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43화
143화 층의 시계 (3)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앞에 있던 헬플라워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곁에 있던 다칼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히 걸려들었군.’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상상이 만들어 낸 환상의 산물이자 세상이었다.
퍼석!
한쪽 발이 쑥 꺼지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바라봤다.
땅이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아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환각에 불과하다면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든 환각을 떨쳐 내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하나 헬플라워가 만들어 낸 환각은 조금 특별했다.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갑자기 적이 나타나 공격을 한다고 해도 육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대신 타격을 입은 만큼 환각에 걸려든 대상자의 마나를 흡수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특수성 때문에 환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위협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쿵! 쿠구궁!
더는 땅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날개를 움직여 공중에 부유했다.
콰가가가!
아슬아슬한 차로 땅이 꺼져 버렸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도저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뿐이다.
일단 1차 위협은 가뿐히 넘겼으나, 2차 위협으로 어떤 것이 등장할지 몰랐다.
‘이 틈에 서둘러야 돼.’
위협에 대비해 보호막을 두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등가교환 마법을 시전했다.
환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헬플라워가 만든 환각의 경우는 머릿속에 침투한 환각 세포를 제거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아니면 헬플라워가 뿜어 내는 가루를 사전에 차단하거나 침투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큭!”
번개가 내려친 것처럼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환각 세포들의 저항이 컸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무엇보다 각 세포들의 강함이 천차만별이었다.
이는 세포를 침투시킨 놈이 한 놈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소리였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
…….
세포와 싸움이 길어지며 마나가 빠르게 소모되어 갔다.
하나 동시에 정신력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으나 일이 순조롭게만 돌아가지 않았다.
“쿠하아아아!”
어디선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발록은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젠장.”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주길 바랬건만.
“네놈의 뼈와 살을 발라 주마!”
한껏 분노해 있는 발록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하나 그 정체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한숨을 덜었다.
처음엔 진짜가 나타난 줄 알았지만 아무리 봐도 발록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런데 환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위협은 매우 제한적일 텐데.
‘어떻게 소환해 낸 거지?’
가짜라고는 하나. 민첩한 움직임을 보았을 때 진짜 발록의 힘에 티끌은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티끌은 나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잠깐 잊고 있었어.’
내가 있는 층의 난이도가 이지가 아닌 하드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예상 수준을 뛰어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보다, 우선은 피해야겠군.’
환각 세포를 제거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서 발록의 공격을 피하려는 순간.
쾅! 쩌저적!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크허억!? 안, 안 돼에에!”
균열 사이를 지나가던 발록이 그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이후, 균열의 틈이 크게 벌어졌다.
“아우우우우-!”
다칼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준석! 일어나라! 당장!
“다칼!”
몸집이 커진 다칼이 헬플라워들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보였다.
‘환각이 불안정해졌다.’
환각의 세포를 제거한 영향도 있지만 환각에 걸려들지 않은 다칼이 헬플라워들과 전투를 치르며 영향을 끼친 것이다.
환각의 세포는 헬플라워가 조종하는 세포이기 때문에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세포 또한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때다!’
나는 재빨리 불안정해진 세포들을 제거해 나갔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
…….
‘이것으로 마지막!’
세포를 전부 제거하자마자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밑으로 꺼졌던 땅은 원상복구가 되고, 일그러졌던 공간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공중에 떠 있던 몸이 어느덧 땅으로 돌아와 있었다.
“캬하아아악!”
다칼이 상당한 피를 흘린 상태였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팡이를 다칼에게 겨누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등가교환.
긁히고 파인 상처들이 치유되고 있었다.
이내 힐끔 뒤를 돌아본 다칼이 입을 뗐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군!
말을 하면서도 피를 토한다.
“이제 그만 물러나!”
죽지 않는 신수라고 할지라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것도 고통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커허억. 커허억…….”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다칼은 내 말을 듣자마자 즉각 물러섰다.
보통 전투에 취하면 감정에 휩쓸리기 마련인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짬밥은 괜히 있는 게 아닌지, 들이박아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후우~.”
지옥의 정원을 벗어나고서 층의 시계를 확인했다.
째각. 째각. 째각.
앞으로 1분 후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푸후우~.”
-본래 가진 힘만 있었어도 저 녀석들은 아침 식사 거리도 안 됐을 거다!
다칼은 헬플라워들에게 당한 것이 분한지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너무 다급하게 안 굴어도 돼. 이미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으니까. 지금은 그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이곳에 올라왔을 때 발록이든 헬플라워든 전부 쓸어버리면 된다.
이곳에서 잠깐 보낸 1시간은 그걸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었다.
“크릉.”
-다급할수록 돌아가라 이 말인가.
“뭐. 비슷한 말이지.
-맞는 말이긴 하다만. 인내한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칼이 말한 대로 인내는 언제나 힘들게 다가왔다.
