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77화
177화 전조 (1)
라자는 차가운 눈빛을 띠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두 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어. 그게…….”
나는 손을 뻗어 오진하를 조용히 시켰다.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길을 가다 봉변을 당했을 뿐입니다.”
라자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분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겁니까?”
“예. 어째서 저희가 연관되었다고 단정 지으십니까? 라자 주교야말로 편향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요.”
그녀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편향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다니요. 절 모함하시는 건가요?”
“모함이 아니라 방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저흴 의심하셨지 않습니까.”
그녀가 우리가 싸우는 것을 지켜봤다면 모를까.
이미 다 끝나 버린 상황을 직접 봤을 뿐이었다.
“그럼, 두 분 몸에 묻은 피는 뭔가요?”
나는 옷깃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쓰러진 분들이 살아 계신지 확인하는 과정에 묻었나 보네요.”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라자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라자는 우리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이유를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야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조사에 들어갈 겁니다.”
“당연한 일이죠. 시신 중에 교단 사람도 있는 듯했습니다.”
말은 추측성으로 내뱉었지만 대다수는 교단 사람들이라고 보면 됐다.
“그럼 더더욱 그냥 지나갈 수 없겠군요.”
라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일 조사하는 과정에 두 분이 이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밝혀진다면 그땐 징계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도 궁금하네요.”
잔해의 흔적만으로 우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다.
목격자가 있지 않는 한 교단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할 터이다.
설사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적정 부분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징계를 받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런데. 라자 주교는 여기에 어쩐 일입니까? 혹시 신전으로 들어가신 척하고, 저흴 미행한 것은 아니겠죠?”
“무, 무슨 그런 불경한 말을!”
“얼굴도 붉어지시고 말도 더듬으시는 게 더욱 수상하네요.”
“미행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교황님이 시키신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시키신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을 말하는 겁니까.”
라자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교황님께서 두 분에게 이걸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배지 하나씩을 건네받았다.
나는 배지에 새겨진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세 개의 검이 중앙에 있는 삼각형을 찌르고 있었다.
이단심판관에게만 주어지는 심판 배지였다.
‘기대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교황은 우리를 자신의 검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왜 직접 물건을 건네주지 않고 이렇게 따로 보내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신전에 혹시 모를 감시가 있을까 피한 것이겠지.’
라자가 신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온 것도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단심판관은 교단 내에 신분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
겉으로는 남들과 똑같이 활동하면서 뒤로는 이단을 처단한다.
오늘의 형제자매가 한순간에 자신이 죽여야 할 이단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심판관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로 부쳐진다.
신분이 알려져 있으면 어떤 보복행위를 당할지 모르고 이단을 조사하는데도 큰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지급 받은 배지는 절대로 남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교황님의 지시입니다.”
‘교황이 이 여자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믿어도 된다는 뜻인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교황에게는 신뢰를 받고 있을지 모르나 나는 신뢰할 수 없었다.
우선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뿐더러.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은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럼, 전 용무를 마쳤으니 이만.”
볼일을 마친 그녀는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이게 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니까?”
나는 배지가 가지고 있는 뜻을 알고 있었지만 현재 위치상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에 모른 체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자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추후 알게 될 거예요.”
지금은 딱히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이곳의 문제를 수습할 사람들을 보낼 겁니다. 조사차 두 분에게도 조사원이 파견될 테니 그리 알고 계세요.”
라자가 모습을 감춘 뒤에야 오진하가 입을 열었다.
“걸리지는 않겠죠……?”
“우리가 모르는 목격자가 나오면 걸릴 수도 있겠지.”
“그땐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빼도 박도 못하면 그냥 받아들여야지.”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아니.”
징계를 받게 될 경우 층을 오르는데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주교 위에 있는 대주교. 그리고 추기경까지 빠르게 올라가려면 징계 없이 성과를 달성해야만 하는데.
만일 경징계나 혹은 중징계를 받게 되면 그것이 진급에 영향을 끼쳐 진급이 누락될 수도 있었다.
비교적 경징계는 그 영향이 미미하지만 중징계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래도 이단심판관이 된 것은 큰 기회다.’
보통 이단심판관이 맡는 일은 다른 사제들에 비해서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진급에 유리하다.
‘잘만 이용하면 금방 대주교까지 오를 수 있어.’
한편 징계를 걱정하던 오진하는 손에 쥐어진 배지를 보곤 말했다.
“근데. 대체 이게 뭘까요?”
“이단심판관에게 주어지는 증표야.”
“예!? 이단심판관이요?”
“그래. 교황이 우릴 자신의 칼로 쓰기로 마음먹은 거지.”
