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21화
121화 폰의 왕 에스트라
잠시 이쪽을 훑어보는 에스트라는 찌르기에 특화된 레이피어를 정면으로 겨누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의 병사들이여! 적들의 목을 수장하라!”
척! 척!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폰들이 군대처럼 대열을 만들고 공격을 준비했다.
폰 중에 가슴에 십자가 각인이 박힌 성직자들이 폰 전체에게 회색빛의 버프를 부여했다.
한데 회색빛의 버프는 처음 보는 힘이었다.
이지에서 성직자들은 황금빛이 서린 회복 버프만 사용했다.
곧 활과 지팡이를 든 폰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허공에 마법을 형성했다.
파직! 파지지!
지팡이 끝에 강력한 전기 에너지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 둘러진 회색빛이 한차례 마법을 증폭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같은 버프를 받은 활을 든 폰들도 마치 더 큰 힘을 부여받은 듯 활대의 시위를 더 뒤로 당겼다.
그걸로 회색빛의 버프가 신체 능력과 마법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안철호가 랜스와 방패를 부딪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다들 가만히 있을 거야!? 곧 공격이 들어올 텐데 이쪽도 대비를 해야지!”
“어머. 대비를 해야 하는 건 맞지만 너무 명령조로 말하시네. 누가 보면 우리가 당신 부하인 줄 알겠어.”
강예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안철호가 한 말에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안철호가 발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하나 눈앞에 있는 적을 보곤 포기한다.
“명령조든 뭐든 살려면 뭉쳐야 되는 걸 잊지 마. 겨우 방 하나를 건너왔을 뿐인데 삼분의 일이 죽었어.”
그가 말하는 사이에 폰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온다!”
다들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나는 다칼과 마주 보며 다크스윔을 시전했다.
스르륵-
본디 적을 혼란시키고 진열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적진을 파고드는 것만큼 최고의 방법이 없었다.
어느새 폰들의 중심으로 이동한 나는 지팡이를 치켜올리며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나방출!
응축된 마나가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켰다.
다시금 마법을 시전 중이던 폰들이 캐스팅을 실패한다.
활시위를 당기던 녀석들도 중심을 잃었다.
“캬하아아앙!”
그 틈에 다칼이 몸집을 키우고 앞발을 휘둘렀다.
퍼석!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네다섯 개의 폰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마나방출!
폰들의 공격을 한 번 더 방해한 후, 나는 진열에서 벗어나며 다칼에게 말했다.
“졸은 맡길 게.”
“크하아앙!”
-알았다!
폰 전사와 폰 성기사가 도끼 그리고 검과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다크싱어.
우우우웅-
검정색 음표들이 공중에 생겨나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랑 다칼은 그걸 들으며 편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음악에 노출된 녀석들은 최악을 경험했다.
쩌저적! 쩌적!
내게 다가오던 폰들의 몸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끄윽! 끄아아아!”
“이게 뭔 소리야!? 누가 이 소리 좀 차단해 봐!”
음악은 저 멀리 있는 등반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나는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피아 구별 없이 무작위로 시전하긴 했지만 컨트롤한다면 피아를 구별해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법에 집중해 등반자들은 제외되도록 시도했다.
잠시 후, 등반자들이 막고 있던 귀를 풀고 접근해 온 폰들을 상대했다.
[마법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합니다.]
[마법컨트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나가 올랐습니다!]
한편 가까이 있던 폰 녀석들은.
퍼서석!
음악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갔던 몸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이내 나는 거리 10미터 정도 떨어진 에스트라와 두 눈을 마주쳤다.
“네놈은 내가 상대해 주마!”
에스트라가 두 번의 도약을 통해 가까이 접근했다.
수아악!
찌르기의 속도가 매우 재빨랐다.
다크소드.
챙!
에스트라가 가진 검의 크기와 두 배쯤 차이 나는 검으로 소환해 공격을 막아 냈다.
