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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탑 등반자-171화 (171/230)

회귀한 탑 등반자 171화

171화 옛 인연들과의 만남 (2)

“음. 그러니까…… 지금 너 말을 정리해 보자면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내가 그…….”

유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곧 내게 가까이 붙어 남들이 들리지 않게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성녀가 된다는 거지?”

“어. 그런데 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거야?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유희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좀 그렇잖아. 내가 신자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성녀라면 조금 더…….”

“조금 더 뭐?”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자격? 대체 네가 말하는 그 자격이 뭔데.”

“왜 그 있잖아. 외모나 성품적으로 뛰어난.”

“네가 뭐 어때서. 내가 보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구만. 그리고 성녀가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외모나 성품이 뛰어나야 되는 건 아니야. 그런 게 사람들에게는 선전적인 효과는 불러일으킬지 몰라도 애초에 우린 이곳에 눌러앉아 살 게 아니라 층을 오르기 위해서 미션을 수행하는 것뿐이야.”

유희는 내 말뜻을 이해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는지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내 유희가 입을 열었다.

“성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나한테 안 어울린다고만 생각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그런데. 장소 말고 시험으로 뭘 치르는지는 모르는 거야?”

“나도 더 알려 주고 싶지만 아까 말해 준 게 내가 아는 전부야.”

“아쉽네.”

“두 분만 착 달라붙어서 뭐하십니까?”

조용히 뒤로 접근해 온 하성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 얼굴을 손으로 치우며 말했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말을 돌리시니까 더 궁금한데요. 혹시…… 러브러브한 상황에 제가 눈치 없이 끼어든 겁니까?”

“성태 씨.”

유희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예?”

퍽!

“어억!”

유희는 하성태를 주먹으로 응징했다.

하성태는 배를 부여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깼다고 이렇게까지…….”

“혹시. 러브러브하게 한 번 더 맞을래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하하…….”

그때 에레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우리가 듣지 말아야 될 얘기야?”

툭 던진 말이었지만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들 딱히 나서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희를 쳐다봤다.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직접 말해.”

“아…… 그게.”

유희는 말하길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사실을 얘기해 나갔다.

내용을 들은 유희의 일행은 모두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큭큭큭, 푸하하하!”

그 침묵을 깬 것은 내내 조용히 있던 카를로였다.

카를로는 한참을 웃더니 흘려 말하듯 얘기했다.

“그럼 앞으로 우리 길드는 성녀께서 이끄시는 건가?”

맥을 끊는 듯한 대사였지만 얼어붙었던 분위기를 녹이는 데는 충분했다.

“성녀! 뭔가 언니랑 잘 어울려요!”

박자린은 엄지 척을 하며 유희를 치켜세워 주었다.

“흐응~ 뭔가 성녀라는 말이 입에 안 붙을 것 같긴 하지만. 유희라면 썩 나쁘지 않아.”

에레나도 유희가 성녀가 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브루스와 에린도 길드마스터가 성녀가 되는 것에 대해서 딱히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하성태는 유희 앞에 무릎을 꿇더니 애절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성녀님! 저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유희는 조용히 주먹을 들었다.

퍽!

“아악!”

머리에 혹이 생겨난 하성태가 훌쩍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유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씩 일행들을 바라봤다.

“제가 성녀가 되든 안 되든 그런 건 사실 딱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층을 올라가면서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유희의 말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고 계실 거예요. 미션이 다른데 과연 이전처럼 함께할 수 있을까?”

장난기가 넘치던 하성태도 유희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 과정에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 몰라도 결국에는 최종 목적지는 똑같습니다. 그러니 각자 주어진 미션에 충실하세요.”

일행들의 눈빛에는 불안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유희에 대한 깊은 신뢰감만이 드러날 뿐이었다.

길드마스터와 길드원들 사이에 강한 결속력이 맺어져 있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유희가 입을 열었다.

“미션에 충실하다 보면 그 안에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 힘든 사람을 외면치 않고 잘 이끌어 주었으면 합니다.”

이후에도 연설은 계속되었다.

한 20분쯤 흘렀을까?

말을 마친 유희가 내게 사과를 해 왔다.

“미안. 어쩌다 말이 길어졌네.”

“아냐. 흥미롭고 재밌던데.”

나는 유희의 연설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유희는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 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간 정말로 많이 성장했네.”

“뭐야. 인정해 주는 거야? 근데 딱히 보여 준 것도 없는데?”

“이미 많이 보여 줬어. 지금의 너라면 뭘 하든 잘할 수 있을 거야. 솔직히 아란을 처치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더라고. 동료들이랑 같이 싸웠어도 아란 그놈. 잡는 게 쉽지가 않거든.”

유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란을 잡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말한 적 없는데.”

“감시를 붙여 뒀지.”