“언제 봤다고 우릴 자기 칼로 쓴대요? 대체 뭘 믿고? 차라리 기존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고르는 게 편할 텐데.”
“기존에 있는 사람들을 못 믿는 거겠지. 물은 고일수록 썩는 법이니까. 오히려 우릴 신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야.”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릴 이단심판관으로 임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명예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
에페르가 직접 하사한 증표만큼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캬하아함~.”
이내 뒤에 숨어 있던 다칼이 걸어 나온다.
다칼이 굳이 숨어 있던 이유는 라자에게 신성력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신성력을 방출하고 있었으니 다칼이 싫어할 만도 했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원래는 다칼을 데리러 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이미 이곳으로 불러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도중에 인듀어 길드원들과 싸우는 바람에 진이 다 빠져 있는 상태.
체력은 멀쩡해서 상관없지만 마나가 바닥나 있어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했다.
현 상태로는 히든피스가 있는 장소에 가도 원하는 것을 얻기가 어려웠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 조금은 쉬었다가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에페르 신전 기도실.
한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로 에페르에게 기도를 올렸다.
덜컹!
곧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눈을 천천히 뜬 여성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정면에 있는 역삼각형 표식을 응시했다.
기도실에 들어온 인물, 라자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교황 성하.”
“잘 전해 주고 왔나요?”
“예. 지시하신대로 둘에게 전달했습니다. 다만 중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요?”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준석 주교와 진하 사제가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에 휘말린 듯합니다.”
“사망자가 나왔나요?”
“예. 제가 파악하기로는 둘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문제는 사망자들의 대다수가 교단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인듀어 길드원으로 보였습니다.”
“인듀어, 또 그놈들이…….”
교황, 아네제는 인듀어 길드가 여태 저지른 악행위들을 떠올리며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황 성하, 인듀어 길드의 횡포가 나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불만도 같이 커지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그걸 위해서 정화 작업을 따로 준비 중입니다.”
정화 작업은 인듀어 길드이면서 동시에 교단에 속해 있는 자들 중 규율을 어긴 자들을 전부 처단하는 것을 뜻했다.
아네제는 분노를 갈무리하고 냉정함을 되찾은 뒤 얘기했다.
“라자 주교.”
“예, 교황 성하.”
“그들은 어때 보였나요?”
“그들이라면…… 준석 주교와 진하 사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요.”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왜 그 둘을 이단심판관으로 선택했는지 의문입니다. 아무리 대악마를 처치한 공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들을 신뢰를 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이니까요.”
“간단합니다. 준석 주교는 명예의 증표를 가지고 있죠. 그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에페르 님께서 증명해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 사실을 처음 안 라자는 아네제가 왜 둘을 이단심판관으로 선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둘은 등반자입니다.”
언제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돌려서 말했다.
그러자 아네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등반자라는 것쯤은.”
그렇게 눈에 띄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태 에펠 왕국의 백성으로 조용히 살아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층을 오르는 등반자라는 뜻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준석 주교는 대악마를 처치한 자입니다. 그가 어떤 인품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단을 처치하는데 그만한 인재는 찾기 힘들죠.”
아네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곧 왕성이 피바다로 물들 겁니다.”
고개를 돌린 아네제가 라자를 바라봤다.
“드디어 그들이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말을 들은 라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군요.”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죠.”
“정말로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실 생각입니까? 절대로 작은 피해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아네제가 말을 잇는다.
“저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때론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존재하는 법이죠.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감히 교단에 들어와 더러운 악마 놈들과 접촉한 것도 모자라 손을 잡다니.”
아네제는 역삼각형 표식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아래에 놓인 있는 성검을 쳐다보았다.
“지금 성녀가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라자는 조용히 아네제의 등 뒤로 이동했다.
“라자 주교?”
무언가가 이상한 기류를 느낀 아네제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푹!
라자가 서글픈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네제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대가 어떻게……?”
“죄송합니다.”
“크윽…….”
아네제는 몸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며 심하게 비틀거렸다.
뚝. 뚝.
그녀의 몸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라자는 기도실에서 도망치려는 그녀를 뒤쫓아 갔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1년을 지냈으면 이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털썩!
얼마 가지도 못해 아네제가 쓰러졌다.
라자는 쓰러져 있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피가 묻은 단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아네제는 라자와 두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라자 주교…… 설마 그대가……?”
하지만 라자는 아네제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그저 마지막 인사말을 남길 뿐이었다.
푹!
검이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생기가 넘쳐흐르던 아네제의 두 눈동자에는 곧 죽음의 회색빛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