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96화
96화 특급 용병
폭풍의 칼날이 인형들을 갈가리 조각냈다.
하늘로 솟구치는 하얀 솜털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인형들이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들었다.
걔 중에는 비수를 들고 있는 인형도 있었다.
다크스윔.
나는 거리를 좁혀 그들과 마주했다.
루시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크소드.
지이잉-
칠흑으로 덮인 검을 소환해 비수를 들고 있던 인형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기습을 해 온 이들 중에는 가장 강한 놈이었으나 검의 속도를 쫓아가지는 못했다.
서걱!
금방 머리를 내주었다.
살아남은 잔당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자 냅다 도망쳐 버렸다.
하나, 단 한 놈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로사의 비수를 회수하며 소환된 검으로 나머지 잔당들을 추격했다.
[베디돌을 처치하였습니다.]
[처치 수가 올라갑니다!]
[베디돌을 처치하였습니다.]
[83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처치 수가 올라갑니다!]
[베디돌을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특급 용병으로 승급합니다!]
[등급이 최고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업적을 달성합니다.]
[특별보상이 주어집니다.]
[50,000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잔당을 처리하는 과정에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특급 용병!
10일만에 이룬 성과이다.
평균적으로 미션이 진행될 때마다 특급 용병을 달성하는 인원은 아예 없거나 하나 정도다.
그만큼 특급을 달성하기란 어려웠다.
물론 회귀 전에도 특급을 달성하긴 했지만 그때보다 승급이 빠르다 보니 저절로 기쁨도 배가됐다.
단순히 난이도가 더욱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귀 전의 나를 이겼다는 감정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보상이 크다는 이유였다.
특급 용병을 달성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후에도 베디돌들을 처치하면 미션 보상의 질도 높아진다.
그 기회를 더욱 빠른 시점에 얻은 것이니 보상도 더욱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을 터.
특히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여왕 로사까지 처치를 하게 되면 어떤 보상이 내 손에 쥐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곧 하늘에서 눈이 내리듯 솜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위를 쳐다보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내렸다.
“……대체 넌 누구지? 이봐!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들려. 그러니까 떽떽거리지 말고 말해.”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이 상황이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대! 내가 누구인지 알면…….”
“뭐. 여왕님이라고 불러 드려? 그런 건 다른 놈들한테나 많이 해 달라고 하고 우리 본론만 얘기하지.”
“사태를 보니 그댄 날 구하러 온 것 같은데. 하는 말은 마치 동네에 돈을 뜯으러 온 양아치같구나.”
‘이 여자 보소. 말에 가시가 있네.’
아무래도 사태 파악을 진지하게 해 드려야 할 것 같다.
나는 로사의 비수를 그녀의 눈앞으로 겨누었다.
“흐윽!”
그러자 루시아는 질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뺀다.
아예 뒤로 물러나질 않은 것을 보면 아직은 몸이 자유롭지 못했다.
“네놈도 날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나!”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니지만 대답여하에 따라서 그리될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안을 하겠어. 이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너도 원인은 알고 있겠지?”
“로사, 그년이 기어코 일을 저지른 것이지.”
“난 로사를 죽일 생각이다. 그러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지.”
“무얼 말하는 것이지?”
“설마. 내가 비밀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놈 품속에 가지고 있는 비수.”
루시아가 아래를 힐끗 내려다봤다.
“알면 그냥 빼앗아 가면 될 것을.”
“시험할 생각이면 관두는 게 좋을걸? 그쪽이 죽이기로 마음먹지 않은 이상 비수의 힘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그걸 어떻게……!”
놀람으로 번져 있던 그녀의 표정이 곧 진중함으로 바뀌었다.
“대체 넌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너한테 선택지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게 중요하지.”
“뭐라? 한 가지?”
“첫째. 그쪽이 먼저 죽기 전에 내게 비수를 넘겨 로사를 죽이는 것.”
“내가 만일 그 말에 따르지 않겠다면?”
“그럼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살기를 드러내며 비수를 목에 더 가까이 뒀다.
살짝 피가 흘러내렸다.
“……그대. 진심이군.”
“내 목적은 베디돌을 죽이는 것이지. 하지만 굿돌이라고 해서 무작정 죽이지 않는 건 아니야.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원인이 된 자를 죽이는 수밖에. 여왕이니 용병들의 특성을 잘 알겠지.”
루시아는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선택권 따위 없었다.
“좋다. 비수를 넘기지. 하나,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은 몸을 움직이지 못해 직접 건네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대가 직접 가져가라.”
“그러지.”
등가교환 마법으로 곧장 회수하려는 그때.
촤륵!
어디선가 어둠으로 된 채찍이 날아와, 그녀의 품속에 있는 비수를 회수했다.
누가 회수해 갔는지 딱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다칼.”
“아우우우우!”
뒤에서 다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온 거야?”
-혼자서 산책을 좀 했지.
다칼은 회수한 루시아의 비수를 내게 넘겼다.
이로써 두 개의 비수를 전부 가지게 된 셈이다.
나는 루시아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아. 경고하는데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일 로사를 찔렀는데 죽지 않으면 그때는 네놈의 목숨을 취해 갈 테니까.”
“건방진 것, 내가 몸만 움직일 수 있었다면 네놈은.”
“착각도 유분수지. 몸이 자유로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왠지 이대로 가 버리면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조금 더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 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그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머리 위엔 손을 왜 올리지? 그 더러운 손을 치워라!”
등가교환.
우우웅-
몸에 걸려 있던 저주를 풀었다.
마나가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주가 이미 사라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크게 소모를 하진 않았다.
“어?”
