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24화
124화 룩, 나이트, 비숍 (1)
고개를 돌려 나머지는 어떻게 됐는지 확인했다.
콰직!
다칼이 한 놈을 입으로 물어 아작 낸 후 옆에 붙어 있는 한 명을 더 상대한다.
강예지와 안철호는 한 놈씩 맡아서 여전히 팽팽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안철호의 추종자들은 이미 절반이 죽고 나머지는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뒤로 물러선 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칼이야 상대가 30, 40층에서 내려온 녀석들이라고 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혼자서 다섯을 전부 상대하라고 보낸 거니까.’
그래도 다칼을 상대로 꽤 버티는 걸 보면 역시나 위층의 등반자는 다르다고 느꼈다.
반면 강예지와 안철호는 상처까지 입어 가며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곧 승부의 결과가 나왔다.
강예지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입을 뗐다.
“후~ 뭐가 이렇게 힘들어! 생긴 건 기생오라비에 몸도 비리비리 말라서 금방 끝날 줄 알았더니. 이놈들, 21층 도전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는 안철호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우리와 같은 도전자가 아니라 위층에서 내려온 등반자들이다.”
“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놈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지.”
“아니. 위층에서는 왜 내려왔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다들 층을 올라가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체스방에서 둘을 다시 마주쳤을 때는 서로 냉기를 풀풀 풍기더니 지금은 아주 자연스레 대화를 섞고 있었다.
딱히 사이가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뭔가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 것은 틀림없었다.
‘감정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잠시 후, 다칼이 입가에 피를 묻힌 채 다가왔다.
“괜찮아?”
-위층에서 내려온 놈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상대하는데 오래 걸리더군.
“오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잘했어.”
커진 몸집을 작게 만든 다칼이 머리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두 앞발로 내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준석,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두 눈만 살짝 위로 치켜떴다.
“뭔데?”
-올튼 왕가의 잔재들이 무언가를 노리고 이곳에 왔다는 건 알겠다만. 방금 우리가 상대한 이놈들은 대체 뭐지? 거울을 통해 대화를 한 것을 들었다. 인듀어 길드라고. 그대 반응을 보니 심상치가 않은 세력 같던데.
“아. 너는 인듀어를 모르려나.”
하긴, 수백 년 전에는 인듀어 길드가 존재하질 않았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주로 중, 상층부에서 활동하는 놈들이야. 하드 89층에 머무는 강민욱을 필두로 만들어진 쓰레기 길드지.”
다칼의 두 동공이 크게 확장했다.
-하드 89층이라면 엄청난 실력자겠군.
“그래.”
회귀 전에 나는 이지였기에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난이도가 통합되는 층에서 인듀어 길드원 녀석들과 마찰은 종종 있었다.
그때는 다칼도 없었고 완전히 혼자서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나, 항상 누군가를 압도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나는 오만했다.
그리고 그 오만을 깨트려 준 것이 인듀어 길드였다.
‘혼자서는 다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지.’
중, 상층부에 존재하는 인듀어 길드원들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길드원들 간에 연계가 뛰어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너지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런 놈들이 무려 수천 여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시작될 싸움이었어.’
선전포고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다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듀어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텐데, 감당이 가능하겠나?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상층부에 있는 등반자는 힘들 수 있다.
“그렇겠지. 근데 녀석이 직접 내려올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장담하지?
“밑에 녀석들이 죽어 나간다고 신경 쓸 놈이 아니거든. 오히려 약한 녀석들을 대신 죽여 줬다고 고마워할 놈이지.”
그를 직접 상대한 적은 없었으나, 인듀어 길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속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칼은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대비해 두어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나도 아예 배제한 건 아니야. 그것보다 슬슬 다른 방으로 넘어가자고.”
시련이 끝나며, 삼면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나는 만년필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방을 넘어서기 직전, 한동안 안 보였던 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전투에 미친 투신이 본체 박우철과의 싸움을 기대합니다!]
[전투에 미친 투신이 어서 그를 찾으라 말합니다!]
토르였다.
‘박우철과의 싸움을 기대한다고? 아~ 그놈의 계약자가 로키였지.’
장난의 신으로 알려진 신좌 로키는 토르와 형제 사이였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좋질 않아 종종 계약자를 통해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나는 토르에게 들으라는 듯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닦달하지 말라고. 그리 말 안 해도 찾아갈 거니까.”
그러며 멈췄던 발걸음을 뗐다.
쿵!
뒤에 있던 문이 닫히고, 눈앞의 새로운 공간을 쳐다봤다.
한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운동장 하나 크기여야 할 공간이 네 배쯤은 컸다.
‘하드만의 다른 패턴인가.’
처음 보는 패턴에 주변을 집중해서 살폈다.
그러다 각 끄트머리에 소환된 녀석들을 확인하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상황이 아주 재밌게 돌아가는데?”
* * *
통신거울이 박살 나자, 그 앞에 서 있던 박우철은 짙은 살기를 드러냈다.
“이 새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박우철 님, 진정하십시오.”
옆에 곱상한 외모의 남자가 그를 만류했다.
남자는 박우철의 오른팔 지동우.
