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93화
93화 충돌 (1)
복도를 지나며 하루토는 최근에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청소를 하여 파편은 남지 않은 듯하지만 벽과 바닥이 부서진 흔적은 그대로 남았다.
‘그러고 보면 이 진료소의 의사가 전 블러디타이거 수장이었지.’
지금은 완전히 손을 씻고 살아간다고 듣기는 했지만, 어떤 놈이 됐든지 간에 과거를 아예 끊어 내버릴 수는 없다. 끊어진 것 같아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게 과거이다.
‘과거에 척을 졌던 적과 싸움이 있었나? 아님 환자들 간에 싸움? 그것도 아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면 하루토는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쳐다봤다.
어떤 여자가 발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온다.
곧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싸늘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긴 인형들만 치료하는 곳이야. 그러니까 치료를 받을 거면 다른 데 알아보고 이만 꺼져.”
“초면에 말이 험하네.”
슥-
어느새 단검을 목에 겨눈 그녀가 말을 잇는다.
“왜 더 험하게 다뤄 줘?”
“워어! 진정해. 누군가랑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치료를 받을 생각도 없고.”
“그럼, 네놈도 크렉스한테 따로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놈이야? 만일 그런 거라면 그냥 보내 주기 어려운데.”
목에 칼끝이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토는 물러서지 않고 되레 두 눈을 빛냈다.
“방금 크렉스를 찾아온 자가 있다고 했어!? 그게 누구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입 다물어!”
“워우!”
그녀가 칼끝을 움직이고, 하루토의 목에는 피가 흘러내린다.
그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크렉스를 노리고 온 것도 아니야. 그저 알고 싶은 거지.”
“뭘? 여길 찾아온 그 새끼에 대해서?”
“그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창고가 있어. 거기서 난 화재와 연관돼 있는 걸 혹시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거지.”
“그러고 보니…… 그쪽 닮았어. 신문에 나온 어떤 남자랑.”
며칠 동안 씻지 않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하루토는 꼬질꼬질해진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봐! 꼴은 이래 보여도, 그 신문에 나온 남자. 나 맞아. 자세히 보라고!”
여자는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이내 무기를 거두었다.
“진작 말을 하지.”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으면서…….”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둘은 초면임에도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화재를 일으킨 범인을 찾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여자는 갑자기 화가 솟구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 있어, 그 범인놈.”
“알고 있다고!? 그게 누구야! 혹시 키는 크고 머리는 흑발에 외형과 체구는 동양인에 옆에는 새끼 늑대를 데리고 다니나!?”
여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미 알면서 물어본 거였어?”
“역시……!”
하루토는 자신의 감이 맞았다는 걸 증명받아 기쁜 듯 크게 좋아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는 뒤늦게 시선을 눈치채고 감정을 추스렸다.
“크흠!”
“갑자기 혼자서 왜 난리 부르스를 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 인간을 잡을 생각이라면 우습게 보지 않는 편이 좋아.”
여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도 힘만 있다면 당장에 가서 패 죽이고 싶지만 지금의 상태로 다시 만나면 필히 죽겠지. 그러니 그쪽도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하루토 역시 표정이 굳히고 물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자의 이름은 김유림.
대략 사흘 전에 이 진료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아떨어지는군.’
화재가 났던 날.
하나같이 똑같은 증언을 한 것이 있다.
갑자기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났다는 것.
대체 그게 무슨 신호인가 추측만 난무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다.
블러디타이거의 전 수장 크렉스가 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피리를 분 것이었다.
그걸 유도한 게 여관에서 만났던 그 남자.
이준석.
처음 만났을 때 의심은 됐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어 넘어갔었는데.
결국에는 그가 블러디타이거를 전멸시킨 장본인이자 화재 사건의 주범이었다.
그런데 그를 잡아들일 생각을 하니, 절대로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일선에서 떠났다고 해도 한때 전 수장을 맡았던 크렉스를 쉽게 제압했어. 그 뿐이 아니라 김유림, 저 여자도 꽤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것 같았는데. 그녀도 쉽게 제압을 당했다고 했지.’
