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32화
132화 드디어 마주하다 (2)
하얗게 산발이 된 여자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정면으로 손을 내뻗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인다.
이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강예지가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스르륵!
순식간에 손끝에서 하얀 기운이 서린 실끈이 뻗어 나왔다.
뱀처럼 살아 움직이는 실끈은 곧장 박우철에게 날아가 먹잇감을 옭아매듯 지팡이를 들고 있는 팔을 휘감았다.
“……!?”
쫘아악!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실끈이 걸레를 쥐어짜는 것처럼 그의 팔을 압박한다.
푸하아악!
팔은 그 압박을 견디질 못하고 비틀려져 터져 버렸다.
반발로 그는 자신의 피를 뒤집어쓴 꼴이 되어 버렸다.
박우철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지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늦게 표정의 변화가 생겨나며, 짧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내게 찔렀던 상처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유지하고 있던 거짓말의 세계가 깨졌다.’
하나 방금 전에 당한 공격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거짓말의 세계가 신좌에게는 안 통한 거지.’
하얀 기운이 서려 있던 실끈은 분명히 운명의 인도자라는 이명을 가진 라크테가 가진 힘이었다.
내 팔을 가져가려다 되레 자신의 팔을 잃게 된 박우철은 굳어진 표정으로 떨어트린 지팡이를 반대편 손으로 끌어왔다.
경계심이 가득 찬 얼굴로 강예지를 노려본다.
“시발 진짜. 일이 꼬여도 더럽게 꼬이네. 계약자들 간에 싸움에 신좌가 직접 나서? 아주 좋은 연줄을 가지셨군.”
박우철은 마법을 시전하더니 파란빛이 서린 임시 팔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네년을 먼저 죽여 주마!”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예지는 두 발을 지탱하고 있던 힘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좌가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힘을 사용하기 위해 계약자를 매개체로 삼았으니 몸의 부담이 되었을 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녀는 죽겠지.’
라크테가 다시 돕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기서 더 나서려고 한다면 라크테는 돌이킬 수 없는 큰 불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탑의 제약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컸다.
다크웨스트림.
“한눈을 팔면 안 되지.”
나는 강예지에게 다가가려는 박우철의 앞을 막아섰다.
홀리크로스.
멈칫한 그를 향해 빛의 십자가를 박아 넣었다.
“크읏!?”
움직임이 느려진 것을 뒤늦게 감지한 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연달아 마법을 시전했다.
등가교환.
아주 잠깐만 멈춰 세우면 됐다.
곧 그의 몸은 일시 정지가 된 듯 멈추었다.
“대체 무슨 짓을……! 끄아아악!”
빛의 십자가가 마지노선인 보호막을 뚫고서 가슴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거짓말의 세계가 깨져 버렸으니,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 또한 진짜였다.
다시 거짓말의 세계를 쓰기 전에 끝내 버려야 했다.
“카학!”
“으아악! 떨어져!”
다칼이 뒤를 급습해 그의 목을 물었다.
이어서 다칼의 눈이 번뜩였다.
마안을 이용해 그를 석화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놈들보다 육체와 정신력이 강해 쉽지 않았다.
‘처음보단 힘이 떨어졌어도 아직 기세가 살아 있어.’
나는 유지 중이던 다크소드 네 개를 끌어와 머리와 목과 가슴을 노렸다.
우웅! 콰하아앙!
금세 빛의 장막을 펼친 박우철이 다칼을 튕겨 내며 날아들던 다크소드도 전부 튕겨 내 버렸다.
“허억. 헉…….”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없이 지팡이를 매섭게 휘둘렀다.
금방 휘두른 자리에는 얼음 조각들이 생겨난다. 가시처럼 돋아나 있는 조각 수십 개가 날아들었다.
나는 타엘의 날개를 펼쳐 위로 올라갔다.
조각들은 곧바로 나를 뒤따랐다.
추적 마법이다.
이동하길 포기하고 멈췄다.
창! 쩌저적!
보호막도 없이 맨몸으로 받아 냈다.
닿자마자 얼음조각은 살을 찌르고 들러붙는다.
그런 것이 계속 날아듦에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크하하하!”
박우철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힘이 다 떨어졌군. 버러지가 기어오르기는!”
다크볼트. 등가교환.
콰아앙!
“커억!”
다크볼트를 공간 이동시켜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다칼이 다시금 끼어들어 그를 밀어붙인다.
챙그랑!
다칼의 연이은 공격에 보호막이 깨져 나간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에 마나를 집중시켜 날개에 불어넣었다.
휘익!
다크볼트. 다크볼트. 다크볼트……
파지직! 파직!
그에게 고공낙하를 하며 마법을 꾸준히 시전한다.
[행운의 룰렛이 발동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룰렛에서 이 나왔습니다!]
[발동한 스킬 레벨에 이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마나볼트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한층 더 강력한 형태로 변화된 공격이 가능해집니다.]
[마나볼트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일정 확률로 구체가 동시에 두 개가 생겨납니다.]
[마나볼트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구체 폭발이 한 번 더 일어납니다.]
룰렛의 힘이 발동하며 한순간 34레벨이 된 마나볼트가 전반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전에 발생했던 기묘한 힘이 다시금 발동했다.
검은 구체가 십여 개쯤 생성되었을 때 추가로 형성한 구체에서 특이한 점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회전 고리가 있는 압축된 구체가 아닌, 회전 고리가 없는 압축된 구체가 스스로 빠르게 회전하며 겉으로 전기장막을 만들어 냈다.
저런 형태를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50레벨을 넘어섰을 때만 볼 수 있는 형태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번에도 힘이 곧바로 내게 도달한다는 느낌이었어.’
빌려 쓰는 힘이 아닌, 원래의 힘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박우철에게 다다른 나는 발을 뻗어 녀석의 면상을 걷어찼다.