“아…….”

“그래서. 아란 그놈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자세히 얘기 좀 해 줘 봐. 듣기만 해서 자세한 정황은 모르거든.”

“하~ 그때 무지 힘들었지.”

유희는 아란과 있었던 일을 신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각자 층에서 겪었던 해프닝을 미친 듯이 떠들어 댔다.

* * *

오랜만의 재회에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수 있었다.

“후우~ 진이 다 빠지네.”

초면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애썼던 오진하는 식탁에 발을 올려놓은 채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이내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오늘도 가실 거예요?”

“어딜.”

“어디긴요. 교회 말하는 거지.”

낮이면 사뮤엘과 만나 사담 시간을 가진다.

“가야지. 그런데 그 전에 들릴 곳이 있어.”

“들릴 곳이요?”

“생각난 김에 지금 가자.”

내가 나갈 채비를 하자 오진하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대체 어디에 가는 거예요?”

“대교회.”

“대교회? 원래 가던 교회로 안 가고요?”

“사담 목적으로 가는 거 아니야. 워볼 가지고 있지.”

“예. 가지고 있죠.”

“대교회는 신자들이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기관들이 창설되어 있어. 그리고 그중에 공적치를 기록하는 곳이 있지.”

“아! 그래서. 대교회에.”

가는 목적을 알게 된 오진하는 서둘러서 나갈 준비를 했다.

“크하암~.”

다칼은 미리 내 머리 위로 올라와 나갈 준비를 끝냈다.

“후~ 준비 다 됐습니다!”

“가지.”

우리는 길거리로 나와 광장으로 걸었다.

그리고 북쪽 방향으로 발걸음했다.

광장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뜸해지는 게 보통이지만 북쪽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다수는 대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대교회는 왕국과 교단의 통합 행정 업무를 보기 때문이었다.

곧 대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딕함이 드러난 건물은 오래된 느낌과 함께 신성한 성역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함 뒤에는 복잡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로 북적여 발을 디딜 틈이 없다.

그나마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귀가 시끄럽지는 않았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서, 겨우겨우 공적치 기록소에 도달했다.

공적치를 기록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록소 직원에게 워볼을 건네주고 잠깐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잠시 후 기록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후아~ 더워 죽는 줄 알았네.”

오진하가 목깃을 흔들며 그늘이 진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오진하에게 다시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그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와!”

식사를 오래 한 덕분에 은근히 시간이 촉박했다.

이대로 여유를 부리다간 사뮤엘과 사담은커녕 빈손으로 돌아와야 할지도 몰랐다.

오진하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반복적인 일상을 지냈다.

공적치를 얻기 위해 아침마다 라프하 초원으로 출근하고 낮이 되면 사뮤엘과 만났으며 밤이 되면 예배를 보았다.

달라질 것 없는 평범한 일상.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집에 웬 사제들이 찾아온 것이다.

“사제분들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전해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두 명의 사제 중 앳된 외모를 지닌 남자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두루마리를 건넸다.

‘이건…….’

역삼각형의 마크가 새겨진 두루마리를 펼치자 거기엔 주홍빛을 띤 인장과 함께 출석 명령서가 쓰여 있었다.

“저는 전달했으니 이만.”

사제들이 물러나고, 나는 명령서를 자세히 읽어 보았다.

“신자는 오늘 오후 6시, 주교회의에 참석하라. 뭐지. 참석 사유가 안 쓰여 있잖아?”

보통 출석 명령서 같은 게 전해질 때는 참석 사유가 써 있기 마련이다.

한데 그 사유가 쏙 빠져 있으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대주교급 이상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는 뜻인데.

“딱히 교단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왜…….”

혹시 김동혁과 연관된 일로 부르는 것은 아닐까?

인듀어 길드가 에페르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어 봐야 소용없었다.

‘일단은 가 보는 수밖에.’

아직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사뮤엘과 사담을 나누러 교회로 찾아갔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사뮤엘에게 오전에 받았던 출석 명령서 얘기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사뮤엘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사제도 아닌 일반 신자를 주교회의에 불러들이다니.”

아무래도 사뮤엘은 이 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으음…….”

“뭔가 집히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주교회의에서 신자를 불러들일 때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리죠. 첫 번째는 교단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이 경우는 죄의 크기에 따라 강제로 연행 혹은 출석 요구를 합니다. 다만 사소한 죄라면 애초에 주교회의에 불러들이지도 않습니다. 만일 신자님께서 이쪽에 해당하신다면 어쩌면 사제의 꿈은 접으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될 일이다.

그리되면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리고 만다.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사뮤엘이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나머지 하나는…… 극히 드문 경우이긴 하나. 교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때입니다. 쉽게 말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교단에 상당한 공여를 한 자를 불러들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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