갑자기 몸이 자유로워진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몸이 자유로워졌으니 어디 마음대로 해 봐.”
“하! 그대가 이 저주를 푼 것인가? 아주 멍청한 짓을 했군!”
루시아는 자신감으로 차 있던 만큼 곧바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선에서 정리를 하는 것도 아닌 다칼에게 정리가 되었다.
“이거 놔라! 놔아!”
보통 늑대 몸집으로 그녀를 제압한 다칼은 여유로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어리석고 이기적일 수가. 자길 구해 준 은인도 몰라보고 이렇게 무작정 달려들다니. 그리고 자길 위협하는 자를 대신 죽여 주겠다는데.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하지 마. 때론 이해하지 말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있는 거야. 이만 풀어 줘.”
속박에서 풀려난 그녀가 차갑게 날 바라봤다.
그러나 나와의 차이를 깨달은 듯 이전 같이 덤비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겠지. 그럼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 거야.”
“재수 없는 놈.”
“칭찬으로 듣지.”
이제 루시아는 마음을 확고히 다질 것이다.
아님 자신이 죽게 될 테니.
나는 그 자리에 루시아를 내버려 둔 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따라온 다칼을 보며 마나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준비해.”
“크응?”
-무엇을 말인가?
바닥에는 검은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뒤늦게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다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난 빼 줘라! 따로 걸어가겠다!
도망치려는 다칼을 붙잡았다.
“아니지. 갈 때는 같이 가야지.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공간이동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니까. 애초에 공간이동을 사용하려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대량의 마나가 필요할 테고.”
로사의 궁전은 걸어가려면 거리가 꽤 된다.
뿐만 아니라 입구부터 들어가는 구조도 복잡하고 함정도 귀찮을 정도로 많이 존재했다.
만일 그런 걸 최대한 씹고 단축해서 갈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럼 간다!”
“캬하아아아!”
-안 돼에에!
나는 등가교환 마법을 통해 다크스윔의 레벨이 높아지면 시도할 수 있는 장거리 이동을 시작했다.
이는 어둠이 되어 매우 빠르게 이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이동과는 전혀 다른 마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레벨의 마법을 등가교환으로 시전하는 만큼 마나 소모 또한 컸다.
이전이었다면 마나가 부족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이라면 달랐다.
* * *
죽은 인형들이 잔뜩 박제되어 있는 비밀의 공간.
로사는 사람 키 높이 정도 되는 기둥 위에 올린 구슬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쾅! 소리를 내며 구슬을 으깨 버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일 하나 똑바로 처리하지 못해서는!”
루시아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오랫동안 준비했건만,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실패의 요인으론 수하들의 무능함도 한몫했지만, 가장 문제는 변수로 등장한 한 남자 때문이다.
“인상착의가 테디가 말했던 것과 아주 똑 닮았어. 내 애기들을 죽이고 다닌 것도 모자라 감히! 내 계획까지 방해해!?”
로사는 자신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며 악! 소리를 질렀다.
“하아~ 하~ 흐흐흐. 하하하!”
이젠 아예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웃더니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다.
“내 계획을 방해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톡톡히 알려 주겠어.”
로사는 밖에 서 있을 자신의 충신을 호출했다.
덜컹! 끼이이…….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철문이 열린다.
충신이 들어온 줄 알고 로사는 말했다.
“아가, 지금 당장 십단을 불러들이거라. 그리고…….”
“십단은 아무리 호출해도 오지 않아.”
충신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사는 싸한 눈빛으로 뒤로 돌았다.
그곳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분명 구슬을 통해 봤던 그 남자와 동일 인물이었다.
“네놈이 여길 어떻게…… 분명 지금 연회 장소에 있어야 할 자가. 분신이라도 보낸 것인가. 아니. 그보다 십단이 호출해도 오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지. 내 손에 전부 죽었으니, 네놈이 호출을 해도 지옥에서나 받겠지.”
“십단을 전부 죽였다!? 하! 재밌는 말을 하는군.”
십단은 베디돌들이 모여 만들어진 열 개의 집단을 말한다.
숫자만 해도 수백은 될 터인데, 그런 집단을 다 처리했다니.
하지만 남자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것이 분신이 아니라면 그 사이에 이곳까지 다다랐다는 뜻이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녔으면 십단을 처리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로사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심한 경계심 때문도 있지만 그의 손에 들린 비수 때문이었다.
저 비수가 있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칫! 내 계획이 되레 내 목을 찔렀구나.’
감정적인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로사는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비록 상대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가졌다고는 하나, 저 무기를 가진 놈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럼 자신의 것을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루시아의 것까지 얻게 된다.
‘저자가 설사 진짜이고 십단을 전부 죽였다고 해도 겨우 그 뿐이지. 나한테는 안 될 것이야. 오히려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고 봐야겠군.’
기이한 미소를 짓는 로사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주특기는 마법.
화아악!
무엇이 꿰뚫어 불태울 것 같은 불화살이 공중에 형태화되어 나타났다.
화아악! 화아악!
점차 개수를 늘려 나간다.
“흐흐흐!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게 해 주지!”
로사는 준비한 불화살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푸욱!
“어딜 보고 쏘는 거지?”
남자의 음성이 귓가로 들려왔다.
그리고 복부로부터 시린 감각이 전해졌다.
“끄어억.”
곧장 뒤로 물러난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복부에 박힌 비수가 보인다.
루시아의 비수였다.
‘대체 언제 이동을…….’
그가 가까이 접근하는 동안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
두 다리를 지탱하던 힘이 빠르게 사라져 간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온몸에 힘이 풀린 로사는 기어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젠자앙…….”
차디찬 바닥에 머리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