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탑 등반자-116화 (116/230)

회귀한 탑 등반자 116화

116화 가로채다

숨을 고른 강예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뭐야……? 반가운 마음에 장난스레 인사한 거 가지고 살기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아님.”

그녀가 멀찍이 물러서며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이제 와서 내가 가진 소울을 빼앗으려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예지가 가지고 있던 다크 소울을 빼앗으려고 마음먹었던 건 맞지만 뭔가 우리들 역할이 바뀐 느낌이 들었다.

“웃겨?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진짜로 그러는 것 같잖아? 연기가 아주 감쪽같아.’

세상이 멸망하지만 않았으면 배우가 됐으면 딱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중인격 혹은 소시오패스가 아주 잘 어울린 것 같았다.

나는 무기를 거두고서 두 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크라켄을 상대하다 보니 예민해진 것뿐이야. 딱히 그쪽을 죽일 생각은 없어. 그러니 그쯤하지?”

강예지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끝까지 연기로 유지하겠다 이거지? 뭐. 좋아. 마음대로 하라지.’

자리에 남아서 그걸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다크스윔.

어둠이 되어 그녀를 지나쳤다.

뒤에서 몸을 돌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가 버린다고? 이봐! 야!”

계단을 가로막고 있던 철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준석!”

자꾸만 나를 호명하는데, 그러든 말든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들 뿐이었다.

곧바로 내 뒤를 따라온 다칼이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살기까지 드러내놓고서 저 여자를 그냥 살려 두기로 한 건가?

“일단 지금은.”

-흠. 그럼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처리할 생각이라는 거군.

“방해가 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설 수 있지만 저쪽에서 먼저 부딪혀 오지도 않는데. 지금의 내 몸상태를 고려하면 굳이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지.”

-하긴. 방금 전까지 크라켄을 상대하고서 저 여자를 상대하는 건 꽤 피곤한 일이지. 쓸데없이 말이 많은 여자이긴 해도 실력은 있으니까.

“사서 고생하는 꼴이지.”

-한데 크라켄과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대가 잡아먹히고 곧바로 뒤쫓긴 했지만 시야에서 놓치는 바람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군.

“놓쳤어. 도중에 포세이돈을 만났거든.”

-포세이돈이라면 바다의 지배자!? 그자가 나타났다고?

“어. 뭐. 안 나타났어도 똑같이 못 잡았을 것 같긴 하지만.”

-포세이돈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던가?

나는 짧고 솔직하게 말했다.

“신약을 맺자고 제안해 왔지. 그걸 거절했고.”

“캬하하!”

다칼이 호탕하게 웃는다.

-신좌가 먼저 신약을 맺자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걸 거절까지.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벌어졌군.

“나도 듣고 놀랐지.”

-무언가 아쉬워하는 표정인데?”

“신약 제의는 흔한 일이 아니니까. 두 신좌야 계약을 맺는 것만 가능했어도 바로 받아들이는 건데.”

-그렇게 되면 확실히 강력한 힘은 보장되겠지.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듯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 그보다 크라켄을 놓쳐 버렸으니. 고생을 했으면 어느 정도 수확이 있어야 하건만, 괜히 힘만 뺀 기분이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칼을 바라봤다.

“얻은 게 왜 없어?”

이내 허리춤에 있는 새끼 크라켄을 끄집어내 보여 줬다.

“꾸우우!”

“얘를 펫시장에 갔다만 팔아도 큰돈을 만질 수가 있구만.”

“캬하하하!”

-놈을 아직도 갖고 있었나? 결국에는 빼앗길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이게 얼마짜린데.”

“쩌업.”

다칼은 새끼 크라켄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먹고 싶은 건 여전한가 보다.

“이것 말고도 다른 것도 있어.”

나는 크라켄의 몸속에 발견한 정체불명의 팔찌를 보여 주고 그다음엔 새로 얻은 칭호도 얘기해 주었다.

-정말 짧은 사이에 많이도 얻었군. 깡통 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니 정말 다행이다.

“만약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면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크라켄을 끝까지 쫓아 잡았겠지. 물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지만.”

다칼이 크게 웃었다.

-하긴 그대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얻은 게 하나 더 있었네.”

-무엇이지?

말하다 보니 떠오른 게 있었다.

