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52화
152화 도약 (1)
“푸후~.”
배가 부르자 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골드 블러드를 집어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드디어 마지막이네.”
꿀꺽꿀꺽!
“끄윽~.”
병에 있던 골드 블러드를 싹 들이켜곤 빈 병들이 가득한 탁자에 그것을 올려놓는다.
“캬하푸. 캬하푸.”
고개를 돌리자 눕는 의자에 몸을 맡긴 채로 잠에 취해 있는 다칼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팔자 피셨구만.”
회귀한 직후 이렇게 평화로운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들 정도로 최근에는 인듀어 길드원들은 고사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조차 없었다.
‘22층에 머문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네.’
그 덕분에 천여 개나 있던 골드 블러드는 전부 배 속으로 넣을 수 있었다.
힘, 민첩, 체력이 무려 1천씩 상승해 이제 22층에서는 단순 무력으로 날 이길 자는 없었다.
아마 당장에 40층에 올라가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골드 블러드로 얻은 능력치가 예상치보다 작다는 것이다.
한 오백 여 개쯤 먹고 나서부터는 각 능력치가 하나씩만 올라갔다.
많은 양의 골드 블러드를 섭취해서 효율이 줄어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또 제 모습을 하고 계시네요.”
고개를 돌리자 에이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요.”
나는 곧장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도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게 아니라고.”
“물론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걱정 마. 이제 이 꼴을 볼 일도 없을 테니.”
“네? 갑자기 떠날 사람처럼 말하시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떠나야지. 너무 오래 머물렀어.”
골드 블러드를 전부 섭취하겠다는 목표는 이뤘지만 아란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진 상태였다.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르지.’
아무리 자신의 힘을 과신한다고 해도 보낸 놈들이 계속해서 당하는 소식을 듣는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놈이 오길 기다릴 순 없어.’
플랜B를 실행해야 할 때이다.
“떠난다니. 뭔가 아쉽네요.”
에이사는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살짝 정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첫 만남은 그다지 좋다고 볼 수 없지만, 한 달간 자주 마주치며 정이 든 것이다.
어쩌면 에이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도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준석 씨 덕분에 야마토와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어요. 그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쪽 모습을 빌려 쓴 대가라고 생각해.”
현재 에이사는 야마토와 함께 프로란 마을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에이사가 네크로맨서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배척하려고 들었다.
그 과정에 거주민들은 힘을 사용해 쫓아내려고 했고 나는 이를 도와줬다.
하나 완전히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에이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웃고 친근하게 다가가며 거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인간과 네크로맨서는 오랜 기간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그 간극이 좀처럼 쉽게 메워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등반자가 거주민들을 해치려고 할 때 에이사가 직접 나서서 제압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거주민들은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젠 마을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 수는 없는 법이지.’
그녀의 입장에서도 현 상황만 유지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근데 단순히 그 말을 전하려고 온 건가?”
“어. 예? 아뇨. 따로 전할 말이 있었는데. 뭐지…… 갑자기 안 떠오르네.”
에이사는 자기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생각났다! 오진하 씨가 해 줄 게 있다며 작업실로 좀 와 달라고 했어요.”
“작업실로?”
“네.”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다칼. 일어나!”
“쿠하앆?”
눈을 번쩍 뜬 다칼이 침을 슥 닦으며 기지개를 켰다.
“카아암~.”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다칼이 뒤따랐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꼭 일이 생겨야 깨워? 그보다 슬슬 위로 올라가야지. 이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
-드디어 올라갈 생각이군. 그런데 아란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여태 그자가 내려오길 기다린 거 아니었나?
“좀처럼 미끼에 걸려들지를 않네. 그렇다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지.”
-우리가 올라가게 되면 그 녀석이 이곳에 내려왔을 때 실시간으로 알 수가 없을 거다. 혹시 그자가 우리를 찾아오길 바라는 건가?
“그러면 나야 좋고. 설사 골드 블러드에만 관심이 있어서 나를 배제하고 이곳을 찾아온다고 해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나는 아공간에서 천리안 와드를 꺼냈다.
“크르릉.”
-그것은 천 리 밖에 있는 놈은 추적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 한데 굳이 아란을 추적할 필요는 없지.”
-알겠다. 다른 자를 통해 상황을 들여다볼 생각인 거군.
“그래.”
22층에 머무는 자를 추적하게 되면 내가 위층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이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 추적할 대상으로 쉽사리 죽지 않는 놈을 택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대상으로는 에이사가 적합했다.
물론 에이사보다 강력한 등반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층을 오르고 내려갈 수 있다는 변수가 존재했다.
‘변수는 최대한 없애야지.’
[천리안 와드가 활성화합니다.]
[마나 각인자는 추적할 대상을 떠올려 주십시오.]
에이사.
[대상이 확정되었습니다.]
[추적을 시작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시야를 공유할 필요가 없으니 연결을 끊어 두었다.
어느덧 그의 작업실에 이르렀다.
똑똑.
문을 두들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진하는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듣지 못했나 보다.
‘근데 뭘 하는 거지?’
대체 무얼 하나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내 갑옷이군.’
