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09화
109화 작은 상자 안에
“한동안 독방 신세네.”
최소한 반나절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오랫동안 한곳에 갇혀 있으면 답답해지기 마련이지만 다른 때면 몰라도 피곤함이 누적인 지금은 달랐다.
이제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회로가 마구 돌아간다.
나는 식탁에 놓인 초코 과자를 손으로 집었다.
콰작!
비스킷은 아삭했고 그 위에 올린 초코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이내 다른 과자들도 입에 가져갔다.
크루즈 안에서 유일하게 객실의 음식들만은 상하거나 썩지 않았다.
다칼도 옆에서 조용히 랍스터를 입에 물었다.
“캬하앙!?”
-맛이 아주 괜찮군.
랍스터가 입맛에 맞은 다칼은 그걸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러곤 다른 음식에도 손을 댄다.
‘저러다가 거덜나겠네.’
“다 먹지 말고 남겨. 나도 먹어야 되니까.”
“콰하악, 코하욱!”
“야야! 남기라고 임마!”
나는 흥분한 다칼을 겨우 말렸다.
정신을 차린 다칼은 멎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흠! 미안하군. 요즘 부쩍 식욕이 늘었단 말이지.
“성장기인 건 알겠는데, 없을 땐 조절해서 먹으라고. 이걸로 3일을 때워야 하니까. 물론 아공간에 비상식량을 저축해 두긴 했지만. 그건 꼭 필요할 때 먹어야 하니까, 안 먹을 거야.”
-그대는 풍요의 로브가 있어서 괜찮지 않나?
“꼭 배고파서 먹어? 가끔씩 스트레스도 풀 겸 먹는 거지. 본래 인간은 먹기 위해서 살아. 그리고 너야말로 사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잖아.”
“크르릉.”
-요샌 배고픔이 느껴진다. 물론 안 먹어도 괜찮지만…… 참기가 어렵군. 그래도 음식이 없을 땐 자제해 보겠다.
“어차피 크루즈에서 내리고 21층에 가면 먹을 게 많이 있을 때니 그때 실컷 배 채우라고.”
-그래야겠군.
이후 나는 식사를 즐기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후우~.”
배가 불러오니 만사가 귀찮아진다.
괜스레 천장을 보며 멍을 때렸다.
“아! 그거나 사용해 볼까.”
“크응?”
-무엇 말인가?
“이번에 새로운 스킬을 터득했거든. 다크싱어라고.”
전투할 때는 익숙한 게 편하니 기존의 스킬들만 사용했다.
그래서 새로 얻고도 사용을 못해 봤는데, 어디 어떤 느낌인지 한번 보기로 했다.
그대로 누운 채로 두 손을 위로 뻗은 후 마나를 끌어 올렸다.
다크싱어.
검정색 음표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화이터가 만들어 냈던 음표랑 비슷하군.’
삽시간에 음표의 개수가 수십 여 개에 이르렀다.
둥둥 떠다니는 음표들을 보고 있으니 마치 악보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침대에 몸을 눕힌 다칼도 떠다니는 음표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표는 곧 살아서 춤을 추는 것처럼 위아래 혹은 왼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내는 고래의 소리와 비슷한 음악이 들려왔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좋은 음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캬하아아~.”
한편 다칼은 들려오는 음악이 마음에 드는지 행복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쿠후우~ 쿠후우~.”
그리고 금방 잠에 빠졌다.
“무슨 자장가도 아니고.”
하나 그것은 우리 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이고,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으론 일종의 버프와 디버프를 동시에 가진 스킬이었다.
어둠과 친화력을 가진 자들은 이 음악 소리를 듣고 안전감을 찾는 반면 친화력이 없는 자들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최악의 음악을 듣게 된다.
특히나 빛과 친화력을 가진 이들에게 이 음악을 계속 들려주면 고통에 묻혀 숨통을 끊어 놓을 수도 있었다.
“하암~.”