나는 선장 카발에게서 얻었던 타락한 선장의 팔찌를 꺼내 들었다.

(((((((((((((((((((((((((((((((((((((((()

타락한 선장의 팔찌

효과: 고독, 망각

조건부 효과: 소유자의 마나를 매개체로 삼아 ‘유령선’을 소환할 수 있다. 단 소환의 유지시간은 소모한 마나량에 따라서 달라진다.

(((((((((((((((((((((((((((((((((((((((()

타락한 선장의 팔찌는 신체 능력이나 스킬에 영향을 주는 옵션이 아니었다.

대신 약 100여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중형 배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육지이든 해상이든 하늘이든 상관없이 소환이 가능하단 점에서 환경적인 제약이 따르지 않았다.

다만 효과에는 고독과 타락이라는 패널티가 따로 존재했다.

고독은 혼자 고립되어 있는 기분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저주였다.

그리고 망각은 점차 본래 자신의 모습마저 잃어 가는 저주였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저주였지만 그렇다고 팔찌를 사용하는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력이 낮은 자들이야 저주의 영향을 받겠지만, 정신력이 높으면 저주의 영향따윈 받지 않았다.

또한 저주를 아예 없애는 방법도 존재하고 말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팔에 팔찌를 착용한 뒤 이내 도달한 4층을 둘러보았다.

4층은 5층에 비하면 모든 것이 양호한 편이었다.

그리고 5층은 시체밭이었던 것에 반해 4층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물론 크라켄 때문인지 아님 다른 녀석과 싸운 것 때문인지,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멀쩡한 모습이다.

그도 잠시.

‘피곤해.’

머릿속에는 온통 휴식이란 단어만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가지는 관심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곧장 3층과 2층을 지나 1층에 있는 객실로 향했다.

잠시 후.

“캬하아~.”

“후아~.”

나랑 다칼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온 터라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짠 바닷물을 실컷 마셨더니 목도 말랐다.

“으챠!”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식탁에 올려진 물을 벌컥 마시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몸에는 짠내가 남아 있어 깨끗이하려면 샤워를 해야 했지만 그대로 몸을 눕혀 버렸다.

씻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하면 된다는 마인드였다.

당장에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로부터 한 1분쯤 지났을까?

“……크르렁! 크르렁!”

다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잠이 들었다.

평소라면 옆에서 코고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 잠이 드는데 시간이 좀 걸렸겠지만, 지금은 이상하리 만큼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 * *

나랑 다칼은 그로부터 여덟 시간은 넘게 잠에만 취해 있었다.

덕분에 피로했던 육체가 어느 정도 회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크라켄과 무리하게 싸웠던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심각한 후유증은 딱히 없었기에 등가교환 마법으로 회복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용하면 좋기야 하지만 기껏 채워 놓은 마나를 거기에 소모시킬 수는 없다.

안 그래도 곧 있으면 마나가 쓸 일이 많아지리라.

‘아니. 이미 시작됐으려나.’

나는 대충 씻고 객실을 벗어나 정한 목적지로 이동했다.

정해진 시간 때에만 나타나는 빅씨로버와 그 잔당을 잡아들여 블랙 소울을 획득했다.

이어서 곧장 다른 장소로 이동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 마주친 등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공격을 해 오기 바빴다.

블랙 소울을 노리고 한 행동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보면 씨로버가 아닌 사람들끼리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게 흔하게 보였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슬슬 블랙 소울을 드랍하는 녀석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가 모든 걸 독차지하려는 건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점차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항한 지 30시간째.

미션이 끝나기 전에 등반자들은 최대한 블랙 소울을 차지하려고 들 것이다.

심지어 도착하기 반나절 전부터는 객실 사용이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숨어 들 수도 없었다.

“저 새끼 쳐!”

“뭐하고 있어! 저놈들 막아!”

자연스레 치열한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들만 정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만 회수했다.

워낙 덤벼드는 놈들이 많아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커억……!”

털썩.

내 등을 노리던 녀석을 처치한 뒤 잠깐 여태 회수한 개수를 체크해 보았다.

352.

“오호~.”

300개는 가뿐히 넘겼고, 추가로 48개만 채우면 400개였다.

애당초 계획한 것보다 많이 모았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수급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채울 궁리를 했다.