파앙!
다칼 덕분에 무방비해진 그를 타격한 뒤 곧바로 날아가는 걸 뒤따라가며 다크볼트를 하나씩 날려 보냈다.
콰아앙! 콰앙! 쾅쾅쾅!
정말로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발동한지는 모르는 기묘한 힘으로 발생한, 50레벨이 넘어서야 볼 수 있는 구체를 날렸다.
지지징! 웅, 콰하아아앙!
여태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폭발이 일어났다.
밖의 전기장막과 안에 있는 회전하는 에너지가 서로 충돌해 배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으로 박우철이 죽었을 수도 있지만 살아 있는 경우의 수를 배제하지 않았다.
윈드퍼드.
폭발로 발생한 먼지와 연기를 바람으로 걷어 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박우철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천리안 와드로 그를 쫓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시야가 검게 가려져 그의 위치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와드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한데 이런 일이 발생한 거라면 박우철이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어떻게?’
의문을 가지는 시간은 짧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오색오의.
영혼에게 얻은 스킬을 발동했다.
내다보는 시야가 바뀐다.
일부 색깔이 무색으로 변하고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색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꽁꽁 숨어 있던 박우철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색오의는 다섯 가지 색깔에만 집중해, 보통의 시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마나소모도 적어 부담도 없었다.
화아악!
불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본래라면 투명화가 걸려 있어 볼 수 없는 공격이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팔을 뻗었다.
우웅!
장갑에 각인된 방패 문양에서 빛이 나며 불을 전부 빨아들였다.
곧장 뒤로 돌아, 빨아들인 불을 박우철을 향해 뿜어냈다.
“……!?”
그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불에 휩싸이며 모습을 감추었다.
-준석!
다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섬뜩한 느낌이 전신을 훑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챙! 푸욱!
보호막을 뚫고 어깨로 서늘한 칼날이 파고들었다.
“끄윽!”
순간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하나 다시 중심을 잡고 파고든 칼날을 직접 손으로 잡아 뺐다.
“으아아아!”
상당한 고통이 밀려옴에도 인내했다.
“헉, 허억…….”
그렇게 뽑아낸 칼날은 눈에 익는 물건이었다.
‘하이드 블레이드. 이걸 가지고 있었나.’
매우 희귀한 무기라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손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은 묻어 있는 피 마저 흡수하고 눈앞에서 투명해졌다.
오색오의가 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기만큼은 찾아내지 못했다.
무기가 가진 힘에 비해 스킬 레벨이 낮은 것이다.
그리고 하이드 블레이드의 무서운 점은 공격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나 기척에 대해서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매우 조용하고 치밀하다.
“큭큭큭.”
내가 제대로 한방을 먹자 박우철이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어 댔다.
하지만 그도 웃을 처지는 아니었다.
방금 전의 일격을 맞고 얼굴 반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크볼트를 직격으로 맞았는지 왼쪽 가슴과 허리는 아예 너덜너덜해졌다.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전투에 미친 투신이 이제 거의 다왔다며 확실한 마무리를 지으라 말합니다!]
토르가 한 말을 보곤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는 끝내고 싶지 않아서 안 끝내나.”
녀석이 생각보다 끈질겨서 문제인 것이지.
박우철은 숨을 헐떡대면서도 말을 잇기 시작했다.
“지금도 다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너만큼은 어떻게든 지옥으로 끌고 가 주마!”
그는 스스로 손목을 물어뜯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피.
이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설마 또 거짓말의 세계를?’
몸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칭호 ‘역전의 용사’가 발동합니다!]
[일부 체력과 마나가 회복됩니다!]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역전의 용사가 발동했다는 건…… 지금 상대가 나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손목에 흘러내리는 피가 사라지고 있다.’
피를 대가로 힘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대가로 힘을 얻었다는 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체력과 마나가 회복되었으니 반격을 가할 발판은 만들어진 셈이다.
‘그럼 나도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해 줘야지.’
다크웨스트림.
수웅!
그에게 가까이 근접한 나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황금색으로 물든 킹의 말이었다.
“절대영역.”
이것만은 쓰기 싫었는데.
확실히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크헛? 내 마법이……!”
박우철이 당황한 것이 보였다.
그의 강대한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절대영역 안에서는 모든 마법이 무효화가 된다.
그리고 신체 능력도 절반으로 떨어지니 적에게는 최악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칼, 시간 좀 끌어 줘. 그리고 이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
-알았다.
절대영역에서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다칼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도사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크륵, 크르륵!”
“으아아! 떨어져! 이 똥개가!”
다칼이 그를 몰아붙이는 동안 나는 등가교환을 시전했다.
거짓말의 세계도 결국에는 마법으로 시작되는 힘이다.
그러니 지금 그는 발가벗은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또 어떤 재주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끝낼 마법이어야 한다.
‘아직은 습득하지 않은 마법이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
회귀 전에는 가지고 있던 마법.
다만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발동되지가 않는다.
하나 그 조건들은 이미 전부 충족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마법을 발동함으로서 마나가 얼마나 소모될지 가늠하기만 하면 됐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것을 대가로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방법이 떠올랐다.
‘구상 자체를 다르게 가는 거야. 단발형이 아닌 지속형으로 가는 거지. 이전에도 해 본 방법이다.’
마법은 한번 시전하면 되돌리지 못한다.
다만 이런 식으로 마법의 구상을 바꾼다면 마나가 부족해졌을 때 멈출 수 있으니.
마나가 아닌 다른 대가를 치르는 걸 도중에 막을 수가 있었다.
지이이이잉!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마법은 완성됐다.
나는 손끝에 있는 붉은 심장의 형상을 꽉 쥐며 속으로 속삭였다.
‘하트 브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