나도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저절로 눈이 감겨 왔다.
* * *
얼마나 잔 것일까?
타타다! 타다다다다!
유리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에 깨 버렸다.
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장 먼저 시간을 체크했다.
‘꼬박 반나절을 잤네.’
근래 들어서 가장 오래 잤다.
‘음악 때문인가.’
그래도 깊이 잠을 잤더니 몸과 정신이 간만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개운함을 넘어선 고양감 마저 느껴졌다.
“캬하~ 푸! 캬하~ 후!”
다칼은 요상한 소리를 내며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곧 있으면 깨워야 하지만, 아직은 내버려 둬도 되니 그대로 두었다.
나는 차갑게 식어 있는 차를 불로 뜨겁게 달군 후 창밖을 보며 한 입을 들이켰다.
몰아치는 폭풍우와 파도에 출렁이는 배.
간혹 보이는 섬의 그림자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지구랑 다를 게 없단 말이지.”
부모님과 함께 배를 탔던 기억이 난다.
출항할 때는 더없이 맑았던 하늘이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우로 변했다.
이보다 작은 배를 탔었기에 지금보다 더 많이 흔들렸다.
그래도 그땐 뭐가 그리도 좋았는지 가혹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포커도 치고, 화투도 치고…… 서로 벌칙으로 딱밤도 때리고.
피식.
생각하다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캬하아아아!?”
“깜짝이야.”
다칼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뭐야? 갑자기.”
“캬하하……!”
-아무래도 자는 도중에 코가 막힌 것 같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추억은 추억일 뿐, 지금은 현실을 봐야 했다.
“캬흥. 캬흥…….”
다칼은 자신의 배를 슥슥 문지르더니 곧장 식탁 앞으로 이동한다.
“일어나자마자 또 먹어?”
-얼마나 잤는지 허기가 지는군.
“조금만 먹어. 슬슬 나갈 준비해야 되니까.”
곧 안개가 걷힐 시간이다.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사라졌다는 메시지가 떴다.
나는 아직 음식을 먹고 있는 다칼의 뒷목을 붙잡고서 객실의 문을 열었다.
거의 동시에 강예지도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개판이네.”
그녀를 보자마자 나온 첫마디였다.
그러자 강예지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냉담히 말했다.
“알고 있거든?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머리가 완전 선머슴처럼 떡이 졌는데. 그쪽 머리나 신경 쓰지그래.”
반나절 이상 객실에 갇혀 있었더니 살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금방 수그러지는 태도를 보였다.
“어젯밤엔 고마웠어.”
“뭐라고? 잘 알 들리는데.”
“웃기시네. 제대로 들었으면서. 다신 안 말해.”
강예지는 먼저 앞서나가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쪽은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디로 갈 거냐고.”
“가 볼 데가 있어.”
“가 볼 데? 물어보면 항상 가 볼 데가 있다고 하더라. 마치 배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쪽 배 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익숙해. 나도 나름 샅샅이 돌아다녔지만 너처럼 익숙하게 돌아다니지는 않거든.”
‘예리하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혹시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그냥 착각이다.”
“아, 뭐. 하긴. 익숙하게 돌아다니는 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냥 타고난 건가…….”
“그보다 넌 어디로 갈 예정이지?”
“나? 나는…… 일단 위층으로 올라가 보려고. 어제는 4층이 결계로 막혀 있었는데. 다시 한번 가 볼 생각이야. 같이 갈래?”
어제, 그새 4층 입구까지 올라갔다 와 본건가? 역시 탐색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마침 나도 4층에 볼일이 있으니 같이 가면 되겠네.”
“좋아.”
강예지가 먼저 앞장을 섰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어제랑 살짝 분위기가 달라졌다.’
슬슬 가짜의 얼굴과 진짜의 얼굴을 섞어서 반응하고 있었다.
아마 의도한 것 같지는 않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인 듯했다.
“흐음~ 근데 결계가 아직 쳐져 있으면 어디로 가 보지.”
