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68화
168화 추기경 (1)
고개를 들자 정말로 악마들이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메테오를 떨궈도 다시 나서던 놈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다니.
악마들 사이에서 대악마라는 존재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교단 복장을 착용한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그다지 나를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단에 입지가 생겨났다는 것은 나를 옹호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물론 반대로 경계하고 적대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단체든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오히려 경계하고 적대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로라가 등장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 덕분에 교단에 입지는 넓히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모든 것이 탄탄대로다.
앞으로 쭉 도움이 될 명예의 증표도 가지고 있고, 전장에서도 적당히 성과를 세웠다.
이제 사제가 되는 일만 남았다.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고 있는 십멸장보다 오진하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였다.
목걸이로 만들어진 에고하트에서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지?’
평소에 에고하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남편 좀 구해 주세요!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지만.
우리 남편이 죽어 가요!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오진하의 아내가 직접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에고하트에 각인된 영혼은 소유자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을 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나 오진하를 죽게 내 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도 아니었다.
나는 그의 몸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온 감각을 집중시켜 체내의 장기들이 멀쩡한지 확인했다.
자세히는 파악할 수 없지만 대략 어디가 손상됐는지 알 수 있었다.
‘비장이 파열됐어.’
다른 부위도 자잘하게 손상을 입긴 했지만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다.
등가교환.
비장을 회복시킨 뒤 나는 에고하트에 대고 말했다.
“치료했으니 기다리면 의식이 깨어날 거야.”
그러나 오진하의 아내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말을 걸어온 것은 오진하를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이 아이템의 숨겨진 힘을 끌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으으윽.”
금세 의식을 차린 오진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에 손을 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괜찮아?”
“어? 준석 씨.”
그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의식을 잃었나요?”
“그래. 기억 안 나?”
“스읍~ 분명 준석 씨랑 게이트를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부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단기적으로 기억을 잃었나 보군. 걱정 마. 쉬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오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할버드를 어깨에 둘러메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몸은 멀쩡한 것 같네요. 응? 자기 뭐라고?”
아내의 얘기를 듣는 오진하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 갔다.
이내 그는 나를 보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고개는 왜 숙여?”
“혜진이한테 들었어요. 절 구해 주셨다고. 감사합니다!”
혜진이라면 그의 아내를 말하는 것이리라.
“구해 주는 건 당연한 거지. 기껏 고용해 놨더니 죽어 버리면 안 되잖아. 물건 만들어 줄 사람을 또 어디서 구하라고.”
오진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예? 그럼 절 구해 준 게…… 절 위하신 게 아니라…… 그쪽을 위해서…….”
“뭐든. 도와준 건 도와준 거지.”
“아. 그건 맞죠! 살려 주신 만큼, 더 괜찮은 물건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마음가짐, 아주 좋아.”
“근데. 사람들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가네요? 악마 녀석들도 안 보이는 것 같고.”
“쫄아서 도망쳤거든.”
“네?”
“아마 당분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야.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고.”
“벌써요?”
“그럼 남아서 혼자 춤이라도 추게? 상대할 적도 없는데 뭐 하러 남아 있어.”
“그건 맞지만…….”
내가 먼저 발길을 돌리자 오진하가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같이 가요!”
* * *
탑의 관리자들이 층을 관망하기 위해 만든 미러룸.
미러룸에는 두 명의 관리자가 스크린을 통해 라프하 초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롭군.”
신사복을 입고 한쪽 눈에만 안경을 쓴 남자는 리모콘으로 초원에서 벌어진 일을 되돌려 보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흥미로워.”
남자 옆에 앉아 있던 하드 난이도의 저층부 관리자 자키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레이 님.”
“자키, 네가 말한 대로 공백이 생긴 것은 확실해 보이는구나.”
“제가 언제 레이 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
레이는 초원에서 벌어진 일을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되감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 앞에 서자, 그 밖으로 우주의 천체가 드러났다.
천체 속에는 위대한 탑이 우뚝 서 있었다.
천체의 중심이자 생명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곳.
레이는 오랜 시간 동안 탑을 위해서 일을 해 왔다.
탑의 완전무결함에 깊이 빠져 탑을 위해서라면 무한한 헌신도 마다하지 않는 관리자.
그런 관리자가 되고자 했다.
한데.
완전무결해 보이던 탑에 공백이 생겨났다.
그것은 레이에게 있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탑의 완전무결함만이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레이는 조용히 뒤따라온 자키에게 물었다.
“아직도 공백이 생겨난 원인이 겨우 등반자 놈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확신할 수 없지만, 공백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나 녀석의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았을 때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레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임시로 중층부 관리자로 올려 주십시오.”
