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56화
156화 40층 (2)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서 물건들을 전시해 놓거나 글씨를 새기면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는 매직보드에 판매하는 물건의 리스트를 적어 놓았다.
이외에도 급처 매물을 사고판다는 문구가 여기저기 즐비했다.
나는 그런 문구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저들에게 물건을 보여 주면 아무리 좋게 쳐줘 봐야 정가의 절반 수준이었다.
정말로 급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서야 저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물건을 사는 것도 정가보다 싸다고 하기에는 품질이 좋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별로 추천하지 않았다.
“와아…….”
고개를 돌리자 오진하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침만 안 흘렀다 뿐이지 표정만 보면 호구를 잡히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여성이 오진하에게 철썩 달라붙었다.
“오빠! 입고 있는 갑옷이 꽤 낡아 보이는데. 물건 한번 보고 가. 잘해 줄 게.”
너무 가까이 붙자 오진하는 얼굴이 붉어져서 뒤로 물러섰다.
“커험! 저 임자 있는 몸입니다.”
영업용 미소를 짓던 여성이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래.”
여성은 그에게 흥미가 식은 듯 쌩하고 가 버렸다.
오진하도 자신이 한 말이 무안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캬하하하!”
다칼이 크게 웃어댔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임자가 있는 몸입뉘다~.”
그를 흉내 내자 오진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아~ 안 그래도 쪽팔린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어벙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까 날파리가 꼬이지. 쇼핑을 하는 건 좋지만 괜히 자기 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진 마. 그런 점을 이용해서 네 돈을 어떻게든 뜯으려는 놈들이니까.”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볼 게요.”
그로부터 얼마 안 가 고품질을 정가에 사고판다는 글귀들이 보였다.
나는 오진하에게 말했다.
“그럼 이쯤에서 각자 일을 보자고. 볼일이 끝나면 계단이 있는 곳으로 와.”
손가락으로 계단 쪽을 가리켰다.
오진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정확히 몇 시간 뒤에 모일까요?”
“쇼핑도 하고 밥도 먹고 하는데 한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예. 그럼 두 시간 뒤에 뵈는 걸로 하겠습니다.”
“정신 팔려서 너무 늦게 오진 말고.”
“네!”
오진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자기,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있어?”
그가 아내와 소통하며 걷는 모습을 힐끔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상인들을 둘러보았다.
‘저기 있군.’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돗자리를 핀 노인에게 다가갔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주름살과 희끗한 머리는 왠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졌다.
노인은 나를 올려다보더니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물건을 사러 오셨나?”
“아뇨. 팔러 왔습니다.”
나는 처분할 물건들을 아공간에서 전부 꺼냈다.
“어쩌나. 내 수중에 있는 포인트로는 이렇게 많이는 사지 못하는데.”
“보고 마음에 드는 것만 사 주시면 됩니다.”
노인이 물건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을 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노인이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오오…….”
몇 번이고 감탄을 흘리더니 말을 잇는다.
“전부 다 사겠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는 다 사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랬는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
‘노인네, 능청 떨기는.’
굳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노인을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안드레이.
중층부에서 두 번째로 포인트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회귀 전에는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유명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매우 드물었다.
‘다른 놈을 찾아가 봐야 제 값을 받기는 어렵고 등쳐 먹으려고만 하겠지.’
나는 툭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얼마를 주실 수 있습니까?”
안드레이가 손을 쫙 펼쳤다.
“오백만 포인트.”
겉으론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얻고자 하는 금액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가로 사고판다고 외치지만 사실은 급처보다 금액을 높게 쳐주는 것일 뿐.
어지간해서 10, 20퍼센트는 싸게 부르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일절 그런 것이 없었다.
내가 안드레이를 찾아온 이유 중에 하나가 재력을 지닌 것도 한몫했지만 가격을 잘 쳐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보는 안목이 까다로워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아니면 칼같이 외면하기로 유명하지만 그의 마음에만 든다면 그만큼 좋은 거래도 없었다.
‘근데 뭔가 이상해. 그한테는 이득도 손해도 없는 거래다. 나야 제 값을 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안드레이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뚫어지게 봤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팔겠습니다.”
“더 달라고는 안하는군.”
“그래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지.”
안드레이는 곧장 큐브를 건넸다.
큐브에는 정확하게 오백만 포인트가 들어 있었다.
안드레이는 사들인 물건을 하나씩 회수하며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이내 자리서 일어서더니 악수를 청해 온다.
“안드레이라고 하네.”
선뜻 자기소개를 해 왔다.
나야 돈 많은 상인과 안면을 터놓으면 나쁠 것이 없기에 악수를 받아 주었다.
“이준석입니다.”
“흘흘. 역시 소문의 그이가 맞구만.”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절 압니까?”
“왜 모르겠나. 저층부에서 가장 핫한 등반자인데. 자네가 39층에서 마법으로 운석을 떨궜던 일화는 중층부에서도 유명하지.”
