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103화
103화 화이터 (1)
처음부터 배에는 강력한 환각이 작용 중이었다.
환각을 깨트릴 만큼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자각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미 배의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어둠의 반지에 담긴 죽음의 힘이 환각의 일부를 벗겨 냈다.
그렇기에 흉상이 드러나기도 전에 배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바에 들어오고 다칼과 함께 맡았던 지독한 냄새 또한 그 때문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후읍~.”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최대한 담백하게 노래의 첫 소절을 불렀다.
“폭풍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치는 밤~.”
LP플레이어에서 들려왔던 음악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직 광기 서린 웃음과 비명 혹은 절규의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LP플레이어로 흘러나왔던 음악을 떠올려 가며 가사를 전달했다.
한 소절, 한 소절…… 쪽지에 적힌 그대로. 최대한 마음을 담아 외쳐 본다.
비록 가사처럼 술 한 잔을 기울이지 못하고, 이 노래를 만든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으니 그럭저럭 상황을 재현한 기분이 들었다.
“키하아아-!”
무대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는 해골들, 일명 씨로버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우우우!”
-녀석들은 내게 맡겨라!
다칼이 나서서 가까이 접근하는 씨로버들을 상대한다.
나는 그저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고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가사의 삼분의 일을 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과연 계속 부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의심의 싹이 튼 것이다.
하지만 오르골 박스는 발동 조건이 걸려 있는 상태이고 현재 내게 주어진 건 쪽지가 전부였다.
그렇다면 쪽지에 적힌 내용대로 쫓아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길을 방황하고 있을 때는 행동으로 옮겨보는 것이 최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다 새로이 단서를 찾아내면 좋은 것이고 혹여 발동 조건이라도 충족시킨다면 더욱 좋고 말이다.
노래의 가사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식탁으로 올라가서 소리쳤다.
“다들 등신같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남자는 싸움에 위축되어 있는 이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언데드 처음 봐!? 처음 보냐고!? 그렇게 쫄 필요 없어! 그냥 상황이 반전된 것뿐인데 시발! 그냥 밀어붙이라고! 닥치고 밀어붙여!”
그저 말뿐인데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위축됐던 등반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침착히 대항을 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던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의 얼굴을 보고 바로 못 알아챘지만 싸우는 무기와 스타일을 보고서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묵직한 랜스를 내뻗을 때 팔을 비틀어 회전시킨다.
“쿠확!”
강한 회전력이 담긴 찌르기 공격은 씨로버를 단번에 찢어 버렸다.
그는 철혈의 기사 안철호.
중층부까지 오른 실력이 뛰어난 사내였다.
무엇보다 변화에 빨리 적응하며 잘 꺾이지 않는 의지는 수많은 등반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확실히 달라.’
싸움 실력도 좋지만, 방금 전 그의 외침에는 파이팅이라는 단어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담겨 있었다.
나도 순간 혈기가 끓어올랐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다.
대사에 감동해서? 아니다.
철혈의 기사가 가진 고유스킬 압도하는 용기였다.
“크하아아앙!”
다칼도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몸집을 부풀려 제대로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씨로버들도 만만치가 않았다.
단단한 맷집, 빠른 재생력, 어둠에 강한 내성을 보였다.
어둠 속성을 가진 다칼에겐 천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서로의 힘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천적도 무의미했다.
다칼은 한 번 공격을 내지를 때마다, 씨로버 여럿을 단번에 정리해 버렸다.
치잉!
씨로버가 소멸한 자리에는 검붉은 덩어리가 떨어졌다.
녀석들을 처리하면 나오는 블랙 소울이었다.
소울의 개수를 많이 모을수록 씨로버가 가지고 있던 일부의 힘을 거머쥘 수 있는 20층만의 고유 아이템이다.
등반자들은 아직 저게 무엇인지 몰라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아이템인지 알게 되면 서로 저것을 가지기 위해 사투를 벌일 터다.
다행히도 그들이 알아채기 전에 다칼이 어둠을 사용해서 블랙 소울을 하나씩 회수 중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가사의 끝인 ‘그렇게 황혼이 저물어 가네.’를 불렀다.
“후우~.”
노래가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다.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방법은 아닌 모양이다.
“젠장. 괜한 헛짓거리였나.”
나는 씨로버들과 싸우고 있는 강예지를 쳐다봤다.
저 여자한테 점을 봐 달라는 방법밖에 없나 싶었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바에 스산한 공기가 덮쳤다.
우어어어-
[바에 떠도는 영혼들이 당신이 부른 노래에 반응합니다!]
[황혼의 오르골의 ‘발동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달칵!
가지고 있던 오르골 박스가 저절로 열렸다.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음악은 LP플레이어에서 들었던 음악과 똑같았다.
다만 거기에 목소리는 담겨져 있지 않았다.
구어어-
바를 가득 채운 영혼들의 소리는 어딘가 구슬퍼 보였다.
“케에에에!”
“그하아아!”
그리고 아직 소멸하지 않은 씨로버들은 오르골 박스의 음악을 듣더니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뭔지 모르지만 빈틈이야! 쳐!”
등반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씨로버들을 처단해나갔다.
지지지징- 툭!
그런데 잘만 흘러나오던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는 이어서 필름이 씹힌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필름 씹히는 소리는 어떤 이의 절규로 바뀌었다.
“구허어어!”
씨로버들이 그에 반응을 보였다.
스아아-
이내 오르골 박스에서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파삭! 소리와 함께 물건이 박살이 나버렸다.
동시에 부서진 박스 안에서 새어 나온 대량의 연기!
연기는 곧 살아 움직이듯 어떤 형태를 갖춰 갔다.
“그하하하!”