전에 맡겼던 갑옷에 문제가 생겨 다시 맡겨 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두 팔에는 수많은 문자가 적힌 도넛 모양의 마법진이 감싸고 있었다.
‘저건. 인챈트할 때 발생하는 현상인데.’
그에게 인챈트를 바라는 것은 맞지만 현재 그의 실력으로는 내가 입는 갑옷에 인챈트가 불가능했다.
그만큼 갑옷의 성능이 뛰어났다.
이내 두 팔에 휘감겨 있던 수많은 문자들이 갑옷으로 이전되고 있었다.
10분이 흘렀을까.
“후우~.”
작업을 끝낸 오진하가 지친 표정으로 목을 뒤로 넘겼다.
나와 두 눈을 마주쳤다.
“으아! 깜짝아!”
진심으로 놀랬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왔으면 말이라도 해 주면 좀 좋습니까.”
“노크했는데. 못 들은 건 그쪽이지.”
한 달 사이에 우리 둘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진하는 결국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내게 받은 포인트와 자신이 모아 둔 포인트를 이용해서 에고하트를 구매하는데 성공했다.
“다음부터는 노크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뭐? 다음엔 자기가 말해 주겠다고? 그럼 나야 좋지만…… 그럼 자기가 피곤하지 않을까?”
덕분에 지금은 아이템의 에고화가 된 아내와 저렇게 대화가 가능했다.
“우리 자긴. 어떻게 하는 말마다 이리 고울까. 쪽!”
나는 에고하트에 뽀뽀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꼴만 안 보면 딱 좋을 텐데.’
염장 지르는 걸 넘어서 과한 애정 행각은 도저히 봐 주기가 어려웠다.
“크흠! 사람 있는 것 좀 신경 쓰지?”
“아……! 준석 씨가 있다는 걸 깜박했네.”
“내게 따로 전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뭐지?”
“아, 그건. 말보다는 이걸 전해 주려고 불렀습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인챈트 작업을 하던 갑옷을 건넸다.
“원래는 이 갑옷에는 인챈트가 불가능했는데. 에고하트를 얻은 이후로 능력이 각성해 가능하게 됐습니다. 물론 당장은 그거 하나가 끝이지만. 추후 능력이 강화되면 가지고 있는 것들도 전부 해 드리겠습니다.”
“흠.”
아무래도 에고하트에 인챈트를 강화해 주는 보조 능력이 있는 듯했다.
‘얼마나 변화했는지 어디 볼까.’
정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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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뮨의 흑철 갑옷
효과: 마나 회복률 증가, 일부 마법 면역, 일부 물리 공격 흡수, 자체 마나로 내구도 회복.
추가 효과: 어둠 흡수로 인한 내구성 강화, 강력한 어둠 흡수력.
인챈트 효과: 기존 효과의 마나 회복률이 두 배로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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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마나 회복률이 두 배로 상승하다니.
안 그래도 점점 커져 가는 마나량 때문에 회복률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필요한 효과를 얻게 되었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갑옷을 착용해 보았다.
갑옷에 흑철재를 덧입혀 검정색에 광택이 비추었다.
착용감도 조금 더 좋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테스트를 해 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등가교환.
일부러 마나를 녹여 마나 그릇에 빈 공백을 만들고 자연적으로 차오르는 마나를 가늠했다.
잠시 후, 몰라보게 달라진 마나 회복력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진하는 제작자로서 흡족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경 써 주다니. 고맙다.”
“뭘요. 준석 씨가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내를 보게 해 주셨으니까요.”
곁에서 아내에게 꾸준히 애정을 드러내는 걸 보면 둘은 아마 천생연분이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챙길 물건이 많나?”
“예? 챙길 물건이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봅니까? 혹시 이제 층을 올라가려는 겁니까?”
“그래야지. 여기서 시간을 많이 보냈어.”
“그 아란인가 뭔가 하는 인간을 잡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그게 계획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바꿔야지. 그러니 떠날 채비를 해. 오늘 중에 떠날 생각이야.”
“음. 뭐…… 그렇게 결정하셨다니. 저는 따라야죠. 제 고용주신데.”
오진하는 작업실에 있는 도구들을 몇 개 챙기곤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다 안 챙겨?”
“지금 챙긴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준비 다 됐으니 가시죠!”
“어, 어.”
이렇게 준비를 빨리 끝낼 줄은 몰랐기에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금방 차분함을 되찾았다.
나야 나쁠 게 없었다.
이내 작업실을 나와 길거리를 배회한다.
“인사하고 갈 사람이 있으면 해도 돼.”
오진하는 이곳에서 나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에 정이 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가시죠. 괜히 인사해 봐야 아쉬움만 남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걷는데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프로란 마을을 떠나 골짜기 위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22층에서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과 통로는 다름 아닌 언덕 끝 절벽에 있었다.
통로 앞에 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쿠두두두두-
잠깐이나마 포호스들이 자유롭게 달리는 모습을 감상했다.
이윽고 다시 앞을 내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가자.”
“예.”
“캬르응.”
나와 다칼, 그리고 오진하. 다들 각자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