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41화
141화 층의 시계 (1)
쿠르릉!
고개를 젖히자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요란법석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온다.
시야를 조금 아래로 내리니, 뾰족한 뿔 형태의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고고한 성이 윤곽을 드러냈다.
성에는 온갖 악마들이 살고 있어 탁기가 가득하고 정신을 깎아내리는 타락의 근원이 존재해 입성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함을 유지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탁기 때문에 공기가 무거워서 숨을 쉬기도 쉽지 않았다.
“크르르.”
-정말로 와 버렸군.
동행자인 다칼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성 내부를 바라봤다.
이내 머리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방에서 강한 기운들이 느껴진다. 말도 안 되는 괴물 놈들도 있고. 정말로 저 성으로 들어갈 텐가?
“내가 뭐라 대답할지 알면서 뭘 물어. 얻고자 하는 게 있으면 그만큼 위험도 감수해야지. 그리고 이미 와 놓고 결정을 번복하는 것도 웃기잖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지금 그대의 실력으로 저기서 살아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들어간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악마의 성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 악마의 성 내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난이도가 달라 성에 존재하는 적들 중에 어떤 변수가 존재할지 모르고 건축의 구조적인 면에서 다른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태 난이도에 따른 변화를 생각했을 때 기본적인 틀이 변하는 경우는 없었다.
상당수는 비슷함을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더 위험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캬항.”
-그 대책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에 성 입구부터가 문제다. 입구에 악마 두 놈이 떡하니 지키고 서 있는데 어떻게 출입할 생각이지? 설마 정면 돌파할 생각은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지. 방법이 있으니 내게 맡겨.”
약 백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악마 두 놈을 쳐다봤다.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하겠지.’
악마들은 마나를 감지해 내는 능력이 타고났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고도 걸리지 않으려면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나는 개중에 한 명에게 힘의 천칭저울을 사용했다.
입구를 지키는 놈들은 악마의 성에서도 최약체에 포함된다.
그런 최약체와 나 사이에 전력차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성 안에 있는 적들과의 격차 또한 알 수 있었다.
저울은 아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저층부와 중층부에서만의 일이다.
상층부에서는 입구를 지키는 개 하나도 버겁다.
‘좋게 생각하면 최약체를 잡을 수 있을 정도는 된 건가.’
다칼과 힘을 합치면 저 두 놈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 녀석들이 다른 놈을 불러낸다면 사태는 심각해지기 때문에 애초에 힘을 쓴다는 것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탑의 도움을 바랄 수 없어.’
저층부에서는 강력한 적과 마주칠 때마다 탑이 적을 해당 층에 맞는 수준으로 힘을 하향해 주었지만, 여기서는 탑이 개입할 일이 절대로 없었다.
오히려 내가 탑의 규율을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층의 시계의 사용을 허락한 것 또한 탑이지만 말이다.
째각. 째각. 째각.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늦기 전에 슬슬 움직이자.’
형태 변화.
“야옹.”
나는 고양이로 변신해 다칼을 바라봤다.
“다칼, 나한테 붙어.”
“크릉?”
-그게 무슨 소리지?
“어둠으로 변한 다음에 내 몸에 붙으라고. 마치 고양이 털의 무늬가 된 것처럼.”
“캬하!?”
다칼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어둠으로 변하는 건 그저 이동할 때 쓰는 기술일 뿐이다.
“그건 네가 정한 법칙일 뿐이고. 이동기라고만 한정해 두지 말고 다르게도 사용해 봐. 분명히 될 테니까.”
다칼은 태초의 어둠으로 태어난 생명체.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크르릉…….”
-그대가 말한 대로 일단은 해 보겠다.
스르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칼은 어둠으로 변신해 내 몸에 붙으려고 시도했다.
“씁. 이게 아닌데.”
달라붙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주변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해 봐. 내 몸에 찰싹 붙는 거야. 감싸지 말고.”
“캬하앙.”
-어렵군.
그리 말하면서도 다시 시도해 본다.
“오?”