이어서 세 개의 검을 더 소환해 녀석을 밀어붙였다.
그동안 뒤에서 박살이 났던 폰들이 부서진 몸을 원상 복구해 다시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폰의 무서움은 끊임없는 재생 능력이다.
부숴도 부숴도 폰의 왕이 죽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부활한다.
놈들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캬하아아앙!”
-네놈들 상대는 나다! 이 졸들아!
하지만 내게 닿기도 전에 다칼에게 끌려가 버렸다.
그리고 다칼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에스트라에게 석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챙, 채챙!
네 개의 검을 겨우 받아 내던 에스트라가 몸이 제 뜻대로 말을 듣지 않으니 나랑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봐야 소용없을 텐데.”
다칼의 시야 속에 있는 한 에스트라가 석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나저나 벌써 변하고 있군.’
에스트라의 머리색을 보면 하얗던 게 점점 검게 변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변신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폰은 체스판 끝에 도달하면 나이트든 룩이든 퀸이든 그 어떠한 것으로도 바뀔 수 있었다.
에스트라 또한 비슷하게 머리색이 모두 검정색으로 변하는 순간 잠재되어 있던 힘이 해방하게 된다.
해방 상태와 해방되지 않은 상태의 힘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렬해, 상대하기 쉬울 때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도 에스트라를 끝내 버릴 수가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해방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끝내 에스트라는 돌덩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머리카락만큼은 돌이 되지 않고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변신은 계속 진행이 되는 중이었다.
‘그래. 빨리 변신해 달라고.’
이 녀석을 처리한 후에도 상대할 녀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순간에 누군가가 훼방을 놓았다.
‘안철호.’
그는 돌이 되어 버린 에스트라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안 되지.’
다크포스.
어둠의 공간을 전개해 에스트라 주변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두 밀어내 버렸다.
“크윽!”
안철호 역시 어둠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어둠에서 받는 어드밴티지가 메시지로 전해졌다. 하지만 오직 내 시선은 에스트라에게 가 있었다.
에스트라의 머리카락이 거의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나는 이미 소환되어 있는 네 개의 검으로 녀석의 목을 겨누었다.
잠시 후.
파즈즉. 챙!
에스트라가 석화를 깨고 나왔다.
[폰의 왕 에스트라가 잠재되어 있는 힘을 해방시켰습니다!]
동시에 네 개의 검을 움직였다.
푸푸푸푹!
목과 가슴에 공격이 박혔다.
굿바이. 에스트라.
[해방된 폰의 왕 에스트라를 처치하였습니다!]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해방된 폰의 조각이 지급되었습니다.]
[에스트라의 심장이 지급되었습니다.]
검정색과 하얀색이 반반씩 섞인 폰 모양의 조각을 손에 넣었다.
조각에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냥 폰의 조각은 이런 빛도 없고 검정색 또한 없었다.
오직 하얀색뿐이었다.
또한 해방된 폰의 조각은 나이트, 룩, 비숍, 퀸, 킹에게서 나오는 조각들을 하나로 합쳐 탄생하는 올체크메이트 아이템의 중요한 주축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트라의 심장.
이것은 회귀 전에도 보지 못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핑크색의 심장은 마치 장난감처럼 생겼다.
정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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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의 심장
내용: 에스트라의 차갑고 냉철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효과: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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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템인가.’
아직 효과는 알 수 없으나, 잔챙이에게 나온 물건은 아니니 꽤나 쓸 만한 템일 것이다.
나는 두 물건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크포스 시전을 해제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스트라가 죽으면서 좀비처럼 싸우던 폰도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며 그간 녀석들을 처리하며 받지 못한 보상이 뒤늦게 들어왔다.
[854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86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812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84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731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981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
……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메시지에 정신이 없었다.
“이봐!”
안철호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아까 날 공격하면 어떻게 해!? 녀석을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는 두 팔로 날 밀치려고 했지만 이미 시전해 둔 보호막에 막혀 버렸다.