“뭐라고…….”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입니다. 공백을 메우고 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굳이 레이 님께서 위험을 무릎을 쓰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만일 관리자가 층의 규율을 어기고 개입했다는 사실을 탑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되면 관리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과 더불어 페널티가 부여된다.
레이는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그러니 오늘 일처럼 제게 맡겨 주십시오.”
“흐음…… 좋다. 임시로 중층부 관리자로 임명하지. 기한은 딱히 정해 두지 않겠다. 단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을 거야. 만일 공백이 길어지게 되면 커다란 혼돈을 초래하게 될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레이는 가슴에 달고 있는 배지를 자키에게 건넸다.
그가 건네준 배지는 중층부 관리자임을 증명하는 물건이자 권위와 힘이 담겨 있었다.
자키는 배지를 받자마자 그것을 가슴에 달았다.
“그럼, 멀리서 지켜보겠다.”
레이는 말을 마치고 발을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자키는 배지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곤 다음 계획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 * *
게이트 앞은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했다.
“들었어? 악마들이 다 도망쳤대.”
“그럼 뭐야? 기다렸다가 들어가도 포인트고 뭐고 못 번다는 거잖아?! 에이씨!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도망간 원인이 도중에 존나 센 악마가 나타났다가 누구한테 개 털려서 그렇다던데?”
“세면 얼마나 세다고, 한 놈 털렸다고 도망을 가?”
“듣기로 상급 악마였대! 그보다 세다는 얘기도 많아.”
“에이~ 그런 놈을 중층부 초입에서 누가 잡아. 구라겠지.”
“구라라고 하기에는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니던데?”
거리의 사람들 모두가 한입으로 악마들의 후퇴를 이야기했다.
상급 악마나 그보다 위인 대악마가 나타났다가 한 사람한테 털렸다는 얘기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캬릉.”
-전부 너 얘기뿐이군. 다음 날이면 초원에서 벌어졌던 일을 모르는 인간이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어깨에 올라타 있는 다칼을 흘깃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명세야 떨칠수록 좋지. 교단에 들어가면 입김이 세야 하니까.”
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널 쫓아오는 놈들도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둘 건가?
다칼이 옆을 살짝 쳐다봤다.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교단 사람들이 서 있었다.
“냅 둬. 볼일이 있는 거면 알아서 올 거고, 볼일이 없으면 알아서 꺼지겠지.”
그나저나 아까 전부터 오진하가 조용했다.
무얼 하나 봤더니 워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본다고 숫자는 안 바뀌어.”
오진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두 자리 숫자는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세 자리 숫자면 이리 아쉬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90이면 그래도 많이 올렸네.”
악마 한 명당 5씩 상정하면 대략 열여덟 명은 잡은 것이다.
“그러는 준석 씨는 얼마나 올랐어요?”
“나? 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로라를 잡고 난 뒤에는 미처 워볼을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 마지막에 본 수치가 1300 대였지.’
워볼에 적힌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왜요? 얼마나 나왔길래…… 흐어업!”
오진하가 수치를 보곤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는다…
“잠깐…… 이거 숫자가 제대로 적혀 있는 거 맞죠? 고장 난 거 아닙니까?”
“워볼이 왜 고장나. 이만큼 튼튼한 물건도 없어.”
“아니! 15000이나 되는 게 말이 돼요?!”
수치를 입 밖으로 말하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
[15344]
대악마를 잡으면 수치가 많이 상승할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것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상회하고 있었다.
‘로라를 잡고 14000이 오른 건가.’
이 정도의 수치를 얻으려면 못해도 중급 악마를 3천 명은 잡아야 한다.
회귀 전에 지금과 똑같은 수치를 넘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공적치는 약 1천이다.
한데 지금 공적치는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쳤다.
‘당분간 공적치로 걱정할 일은 없겠어.’
“준석 씨, 저 사람들 이쪽으로 오는데요?”
오진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오던 교단 사람들이었다.
멀리 있을 때는 대충 봐서 몰랐는데 맨 앞에 서 있는 여성의 복장 직위를 보니 흥미가 생겼다.
두 어깨에 검은 실선이 세 개였다.
그 뜻은 주교와 대주교 위에 있는 추기경을 뜻했다.
왕국에 추기경이 오십 명이 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과 마주하는 것은 꽤 귀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여성은 무리들을 데리고서 우리 앞을 막아서더니 조막만 한 입술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잠깐 말 좀 할 수 있을까요?”
“추기경이 제게 무슨 볼일이.”
여성 옆에 있던 남자가 발끈해 소리쳤다.
“예를 지키지 못할까! 감히 추기경 예하께!”
남자의 행동과 말투를 보아하니 등반자 신분은 아닌 듯했다.
왕국의 백성.
반면 남자의 반응에 여성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우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즉 여성은 나랑 같은 등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