고사성어 중에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뭐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뜻을 가졌지만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과해도 상관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행동 포지션을 바꾸기로 했다.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들 뿐만 아니라 탑 등반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악행을 일삼은 녀석들 혹은 쓰레기들 위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크허억…….”

수십, 수백.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블랙 소울의 개수를 확인한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417개.

이것을 전부 능력치로 환산한다고 치면 똑같은 숫자로 총합치가 대폭 상승하게 된다.

일단 능력치는 랜덤으로 오르니까, 뭐가 가장 많이 오르게 될지 기대가 됐다.

그나저나.

“흠~ 이제는 안 보이네.”

눈에 거슬리는 등반자들을 마주치는 족족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상대할 녀석이 더 이상 없어져 버렸다.

애초에 등반자들 간에 싸움이 현저이 줄어들었다.

모두 지쳐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요인도 있어 보였다.

사람들이 손목에 있는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는 걸 보고 나 또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20층의 미션은 크루즈선에서 3일 동안 무사히 살아남는 것.

앞으로 도착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휴전을 맺고 자연스레 3층의 메인홀로 모여들었다.

사람들 머릿속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쉽사리 덤벼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실제로 누군가가 어떤 놈에게 덤벼들면 또 다른 놈이 그 빈틈을 이용해서 블랙 소울을 빼앗으려고 드니 이는 확실한 견제가 되었다.

나 역시 사람이 많은 메인홀에 머무르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폭풍우는 완전히 지나가고 따스한 햇볕만이 내리쬐고 있었다.

금세 고개를 돌려 메인홀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동안 누가 살아남았는지 확인을 해 보는 것이다.

강예지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는 딱히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 그녀와 부딪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면 블랙 소울을 가장 많이 회수한 등반자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안철호.

그는 강예지 다음으로 블랙 소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등반자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지 않고 일부 몇 명이 자진해서 소울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특이한 방식으로 소울을 모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외에도 눈에 띄는 등반자들 몇 명과 약 이백여 명 정도되는 인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보였다.

“크흥~.”

바닥에 조용히 엎드려 있던 다칼이 한마디 한다.

-강예지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보아하니 배가 도착할 때까지도 안 덤빌 것 같은데.

“음. 내가 봐도 그래 보여.”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의 행동은 의외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여태 검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점을 본 것이 틀림없다.

딱히 내게 공격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지금은 체력도 회복해서 먼저 공격해도 상관은 없어. 다만…….’

굳이 힘을 뺄 필요있을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블랙 소울만 몰래 가져오면 그녀와 그녀 뒤에 있는 신좌와 굳이 부딪치지 않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잇었다.

문제는 블랙 소울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법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했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터.

‘하지만 다칼의 어둠이라면 다르지.’

그것은 마법이 아니니까.

하나 그것으로 그냥 빼돌리기에는 다칼의 어둠이 너무도 눈에 띄었다.

강예지가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바로 들킬 것이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리거나 아님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등가교환은 무엇이든지 가능케해 주는 마법.

사실 망각을 이용해 빼앗기는 걸 인지 자체를 못하게 방법도 있었다.

다만 상대가 가진 힘에 따라 혹은 아이템으로 인한 변수가 생기면 마나가 얼마나 소모될지 몰라 리스크가 컸다.

‘그래도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만일 그녀가 가진 것을 빼앗는다면 700개도 넘길 수 있었다.

‘해 보자.’

나는 대충 다칼에게 계획을 설명한 후, 티가 나지 않게 강예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등가교환.

콰아앙!

바깥에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어, 어!?”

“뭐, 뭐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이 폭발한 쪽으로 가 있는 틈을 타서 다시금 마법을 시전했다.

등가교환.

일단 신좌도 보지 못하도록 주변에 빛의 굴절을 일으켰다.

애초에 신좌가 보고서 계약자에게 알려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

곧바로 강예지에게 망각을 부여하는 마법을 시전했다.

마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지금이야!’

다칼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칼이 어둠을 두 손가락 형태로 만들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블랙 소울을 쏙 빼돌렸다.

뺴돌리자마자 나는 마법을 풀고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강예지도, 다른 등반자들도, 그 아무도 내가 블랙 소울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빼돌린 블랙 소울과 내가 가지고 있던 블랙 소울을 합쳤다.

그리고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711.

숫자를 보자마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계획은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