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86화
86화 블러디타이거 (2)
삐이이-
음울하며 공포스러운 소리가 진료소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래서일까?
진료소에 있는 인형 환자들이 몸을 잘게 떨었다.
나 또한 저절로 온몸에 닭살이 올랐다.
피리에서 붉고 보란 기운이 담배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크렉스의 두 눈도 혼연일체가 된 듯 두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뚜벅. 뚜벅. 뚜벅.
이내 크렉스가 진료소 밖으로 이동했다.
“안 돼에! 크렉스, 하지 마!”
정신을 차린 김유림이 말려 보지만 소용없었다.
크렉스는 두 어깨를 움찔하기만 할 뿐, 걸음을 계속해 거리를 배회했다.
잠시 후. 조용하던 골목에 작은 울음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마치 피리 소리에 응하듯이 점차 다양하게 울음소리로 늘어 갔다.
블러디타이거.
수년간 피리가 불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부름에 호응하고 있었다.
내 입꼬리도 절로 올라갔다.
단번에 백이 넘는 숫자의 베디돌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 누가 웃지 않으랴.
이윽고 피리 부는 것을 멈춘 크렉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신 사용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그 약속을 깨 버렸군.”
후회가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다.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앞으로 그걸 다시 사용할 일은 없을 거야. 블러디타이거는 오늘부로 해체될 테니까.”
“해체…… 크하하! 크하하하핫!”
크렉스가 갑자기 넋이 나간 듯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쪽이 용병인 것은 진즉에 눈치챘지만, 방금 그 말은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당신네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힘으론 블러디타이거 녀석들을 전부 상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도 그 녀석들이 한 번에 덤비면 이기질 못하거든요.”
“손을 털었다면서 블러디타이거에게 가지는 신뢰가 대단하네.”
“신뢰가 아니라 곁에서 봐 왔기에 잘 알고 있는 거고, 또한 블러디타이거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 내 눈엔 마치 그 집단이 없어지길 바라지 않는 놈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은근히 마음속 한편에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
“지금 뭐라 했습니까…….”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크르르르……!”
다시금 이빨을 드러냈다.
나는 크렉스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멍청하기는…… 또 덤볐다가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으면 관둬.”
크렉스가 진료소 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이내 분노한 감정을 추스르고 이빨을 감춘다.
“하아~ 전 그쪽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렸습니다. 약속대로 진료소와 유림 씨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러지.”
“저쪽으로 길을 쭉 걷다 보면 찢긴 깃발이 있는 거대한 창고가 있을 겁니다. 거기가 블러디타이거가 모이는 장소입니다.”
창고의 위치는 이미 가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휘익!
내가 휘파람을 불자, 진료소 안에 있던 다칼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이어서 김유림도 뛰쳐나온다.
“크렉스!”
그녀는 크렉스에게 곧장 달려가 괜찮냐고 물었다.
여전히 둘이 사랑을 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되지만, 남의 연애사이니 금방 관심을 꺼 버렸다.
“캬릉~.”
다칼이 점프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얻었나?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다칼과 두 눈을 마주했다.
“얻었지.”
-그럼 이제 다음에 할 일은 뭐지?
“뭐긴. 베디돌 녀석들을 소탕하러 가야지.”
* * *
블러디타이거 아지트.
가장 먼저 하이에나의 모습을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킁킁! 쿠르릉…….”
주변을 경계하며 냄새를 맡는 하이에나 인형은 수장 대신 블러디타이거를 이끌고 있는 카키였다.
곧 카키의 옆으로 또 다른 하이에나가 등장한다.
덩치가 4미터쯤 되는 카키보다는 덩치가 훨씬 더 작았다.
“카키 님, 먼저 와 계셨군요.”
카키의 오른팔격인 바릭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카키는 인사 따윈 안 받고 자신의 생각을 꺼내 들었다.
“쓰하아~ 아무리 봐도 수상하단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캬학! 멍청한. 호출 말이다. 호출!”
“아~!”
“다신 조직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떠나신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친 인형들을 치료하며 꾸준히 진료소에서 생활했지. 최근엔 이상한 여자까지 붙어서는 영영 안 돌아올 기세더니. 갑자기 호출을 했단 말이지…… 쓰릅. 냄새가 나지 않나?”
“킁킁! 납니다. 썩은 오물 냄새 같은데요?”
카키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바릭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쯧쯧. 답이 없는 새끼.”
퍽!
“깨앵!”
카키가 바릭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나가서 크렉스가 오는지나 봐!”
“아, 옙!”
저런 걸 오른팔이라고 데리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나, 블러디타이거 멤버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노란 악마 테디, 붉은 장미 로제, 외팔이 귀재 오스곤 등등 이름 있는 인형들이 속속들이 얼굴을 보였다.
그들이 한데 모여 관심을 가지는 건 크렉스의 복귀설이었다.
“갑자기 호출한 의미가 뭐겠어? 여기로 돌아오신다는 거지.”
“글쎄. 난 회의적으로 보는데. 이틀 전까지만 해도 진료소의 일에 집중하던 모습을 똑똑히 봤는데. 갑자기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웃기는 소리.”
“혹시 다른 누군가가 꾸민 함정은 아닐까?”
“멍청아! 피리는 수장만 사용할 수 있는 거 몰라?”
“아. 그렇군.”
복귀설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카키가 나서서 말했다.
“우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대비를 하는 게 좋겠지. 크렉스가 우릴 쓸어버릴 계획을 가진 건지도 모르니까.”
“흐하핫! 웃기네.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목을 따 버릴 자신이 있는데.”
붉은 장미 로제가 자신감을 내보였다.
카키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입을 뗐다.
“그러니 각자 주변을 경계해.”