이외에도 전부 끌어모은 블러디타이거들을 혼자서 토벌했다는 점도 참고해야 했다.
‘여태 만나온 자들과는 달라. 무턱대고 덤볐다가 이쪽이 당한다.’
이내 하루토는 진료소를 나오며, 저스티스 길드원 모두를 소집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 있으면 여왕 루시아의 생일이다.
듣기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연회가 열린다고 들었다.
“선물로 무얼 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루토는 미소를 지었다.
마침 가장 좋은 선물로 무얼 줄 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 * *
나는 몸이 두 동강이 난 트롤 인형 둘을 무심히 내려다보곤, 속닥거리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봤다.
“둘을 순식간에 정리했어.”
“용병이야, 보지 마. 괜히 다칠라.”
길 한복판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까이 있는 인형들이 몸을 흠칫하거나 도망을 쳤다.
왼쪽 어깨에 앉아 있던 다칼이 그것을 보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뻐서 웃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베디돌을 처리하는 건 저들에게도 이로운 일이거늘. 어찌 취급은 베디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군. 목숨을 먼저 위협한 것도 저들이건만.
“냅 둬. 어차피 한번 뿌리박힌 인식은 바꾸기 어려워. 굳이 바꿀 생각도 없고.”
인형들이 용병을 좋지 않게 본다는 건 여기서 며칠만 지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인식을 심는 데는 용병들이 한몫했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기습을 해 오는 놈들 전부 주변의 환경은 신경 쓰지도 않는군. 대범해졌어.
“내 목에 현상금을 올리기라도 했나 보지. 나야 그래주면 땡큐지만.”
블러디타이거를 전멸시키고 놀이공원에 있는 베디돌들을 모조리 소탕.
그 이후에도 곳곳에 숨어 있는 집단들을 하나씩 털고 다녔다.
그러하다 보니 모든 베디돌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로사의 귀에 내 얘기가 안 들어가려야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예상한대로 수많은 베디돌들이 합세하여 나를 죽이려고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결과.
불과 일주일 만에 480마리가 넘는 베디돌을 처리했다.
방금 전에 둘을 처리한 것까지 치면 482마리.
앞으로 열여덟 놈만 처리하면 특급 용병으로 승급이 가능했다.
이는 회귀 전보다 거의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이제 곧이네.’
음지의 여왕 로사에게 닿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곧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린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길을 걷는다.
한 5분쯤 걸었을까.
“어서 오세요~!”
사슴 인형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여관에 들어섰다.
근처서 대기하고 있던 여관주인 레인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오늘은 드레스가 아닌 셔츠와 재킷,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준석 씨! 어디 갔다 오세요?”
레인은 손에 들린 것을 보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빵 사 오셨구나. 빵이라면 저희 여관에도 있는데…….”
은근슬쩍 여관의 빵을 홍보하는 그녀이다.
“빵은 바깥 게 맛있어서.”
“엄청 솔직하시네. 그래도 가끔씩 저희 빵도 이용해 주세요. 특히 소보로빵, 그건 바깥 거랑 비교해도 맛이 괜찮을 거예요.”
“생각나면 먹어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레인을 지나 향한 곳은 방이 아닌 카페였다.
빵에다가 커피를 곁들여 먹으면 그것만큼 든든한 식사가 없다.
카페에는 웬일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카운터의 빈자리로 가서 곧바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림을 가지는 동안 봉지 안에 담아 온 빵을 꺼내 먹었다.
“으음~.”
겉면에 하얀 가루가 뿌려져 있고 안에는 밀가루밖에 없는 빵인데, 매우 맛있었다.
“캬항!”
다칼도 사 온 빵이 마음에 드는지 빵을 두 개씩 집어 마구 먹어 댔다.
“커피 나왔습니다.”
아직 입 안에 빵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커피를 들이켰다.
순간, 빵과 커피가 조화롭게 섞여 살짝 목이 막히게 만들던 빵을 부드럽게 만들고, 커피의 씁쓸하고 단맛이 밀가루와 함께 새로운 맛을 만들어 냈다.