“아.”
처음으로 메테오를 사용했을 때의 일을 말하는 듯하다.
“아무튼. 또 팔 물건이 생기면 나를 찾아오게. 오늘처럼 정가로 주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놈들보다는 높게 쳐주지.”
그가 정가로 물건을 산 이유는 독점 거래 때문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괜히 오래 살아남은 게 아니란 말이지.’
탑에서 지낸 기간으로만 치면 회귀한 나보다 안드레이가 길었다.
“왜 속내를 드러내 불편한가?”
“탑에서 이런 걸로 불편함을 느끼면 진작 스트레스 받아 죽었을 겁니다.”
안드레이가 껄껄 웃었다.
“재밌는 친구군.”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 한 말은 진심이네. 다시 찾아오면 그쪽한테 최대한 가격을 맞춰 주도록 하지.”
“그렇게 장사하면 남는 게 없을 텐데요.”
“꼭 이득을 취하려고 거래를 하는 것만은 아니네.”
“……!”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안드레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수집하려는 거다.’
나는 자꾸만 그가 되팔 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장사를 위해서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포인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
생존.
그것이 진정 그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다.
정답을 알아낸 나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무슨 말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러한가?”
“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네.”
안드레이와 헤어진 후 포인트가 얼마나 모였는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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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12,004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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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만 봐도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때 어깨에 올라타 있던 다칼이 볼을 꼬집었다.
“뭐야!?”
“캬하응!”
-헤벌레 웃고 있지 말고 저길 봐라!
다칼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음식을 파는 간이매점이 존재했다.
-물건도 팔았으니 이제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 너무 빈약하게 먹었던 걸 생각하면.
“크흑!”
-눈물이 사무치는군.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다칼을 바라봤다.
“누가 보면 정말 빈약하게 먹은 줄 알겠어.”
그간 다칼이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해 보면 푸짐하다 못해 넘쳐 났다.
“캬하아악.”
다칼은 대답 대신 팔을 깨물었다.
‘어째 점점 갈수록 식탐이 강해지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가가. 먹자고. 먹어.”
“캬하아~.”
다칼은 헐레벌떡 간이매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빈자리에 먼저 착석한 다칼은 매점주인이 만들고 있는 음식을 빤히 쳐다보며 침을 흘렸다.
나는 맞은편에 앉고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뭐 먹고 싶은지 얘기해.”
“캬항! 캉!”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 보는 건 어떤가!? 풀코스로 땅기는 거지!
“풀코스로 쳐 맞아 볼래?”
-크흐음. 그럼 딱 절반 잘라서 하프코스로 가지.
말없이 주먹을 들자 다칼이 알았다며 다섯 가지 메뉴만 골라 주문했다.
나는 탑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김치볶음밥과 얼큰한 콩나물국을 시켰다.
이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주위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엿들었다.
본래 정보를 얻을 때는, 다른 어떠한 곳보다 음식점과 술집이 최고였다.
사람이라는 게 가장 편안한 기분일 때 속마음이 우러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포인트가 다 떨어져 가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
생존하기 힘들다.
음식 물가가 올라서 부담스럽다는 둥.
일상적인 주제였다.
하나 맨 끝자리에 앉은 일행의 대화는 사뭇 달랐다.
41층, 에펠 왕국의 돌아가는 정세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하아~ 숨이 탁 막힌다. 탁 막혀. 요즘 청성탑 그놈들 때문에 하루가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툭 하면 사람들을 건드리고 죽이고 약탈하고. 아주 지네들 세상이야. 시발.”
“이게 다 청성탑 주인이 바뀌어서 그런 거지. 아란 대신에 내려온 김동혁이라는 놈이 미친놈처럼 활개를 치니까, 그 아랫것들도 고삐가 풀린 거 아니겠어. 하~ 아니다. 얘기 나온 김에 지금이라도 싹 다 쓸어버려?”
“아서라. 그러다 죽는다. 걔네들이 그렇게 날뛸 수 있는 것도 전부 인듀어 길드 소속이기 때문이잖아. 괜히 건드려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41층에 있는 놈들을 전부 쓸어버린다고 해도 결국 위층에 있는 놈들이 내려와서 복수하겠지. 그리되면 너도 나도 그냥 끽이야 끽.”
“시발…… 김동혁 그놈만 처리해도 상황이 좀 나아질 텐데.”
둘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건 김동혁이 아란의 후임으로 왔다는 것이다.
‘김동혁…….’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이미 그 인간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 난이도가 통합되는 층에서 만나 혈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또한 나사가 빠져 있는 듯한 기상천외한 행동을 자주 보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예측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 스킬은 상대하는데 있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결국엔 내 손에 죽었지만.’
다만 그를 만나 죽이는 건 원래 한참 후의 일이다.
‘미래가 변했다.’
예정에 없던 아란의 죽음이 그를 41층까지 내려오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나의 행보로 인해 미래가 바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뀐 미래에 김동혁은 또다시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