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책무. 그래서 그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어느새 성기사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망가진 교회를 원복하고 사뮤엘 주교에게 쓰인 누명을 벗기는 데 사활을 걸어라! 그리하면 자비로우신 에페르 님께서도 그대들에게 용서의 뜻을 보이실 것이다.”
“에페르 님께 맹세를!”
“에페르 님께 맹세를……!”
다들 맹세 선언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 중 제일 높은 상급자가 나와 내게 말을 걸었다.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 이름이 뭐지?”
“아, 알프레도입니다.”
“알프레도 경,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사뮤엘 주교가 교황을 시해했다는 죄를 덮어쓴 거지?”
“그게……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저 위에서 지시가 내려졌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위에서부터 손을 봐야 할 듯싶다.
“으음…… 그건 됐고, 엘프레도 경.”
“예!”
“그대가 책임지고 저들을 이끄십시오. 그리고 오늘 여기서 벌어졌던 일들은 윗선들 앞에서 그대로 보고하고, 필요하다면 증언도 하셔야 합니다. 다만 그 보고하는 시기를 조금 늦춰 주십시오.”
“혹시 이유가 있습니까?”
“쥐새끼들을 잡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잘 알겠습니다.”
이미 칼을 뽑아 든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게 되면 되레 뽑아 든 칼이 내게 되돌아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뮤엘은 다시 교황을 시해한 죄로 잡혀들 것이 뻔했다.
그러기에 앞서, 저들이 대처를 하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우선 엘리자를 만나 봐야겠군.’
이럴 때 그녀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교단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알베스토를 만나 봐야 했다.
하지만 몸은 하나.
그때. 내 눈에는 사뮤엘이 들어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뮤엘에게 다가가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하곤 알베스토와 만나 보라고 말했다.
“준석 주교, 자네의 말을 따르지.”
내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 사뮤엘이 마지막 말을 남기곤 서둘러 교회를 떠났다.
한편 성기사들은 알프레도의 주도하에 교회를 원복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슬슬 발걸음을 뗐다.
교회를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밤이 길어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