나는 무표정한 눈길로 에스트라가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처리됐잖아. 그리고 그게 어쨌다고?”
“뭐?”
“내가 차려 놓은 밥상을 남이 뺏어 먹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인간이 어디 있지?”
“아니, 난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핑계는 됐고. 싸울 게 아니면 이쯤하지.”
“크르르.”
마침 다칼이 다가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그런다고 쫄 인간은 아니었지만 압박감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쯧.”
안철호도 자신의 행동이 딱히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냥 물러났다.
“꼴~ 좋다!”
어느새 옆에 와있는 강예지가 멀어져 가는 안철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있는 척 뻗대더니. 흥!”
안철호는 강예지에게 제대로 미움을 사고 있었다.
미움을 산 이유가 내게도 원인이 있었지만, 둘이 싸움을 시작한 건 내 뜻이 아니었다.
달캉! 달캉! 달캉!
삼면의 문이 열렸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인도자의 만년필을 쳐다보았다.
‘저쪽이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옆에 붙어 있던 강예지가 뒤따라왔다.
이어서 나랑 마찰이 일었던 안철호 역시 이 방을 선택했다.
그러자 어물쩍대던 등반자들은 서로가 눈치를 보더니 거의 이쪽으로 넘어왔다.
저들이 따라오는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대다수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먼저 간 곳을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왠지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되고 큰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의 생존률을 높이려면 사람들이 많은 편이 유리한 게 사실이고 말이다.
하지만 때론 사람이 많은 게 꼭 높은 생존률과 직결되는 건 아니다.
쿵!
선택의 시간이 끝나고 문이 닫혔다.
이번 방은 검은색으로 물든 공간이기에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여기저기서 불빛을 밝혔다.
10미터 내로는 대낮처럼 밝았지만 그보다 먼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때.
“살려 주세요!”
“응? 이거 사람 목소리 아니야?”
어둠 속에서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 흑.”
이내 빛이 드는 곳으로 가녀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 머리와 백옥처럼 고운 피부의 아름다운 미모는 어두운 곳에서도 가려지지 않았다.
일부 남자들이 소녀의 얼굴을 보고 뛰쳐나갔다.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이들이 한마디 했다.
“위험한 거 아니야? 내가 기억하기로 저쪽에는 사람이 없었다고.”
“나도 못 본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말릴까.”
강예지가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냅 둬요. 죽어도 다 자기 탓이지. 여자 얼굴만 보고 쫄래쫄래 달려가다니. 한심해선. 그럼 대체 동물이랑 다를 게 뭐야.”
조용히 있던 나는 뒤늦게 소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 있는 강예지가 말했다.
“준석, 설마 그쪽도 저 소녀 외모에 반해서, 지금 사리 분별 못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사리 분별은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소녀가 있는 곳을 쳐다보다 이내 어둠 속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나볼트.
파직! 파지직!
연달아 같은 마법 시전하며 동시에 구체를 쪼개 개수를 늘려 나갔다.
나랑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다칼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 참 많기도 하다.
한편 울고 있는 소녀 곁에는.
“흑흑.”
“괜찮아?”
“어이구. 혼자서 무서웠겠다. 오빠가 왔잖아. 오빠만 믿어.”
완전히 경계를 푼 남자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표정이었다.
‘제대로 유혹을 당했군.’
그 위로 정체불명의 꽃들이 자신의 줄기를 늘려 가며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었다.
추륵, 촤아악!
순식간에 꽃이 아가리를 벌려 남자들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소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준비를 끝낸 나는 수천여 개로 쪼갠 자그만 전기 구체를 어둠의 천장으로 날려 보냈다.
구체의 밝은 빛으로 인해 어둠에 있던 존재가 드러났다.
“키리리리릭!”
수천여 개의 꽃이 벽에 붙어 있는 채로, 먹잇감을 찾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광경은 꽤 볼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