“음바, 알겠다! 대장!”
“난 저쪽을 보지.”
“흐웨에~! 왠지 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은걸?”
네임드를 포함해 블러디타이거에 소속된 인형들이 창고 곳곳에 배치됐다.
하나 아무리 기다려도 크렉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카키가 안색을 굳히며 불만을 토했다.
“크헥! 제때 나타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그때.
“불이야! 불!!”
어디선가 불났다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카키는 창고 밖에서 치솟고 있는 불길을 발견했다.
“불로 창고가 포위됐어!”
이제 보니 한쪽 방향에만 불길이 치솟은 게 아니었다.
입구와 출구. 그뿐만이 아니라 창문이 있는 근처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이렇게 한순간에 갑자기?”
불이 천천히 피어올랐다면 이 지경이 되기도 전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밖에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불이 타오르는 속도가 말이 안 되었다.
퇴로를 모두 막아 버린 것 역시 의심을 증폭시켰다.
“크하아윽! 크렉스, 기어코 우릴.”
두 발로 서 있던 카키가 네 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창문을 깨부수고 불길로 뛰어든 카키는 밖을 나와 후각에 집중했다.
“안 나잖아?”
분명 근방에 크렉스의 냄새가 나야 하건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불을 지른 놈은 누구란 말인가?
“아아악!”
“으아!! 적이다!”
안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슥!
급히 안으로 되돌아갔다.
“이게 대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그런데 그새 경계를 서고 있던 블러디타이거 멤버들 절반 이상이 누군가한테 당한 상태였다.
남은 것은 네임드와 그나마 강한 축에 속하는 멤버들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어디선가 날아든 어둠의 공격에 몸이 절단 나고 있었다.
“어디야! 당장 나와!”
흥분해 소리를 지르던 카키는 뒤늦게 자신이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을 발견해 냈다.
‘인간? 그리고 늑대?’
낯선 두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녀석들이다.
그중에 인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캬학!! 제길. 용병인가! 어디서 보낸 거지? 대체 네놈들 누구야!”
이럴 때가 아니었다.
카키는 전투가 시작되고 나면 이 승부에서 승리할지 패배할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 능력이 이렇게 경고한다.
도망치라고.
그러나 카키는 능력이 보내오는 경고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간 이 능력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지금 여기서 물러나게 되면 블러디타이거의 대장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이 자리를 어떻게 쟁취했는데! 물러날 수는 없지!’
카키는 품에서 독을 품은 독니 칼을 꺼내 들고 인간에게 달려 나갔다.
“크헝…….”
인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갑자기 시야가 왜 이러지?’
목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옆으로 기울더니 이윽고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털썩!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추측되는 몸이 눈앞으로 쓰러지는 걸 목격했다.
잠시 후, 카키는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나큰 변수가 일어나고 말았다.
백이 넘는 거대한 조직이 단둘에게 와해되어 버리다니.
그동안 수많은 적과 용병들을 죽여 왔지만 이렇게 압도적으로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는 어쩌면 블러디타이거 조직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저 용병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일 누군가가 보낸 게 아니고 오직 베디돌을 잡는 게 목적이라면.
도시에 스며들어 있는 모든 조직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건 빨리 그분에게 보고를 해야…….’
유일하게 모든 조직 위에 서 계시는 그분.
인형들의 도시 로시아에 빛과 어둠이 있다면 어둠의 지배자인 그녀.
‘여왕님…….’
속으로 그녀를 애타게 불러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오직 죽음뿐이었다.
* * *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상급 용병으로 승급합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승급했다는 메시지를 쳐다봤다.
이곳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상급 용병을 달성한다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은 일.
회귀 전에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때는 아마 3일차쯤에 상급 용병을 달성했던 걸로 안다.
“캬항?”
-왜 저놈은 안 쫓지? 한 놈이라도 더 필요한 거 아닌가?
뒤처리를 끝내고 돌아온 다칼이 물었다.
나는 유일하게 창고를 빠져나가게 냅 둔 곰 인형, 노란악마 테디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한 놈이라도 더 필요하지. 그래서 풀어 준 거다.”
-응? 그게 무슨 소리지?
“혹시 로시아엔 두 지배자가 살고 있다는 건 아나?”
-알고 있다.
“양지에서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여왕 시아. 그리고 음지를 책임지고 있는 여왕 로사가 있지.”
-그런데 두 여왕의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저놈을 풀어 준 것과 관련이 있으니까. 방금 전에 풀어 준 놈은 블러디타이거의 네임드지. 그리고 네임드들은 전부 여왕 로사를 알고 있고.”
-그 얘긴, 로사에게 이 일의 보고가 들어가도록 일부러 풀어 줬단 소리군.
“그래. 로사에게 우리 둘의 얘기가 들어가게 되면 크게 경계를 하겠지. 하루아침에 조직 하나가 사라졌으니까.”
-그럼. 그녀가 우릴 처단하기 위해서 다른 조직을 이용하겠군. 그리되면 베디돌을 직접 찾아 나서지 않아도……
“잡을 수 있게 되는 거지.”
먹잇감을 찾아나서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진정으로 먹잇감을 잡는 건 스스로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이쯤하고 슬슬 여관방이나 잡자고.”
-아직 더 날뛰어도 된다. 체력은 충분해.
“마냥 밀어붙이는 것만이 답은 아니야. 템포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한 법이지. 당분간은 찾아오는 놈들이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한다.”
-흐음. 그대 뜻이 그렇다면 따르도록 하지.
앞으로 수많은 베디돌들이 우릴 노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내 최종 목적은 그런 조무래기들이 아니었다.
음지의 지배자이자 어둠의 여왕 로사.
그녀가 내 마지막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