커피는 대체 누가 만들어 냈는지, 정말 틀림없는 대단한 역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빵과 커피를 입 안에 넘겼다.
그러다 보니 슬슬 배가 불러온다.
나는 배를 툭툭 치며 문질렀다.
그리고 빵을 제외한 채 커피만을 홀짝였다.
자기 것을 다 먹고, 남은 내 것까지 탐하는 다칼이 혀에 빵을 가져가며 전음을 전했다.
-지금쯤 그대라면 눈치챘겠지.
잔을 입에서 뗀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응.”
-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놈들이 안 그런 척하지만 널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잔을 쥐지 않은 손이 무기 근처에 겉도는 걸 보면 언제든지 널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동행자여. 저들이 왜 그댈 노리는지 알고 있나?
“짐작 가는 것이 있지.”
가리고 있지만 가슴에 새겨져 있는 파란색의 J이니셜 마크.
저것은 저스티스 길드만의 마크였다.
지금 상황에서 저스티스 길드원들이 날 노린다는 건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생각보다 빨리 알아냈네.’
하루토. 그자가 화재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칼은 여전히 빵을 입에 문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지? 여기서 난리를 피우면 더 이상 이 여관에서 못 지내게 될 텐데.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어.”
“예……?”
바리스타 직원이 자신에게 말을 건 줄 알고 대답했다.
“그쪽에게 말한 거 아닙니다.”
“아, 예.”
그러자 그는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럴 수밖에 지금 혼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일 테니까.
-그럼 밖으로 유인하는 게 어떤가? 저들도 당장에 이곳에서 싸울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일을 망치면 여관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괜히 세이피의 영역에서 싸워, 그녀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다칼이 빵을 다 먹고 난 뒤, 그 이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름 아닌 하루토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멈췄다.
“오랜만입니다, 이준석 씨.”
“사토 하루토 씨.”
그는 완전무장을 한 채로 나타나 내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마치 전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듯이. 하루토는 메마른 입을 달싹이더니 서론에 들어갔다.
“제가 전에 물어본 적이 있죠. 숙소를 들르기 전에 뭘 했냐고.”
“으음. 그쪽이 취조하듯이 물은 거라면 기억납니다.”
“그때 준석 씨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빵을 사 먹고 도시를 좀 둘러본 게 다라고. 그쪽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날 발밑에 발견된 잿더미를 보고도 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것만으로 화재를 일으킨 범인이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증거가 너무 허약했죠. 근데. 조사하는 과정에 확실한 증인을 확보했습니다.”
아마 크렉스 아님 김유림이라는 여자, 혹은 그 진료소의 환자들일 수도 있다.
근데 꼭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얘기해야 하나 싶다.
어차피 날 잡아가기 위해 길드원들을 끌어모았으면서.
그래서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길게 얘기하지 말고 본론만 얘기합시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결론은…… 당신이 그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겁니다. 블러디타이거를 처리한 건 어차피 그들은 베디돌이니 상관없지만. 개인 소유지를 불태운 건 엄연히 불법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이 가 주시죠.”
“불법? 여왕이 정한 법을 말하는 건가? 아니지. 애초에 탑에서 법을 따지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개인의 도덕성이라면 몰라도. 한쪽에 편향된 법은 법이 아니라 독재일 뿐이지.”
루시아는 양지에 있는 여왕이라고는 하나, 그다지 좋은 여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로사와 만만치 않은 패악을 가지고 있었다.
“여왕이 정한 법이라 할지라도, 그런 규율이 존재하기에! 사람과 인형이 안심하고 이곳에 지낼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진지하게 소리쳤다.
만약 저게 진심이라면 여왕에게 반해 제대로 세뇌를 당했거나 아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연기였다.
여왕을 사랑했다면 회귀 전에 절대 위층에서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안심은 개뿔.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패악이 도사리는데.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이지. 그리고 완전하게 안전한 곳은 세상에 없어.”
“준석 씨는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시는군요.”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아무튼 저와 가 주셔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쪽을 안 따라간다면? 어떻게 할 거지?”
하루토가 허리에 손을 가져간다.
손 근처에는 검이 든 칼집이 있었다.
“그럼.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