회귀 전에 올랐던 탑을 다시 오르는 과정 또한 인내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꿋꿋이 인내를 해야 언젠가 행복의 과실도 맺는 법이다.
어느덧 몸집이 작아진 다칼이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음…… 약 10초쯤?”
대충 얘기한 것인데.
척!
때마침 초침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시계를 중심으로 균열이 생겨났다.
파사삭…….
쓰임을 다한 시계는 완전히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나는 바람에 가루를 흘려보내며, 균열이 끌어당기는 힘에 몸을 맡겼다.
“캬항!”
다칼도 그 뒤를 따랐다.
* * *
“결국 돌고 돌아 여기구나.”
다른 마을에 정보 조사차 갔다가 다시 우버 마을로 돌아온 강예지는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음식점 안은 여느 곳과 다르지 않게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착석해 카웰 호수에서만 나온다는 특산품 람다랑어를 주문했다.
곧 식탁 앞에 놓인 람다랑어를 칼로 썰어 먹었다.
“흐음.”
신선한 맛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람다랑어를 먹으면 일시적으로 체력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유지 시간은 겨우 6시간 정도로 그다지 길지는 않았으나, 있어도 부족한 것이 체력인지라 효과를 안 받는 것보단 나았다.
‘배도 채웠고. 슬슬 다시 움직여 볼까.’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계산을 마치고 밖을 나왔다.
햇볕이 쨍쨍했다.
‘이대로 선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그러나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강예지는 한 시간마다 업데이트가 되는 현상금 순위 명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1위) 이준석
[13,775,000포인트]
2위) 강예지
[770,000포인트]
3위) 오카무라 에도
[380,000포인트]
4위) 네이슨 피터
[190,000포인트]
5위) 안철호
[150,000포인트]
…….
…….
…….
(((((((((((((((((((((((((((((((((((((((()
명단이 공개된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이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한 이준석이었다.
“하.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아.”
남들이 수십만 단위일 때 혼자서 천만 단위를 넘어섰다.
사람 한 명단 1만 포인트가 지급되는 것을 고려하면 못해도 천여 명은 넘게 죽여야 천만 단위를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참가자가 500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네크로맨서를 죽이는 것.
녀석들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카웰 호수 건너에 있는 숲을 들어가면 리이르 골짜기가 나온다고 했다.
또한 그곳은 너무나 위험해서 보통 사람은 접근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녀도 그곳에 가는 건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가 봐야 과연 살아남은 놈이 있을까?
네크로맨서를 죽이면 사람과 똑같이 1만 포인트를 준다고 쳤을 때, 준석은 이미 천여 명이 넘는 네크로맨서를 죽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씨가 말랐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지 않는가.
점을 보지 않아도 추측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이번에는 어떻게든 1위를 차지하고 싶었건만, 항상 준석. 그놈이 문제였다.
‘이제 내가 1위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야.’
1위를 죽여서 자신이 1위로 올라가는 것.
하지만 앞서서 이미 준석에게 매운 맛을 본 그녀이기에 그러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래 순위에 있는 놈들을 차례대로 잡아들여 2위의 자리라도 지킬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 3위 이름이 오카무라 에도. 일본인이네.”
상대도 자신과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을 터이니, 여전히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 흠이었다.
괜히 찾으러 다니며 고생하는 것보다는 그냥 점을 보자.
강예지는 곧바로 스킬을 발동해 에도의 위치를 파악했다.
“내가 갈 때까지 거기에 가만히 있으렴.”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발걸음을 재촉한다.
불과 몇 분 후. 목적지에 당도했다.
‘옳지. 말도 잘 듣네.’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문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약 오십여 명쯤 되어 보인다.
‘같은 편이라도 먹은 건가?’
서로 눈빛으로 경계를 하는 걸 보니 그런 건 아니다.
특이한 점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전부 한곳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어딜 쳐다보는 거야?’
시선을 따라가 보니 흰 도복을 입은 서양의 남자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제이슨 피터.’
현재 4순위를 지키고 있는 사내이다.
피터의 얼굴은 초반에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3위와 4위가 한 자리에 있다니. 멀리 갈 필요도 없겠어.’
피터 옆으로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성였다.
‘순위권에 있는 놈인가?’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게 강해 보인다.
‘일단은 3,4위부터 신경 쓰자.’
언제 기습을 할지 기회를 노렸다.
그러며 그들이 왜 한곳에 모여 있는지 피터가 하는 연설 때문에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오호라…….”
강예지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저들의 목적은 다름 아닌 이준석이었다.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를 사냥해 단숨에 역전을 꾀해 보겠다는 속셈이다.
그리고 이미 그에게 매운 맛을 봤던 강예지의 마음속에도 어쩌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라는 자그마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