웃음소리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지더니, 연기 속에서 한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정장과 마이크를 손에 쥔 해골은 두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본 적 없는 놈이지만, 본능적으로 녀석이 황혼의 노래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확인이라도 해 주듯 시야에 메시지가 떴다.
[황혼의 오르골에 잠들어 있던 화이터를 깨웠습니다!]
“죽음을 그늘에 진 자들이여! 일어나라!”
죽어 나간 등반자들의 몸에 바에 떠도는 영혼들이 스며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넋을 달래지 못한 자들이여! 맘껏 날뛰어라!”
“쿠허어어!”
남아 있던 씨로버들이 광분을 하며 전신에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챙!
“어……?”
변한 씨로버는 등반자가 내지른 일격에도 전혀 끄덕하지 않았다.
다른 등반자들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공격이 안 통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등반자들이 녀석들을 물아붙이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크흐흐흐.”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씨로버들이 기세등등하게 등반자들에게 접근했다.
용기가 넘치던 이들도 겁을 먹어 뒤로 물러선다.
단번에 전세가 역전이 되었다.
[숨겨진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화이터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수많은 씨로버가 부활하였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더욱 많은 씨로버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 전에 화이터를 처치하십시오.]
방금 전의 메시지는 주변에 있는 이들도 전부 보았을 것이다.
히든피스를 얻어 낼 기회를 만든 것은 나인데.
그 기회를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화이터를 탐내는 강예지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바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강해져 버린 씨로버들이 그녀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 온다고 해도 그녀는 화이터의 손끝 하나 대지 못하리라.
그 전에 나만의 공간으로 데려갈 테니까.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가 이 싸움을 주시합니다.]
한동안 조용하던 양반이 화이터와의 싸움에는 관심을 두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해당 이벤트가 발생한 건 탑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까.
최초로 화이터를 처치 후, 최초로 황혼의 오르골을 얻었고, 그를 통해 이벤트가 발생했다.
매번 보던 것들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으니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풍요를 품은 술의 도취자가 이 싸움을 주시합니다.]
[힘을 중시하는 자가 이 싸움을 주시합니다.]
[힘을 숭배하는 자가 이 싸움을 주시합니다.]
…….
…….
내게 호의를 품은 신좌들뿐만 아니라 적대를 하던 신좌들 또한 이 싸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지금의 상황에 집중했다.
아공간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어, 곧장 땅을 내리찍었다.
다크포스.
빠르게 퍼져 나가는 어둠!
[주변이 어둠으로 잠식됩니다.]
나와 화이터를 제외하고 공간에서 전부 밀어내 버렸다.
[어둠의 반지 조건부 효과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효과 ‘고속 캐스팅’이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완전한 어둠에 갇힌 화이터는 끌끌 웃어 댔다.
아무리 녀석이 죽음과 가깝다고 해도 어둠에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내 웃음을 멈추고 말을 잇는다.
“그쪽이 날 해방시켰군, 마도사.”
“마도사라 불리는 건 오랜만이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해방을 시켜 준 보답이다!”
“물러나기 싫다면?”
“크하하하! 자신만만하구나. 하긴. 마도사 놈들은 원래 제 놈이 제일 잘난 줄 알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어둠에 가뒀다고 하여 끝이 난 것 같은가? 이까짓 결계 따위에!”
화이터가 마이크를 들어 고음으로 소리쳤다.
동시에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어둠에 파도의 물결이 일어났다.
마치 어둠이란 두꺼운 옷을 벗겨 낼 것처럼 충격파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어둠의 공간은 벗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화이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왜? 생각한대로 잘 안 되나 보지?”
나는 지배력을 끌어 올려 서서히 녀석을 압박했다.
꿈틀대는 어둠이 녀석의 몸을 집어삼키려고 한다.
“이런 어둠 따위이이이!”
그는 마이크로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내어 엄청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녀석을 집어삼키던 어둠이 주춤하는 기세를 보였다.
“크윽.”
그리고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이상한 환청이 들려오는 경험을 했다.
누군지도 모를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귀의 달팽이관이 찢기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몸의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귀를 막아야 할 것 같다.
어둠을 끌어와, 두 개의 작은 어둠을 귀마개처럼 만들어 귀에 꽂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크볼트.
콰앙! 콰아앙!
[올랜드 마나 반지 조건부 효과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법의 시전 시간이 감소합니다!]
이미 고속 캐스팅이 발동한 상태에서 마나 반지 효과가 터져 시전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초마다 다섯 개가 넘는 검은 구체가 생겨나 녀석에게로 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화이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방어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밀어내면서, 가해지고 있는 마법들을 전부 막아 내고 있었다.
“황혼을 이겨 낸 나를 고작 이따위 걸로 죽일 수 있을 성싶은가!”
화이터가 한쪽 팔을 들더니 이내 허공에 휘저었다.
검붉은 긴 종이가 생겨나, 그 안에 음표들이 새겨진다.
잠시 후 음표들이 종이에서 떠나 내게로 날아들었다.
한데 음표의 색깔이 전부 달랐다.
특히나 노란색 음표는 날아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차아앙!
“큭!”
기어코 마지막엔 노란색 음표가 날아든 것을 보지 못했다.
음표는 배지로 발동 중인 보호막을 부순 것도 모자라 가슴 위로 뻗고 있던 한쪽 손을 강타했다.
얼얼하다 못해 끼고 있던 반지에 큰 충격이 갔다.
충격을 받은 반지는 다름 아닌 삼신용의 반지.
내구성이 좋아 우려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방금 전의 공격으로 어떤 변화가 일었다.
반지의 뿔 중에 하나가 노란빛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파직! 파지직!
팔과 손을 휘감는 전기!
따갑다거나 뜨겁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파크가 튈 때마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윽고.
콰가가가가가!
팔과 손을 휘감던 전기가, 하나의 번개가 되어서 화이터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