쾅!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참지 못한 박우철은 발을 내리찍었다.
강한 충격을 받은 땅은 쉽사리 틈을 드러내며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나대는 꼴을 보고도 진정하게 생겼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내 위신만이 아니라 길드의 위신도 떨어진다. 그 새끼가 있는 곳을 알아내야 돼.”
“사람은 피가 마르면 죽습니다.”
박우철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야!”
“네.”
“내가 말한 건 그 뜻이 아니잖아! 이 미친 새끼야!”
퍽!
박우철은 그의 머리를 때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못 올라가.”
“그래도 본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페이크북을 얻기 위해서잖습니까. 그럼 그 누구보다 빨리 최종목적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음. 그건 그래.”
페이크북의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과열된 머리가 겨우 진정됐다.
박우철은 주머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손가락 위로 소환한 작은 불꽃을 이용해 시가에 불을 붙였다.
“푸후하아~.”
곰곰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박우철이 입을 뗐다.
“지동우.”
“예.”
“그놈 얼굴 본 적 있어?”
“없습니다.”
“그래. 없지. 그런데 그 녀석은 우릴 공격해 왔어. 그 이유가 뭘까?”
“음…… 솔직하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나 따로 불만이 있을 때 그러지 않나요.”
“그래. 그렇지. 근데 내가 봤을 땐 그런 게 아니야.”
그 놈의 표정을 본 박우철은 확신하듯 얘기했다.
“분노하거나 불만을 보이는 게 아니라 마치 방해되는 놈을 처리한다는 느낌이었어.”
“방해요?”
“어. 그 녀석에게 우리가 방해되는 것은 뭘까?”
“음…… 설마 페이크북을 말하는 겁니까? 한데 그 정보를 아는 건 올튼 그 녀석들하고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백퍼센트라고는 장담 못하지.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 때문에 덤빈 거라면 녀석이 덤빈 이유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심지어 그놈은 자기와 싸운 게 분신이란 걸 알고 있었어.”
박우철은 시가를 길게 물었다가 연기를 뱉었다.
“그뿐이 아니지. 내가 위층의 등반자라는 걸 밝혔는데도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단 말이지.”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이상한 정도가 아니지. 보통이면 모를 것들을 죄다 알고 있잖아. 마치 꿰뚫어 보는 것처럼.”
“음. 그럼 페이크북도 알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네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박우철은 시가를 반쯤 태우곤, 그걸 손가락으로 튕겨서 버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어떻게 하긴. 예정대로 최종목적지로 향한다. 그놈이 그걸 노리고 있다면 그곳에서 마주치게 되겠지.”
박우철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다.
이내 둘은 만년필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서 움직였다.
* * *
나는 끄트머리에 소환된 녀석들을 하나씩 바라봤다.
룩의 왕 타브.
나이트의 왕 아츠.
그리고 비숍의 왕 엘나크까지.
하나만 등장해야 할 체스판의 왕들이 세 놈이나 등장했다.
나야 세 놈을 한꺼번에 잡아들이면 시간도 단축되고 힘도 덜 들여서 좋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다들 폰의 왕 에스트라가 등장했을 때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왕들의 등장에 룩. 나이트. 비숍의 말들이 등장해 서서히 포위를 해나가고 있었다.
-왕 셋이 동시에 등장이라. 이건 하드여도 과한 면이 있군.
다칼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하드여서 셋이 등장한 게 아니라고?”
-내가 알기로는 끽해야 둘이다. 셋이 등장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다.
그러니까 이게 처음 있는 일이라는 건가.
-이 정도면 보통 도전하는 등반자들이 공격을 버티질 못하고 전멸하겠지.
나도 다칼의 말에 동의했다.
셋을 전부 쓰러트릴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온다!
룩의 왕 타브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네모나게 생긴 투구를 쓰고 있는 타브는 백색의 갑옷을 입은 채 붉은색의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쿠과가가가-!
앞뒤로 이동하는 특성을 가진 룩답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속도가 매우 재빨랐다.
녀석의 타깃은 나보다 앞에 서 있는 안철호가 목적이었다.
찰나에 그 앞에 도달한 타브가 할버드를 들어 올려 내리찍는다.
동시에 돌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챙!
“크으윽!”
랜스로 막아 내기는 했으나 버거워 보인다.
“히히히힝!”
나이트의 왕 아츠는 철갑주를 두른 말을 타고 창을 든 채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쏟아붓는 창의 폭격!
창을 무한히 생성해 내고 있었다.
“칫! 젠장!”
그걸 받아 내는 건 강예지였다.
그녀 또한 싸움이 버거워 보였다.
인듀어 길드원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상당히 지쳐 있었다.
어차피 완전히 끝내지 못할 테니, 당분간은 타브와 아츠를 저 둘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할 놈은 따로 있었다.
아직 끄트머리에 서 있는 비숍의 왕 엘나크.
파란 머릿결과 백옥의 피부를 가진 그녀는 고깔모자를 쓴 채로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지팡이를 사용했다.
지이잉!
이내 단번에 공간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거대한 빛의 줄기가 정면으로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