처음과는 다르게 끈적한 젤리가 달라붙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다칼은 확신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지금은 어떤가?
나는 고개를 돌려 전신을 체크했다.
“오오. 완벽해.”
회색털에 검은 무늬가 생겨났다.
“다칼, 이왕 하는 김에 이마에 뿔도 만들어 줘 봐.”
슈욱!
그렇게 크지는 않은 자그만 뿔이 솟아났다.
-이 정도가 한계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그런데 왜 뿔을 만들어 달라는 거지?
“그야 앞으로 우린 프로켈을 연기할 거니까.”
-프로켈!? 과연 그 방법이 통하겠나?
“걱정 마.”
나는 타엘의 날개를 펼쳤다.
펄럭!
덩치에 맞게 크기가 조정된 날개가 위용을 뽐낸다.
프로켈은 천사였으나 악마로 변질한 케이스이다. 거기다 형태 변화에 다재다능하고 고양이로 변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겉모습은 최대한 비슷하게 꾸몄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저들이 속아 넘어가길 바라는 것이다.
꿀꺽.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두 악마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되돌리지도 피해갈 수도 없었다.
어느덧 근처에 다다랐다.
문을 지나치려고 하는 순간.
치잉!
검이 교차하며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라!”
설마 프로켈을 모르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프로켈은 상급 악마이기 때문에 아랫놈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타락한 천사는 드문 케이스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건방진 녀석들이군.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앞을 막아서는가!”
보통 이렇게 나오면 자기네들이 뭘 잘못 건드렸나 싶어 쪼그라들거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82층의 악마들은 달랐다.
전혀 움츠러드는 기세가 없었다.
오히려 의심의 씨앗을 키운 것 같다.
“입구를 지키는 것은 우리들의 임무. 그대에게 짙은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하나, 그렇다고 해서 신분도 정확하지 않는 자를 들여보낼 순 없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형할 터이니.”
자칫 잘못 반응하면 곧바로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외형만 보고 그냥 통과시켜 주길 바랬건만.
‘이렇게 나온다면 하는 수 없지.’
프로켈의 인형에는 프로켈의 힘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밖으로 드러내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나 갈무리가 잘된 물건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하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마나 소모가 크긴 하겠지만.’
등가교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프로켈의 힘을 강제로 외부로 끌어냈다.
소지하고 있던 인형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한 기운이 나를 통해 방출되고 있었다.
두 악마의 표정이 금방 얼어붙더니 이내 허리까지 고개를 숙였다.
“프로켈 님!”
“프로켈 님을 뵙습니다!”
왼쪽에 있는 악마가 먼저 고개를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부, 부디 제가 한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진작에 힘을 드러내셨음 그런 무례는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어허! 건방진! 지금 내 탓을 하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그는 넙죽 앞으로 엎드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프로켈 님께서 성을 찾아오시지 않아 사칭하는 자로 의심했습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내 심장은 쪼그라드는 줄 알았지만 말이다.
“내 이번만은 용서하지.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무례를 저지른다면 두 놈 다 목을 앗아 갈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 후, 나는 무사히 문을 통과했다.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메시지가 떴다.
[악마의 성이 입장하였습니다.]
[믿지 못할 업적을 세웁니다.]
[등반자의 이명의 격이 오릅니다!]
[같은 등반자들 중 일부는 당신의 이명의 격을 보고 작은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자가 딛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디뎠습니다.]
[수많은 신좌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저 입장한 것만으로 이명의 격이 오른 것도 모자라 수많은 신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들에게 온 무수한 메시지들이 시야를 가렸다.
애초에 상층부는 수많은 신좌들이 눈독 들이는 곳이고,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자라는 특수한 상황이 그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자격이라 하면 82층에 허락되지 않은 존재를 얘기하는 것이겠지.’
나는 신좌들이 보낸 메시지를 무시하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벌써부터 힘드네. 힘들어.”
다칼이 물었다.
-걸리면 어쩌려고 했는가?
“당연히 B플랜을 진행했겠지.”