나는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그럼 결계를 푸는 방법을, 점으로 알아내면 되지 않나? 뭘 고민하는 거지.”
“아…… 재료를 많이 써서. 이제 진짜로 아껴야 하거든.”
재료를 많이 썼다라…….
어차피 그녀의 점을 써먹을 일이 사라졌으니 되레 내겐 사용이 제한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 아마 지금쯤 결계가 풀려 있을 테니까.”
“응……? 결계가 풀렸는지 그쪽이 어떻게 알아?”
“안개 때문에 방에 갇히기 전에 4층의 결계가 약해져 가는 걸 봤거든.”
“진짜?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우리가 처음으로 4층에 입성할지도 모르겠네.”
층을 올라가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구역마다 배치되어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거나 대형 아트리움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리고 강예지가 안내한 길은 구역마다 배치된 계단이었다.
수십 계단을 올라 이내 4층의 입구에 도달했다.
“정말이네? 없어!”
결계는 사라져 있었다.
또한 아직 사람들이 발을 안 들인 것이 티가 날 정도로 4층 복도는 어둡고 고요했다.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크하아~.”
“끼아~!”
그러자 어디선가 숨어 있던 씨로버들이 튀어나온다.
강예지는 녀석들이 등장하자마자 실끈을 날려 제압했다.
내게 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나 나를 포함해 다칼까지, 둘이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우릴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예지가 한 놈을 상대할 때면 우린 다섯 놈을 잡았다.
하나 그런 압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씨로버 토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전부 내 것이 될 텐데, 저렇게 열심히 잡아 주니 만족스러움이 든다.
이내 나는 A구역에서 D구역으로 넘어가는 통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흩어지지.”
“어?”
“어제처럼 흩어지자는 소리야. 그쪽이 이쪽을 마저 맡아. 난 저쪽으로 가 보지.”
그녀도 대놓고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첫날처럼 막무가내로 따라붙지는 않았다.
어젯밤 히든 피스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그 아이템이 귀속 아이템이었으니. 지금도 쫓아가봐야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D구역으로 들어섰다.
목적지까지 가는 와중에 씨로버 여럿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방해물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다.’
일지에 적혀 있던 선주 창고.
한데 그 앞에 불청객이 있었다.
“여기가 확실해?”
“쪽지로 본 위치는 여기가 맞아. 흐흐흐! 뭐가 있을지 기대되지 않아?”
“너무 들뜨지 마. 어쩌면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아님 존나 강한 놈이 숨어 있거나.”
“오케이. 그럼 내가 문을 연다.”
“잠깐.”
남자 둘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대놓고 몸을 드러내 놓고 있다고 해도 기척은 숨긴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상황적으로 봤을 때 일지에 적힌 힌트는 혼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놈들도 비슷한 힌트를 얻은 것일 터.
선주 창고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둘을 내버려 두면 방해가 될 것이다.
“칫. 엿들었나?”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둘은 무기를 들고서 이쪽으로 뛰어왔다.
“다칼, 돌로 만들어 버려.”
-맡겨 둬라.
두 남자는 손 한번 뻗어 보지도 못한 채 돌로 변해 버렸다.
나는 석상이 된 둘을 지나쳐 선주 창고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연다.
컴컴한 내부에는 큰 상자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상자라 했는데.’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작은 상자다!’
구석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혹시나 주변에 함정이 있나 살폈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발동한다고 하더라도 보호막에 가로막힐 터.
다른 무언가 방해를 한다고 해도 빠르게 대응하기만 하면 됐다.
등가교환.
나는 염력으로 끌어와 상자를 손에 쥐었다.
“뭔지 한번 볼까.”
뭐가 있는지는 궁금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쉽게 얻어진 만큼 보상의 질도 낮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데. 상자 안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 들어 있었다.
“꾸우우-.”
묘한 소리를 내는 괴이한 생명체.
이건.
“……크라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