-B플랜? 그게 뭐지?
“도망다니면서 원하는 걸 취하는 거지.”
-아.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걸 계획으로 포장한 것이군.
“조용히 해. 무사히 통과했으면 된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하다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 않은가?
“그렇지.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목적지에 닿으려면 앞으로도 통과해야 할 관문들이 몇 개나 더 남아 있었다.
우선은 악마들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입구를 지키는 악마들처럼 속여넘길 수도 있지만, 강한 힘을 지닌 악마일수록 내 정체를 알아챌 가능성이 높았다.
‘악마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루트는 알고 있어.’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가며 천천히 이동했다.
한데 이동하면서, 시야로 신좌들이 보낸 메시지 말고도 다른 메시지가 계속 뜨고 있었다.
[마나가 올랐습니다!]
[민첩이 올랐습니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마나가 올랐습니다!]
…….
…….
‘이건 예상하지 못한 건데.’
재앙을 끌어안은 자의 수혜였다.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있으니 그만큼 능력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성장을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도 잠시.
쿵! 쿵!
땅에 진동이 울렸다.
거기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곧 모습을 드러낸다.
두 개의 거대한 뿔에서 뜨거운 불꽃을 피워내며.
두 다리에 팽창한 근육과 마치 갑옷을 껴입은 것 같은 단단한 몸.
그리고 압도하는 크기를 지닌 두 날개를 활짝 핀 발록이 복도를 지나간다.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다.
‘저놈에게 걸리면 즉사다.’
대악마도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발록이었다.
그런 놈과 마주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발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이동했다.
발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번의 위기를 거쳤다.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등가교환으로 공간 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누군가가 마나를 감지하고 찾아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변수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다 왔다.’
악마의 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켈의 방 앞이었다.
다행히도 방을 지키는 놈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방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손잡이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문을 열려면 거기에 끼워 넣을 열쇠가 필요했다.
나는 형태 변화를 풀고서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들에게 얻은 비켈의 뿔을 꺼내 들었다.
탁!
비켈의 뿔을 손잡이의 거대한 구멍에 끼어넣자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딱 맞았다.
이어서 뿔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철컥! 끼이이이…….
3미터 남짓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너무도 간단히 열렸지만, 회귀 전에 아무리 힘을 써도 부수고 들어가지 못했던 방이다.
공간 이동을 하려고 해도 내부로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있어 출입할 수가 없었다.
저 안에 그 물건이 있다는 것도 성에 있는 기록의 서가 없었다면 몰랐을 일이다.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방 내부는 평범한 서재처럼 생겨 먹었다.
바닥에는 책들이 마구잡이로 엎어져 있거나 떨어져 있었다.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물건들도 같이 어질러져 있다.
하지만 원하는 물건은 금방 찾아냈다.
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점지가 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손으로 집었다.
[오큘러스 거울을 얻었습니다.]
“좋았어…….”
외형적으로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원형 거울이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앞으로 다가올 중층부에서의 거대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이제 거울만 챙겨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다.
[점지가 발동합니다.]
그런데 점지가 또 무언가를 발견해 냈다.
[각종 보물이 있는 숨겨진 장소를 찾아냅니다.]
점지가 가리킨 곳은 구석 한편에 있는 책장.
‘각종 보물이라…….’
5레벨이 된 점지 스킬은 앞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층의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시간은 30분이나 남아 있다.
‘그럼 보물을 놓칠 수는 없지.’
책장 앞으로 다가가, 어떤 장치가 없는지 확인했다.
‘보통 이럴 때 책장에 껴져 있는 책을 당기면 레버처럼 작동하던데.’
나는 책을 하나씩 일일이 빼 보았다.
철컹!
‘어? 발견.’
빼지지 않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뭐지?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한 건가.’
“으음…… 아.”
혹시나해서 입구에서 했듯이 프로켈의 힘을 끌어내 손끝에 모아 보았다.
그리고 당기자.
드르르!
꼼짝도 하지 않던 책장이 이내 저절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