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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탑 등반자-85화 (85/230)

회귀한 탑 등반자 85화

85화 블러디타이거 (1)

듬직하게 서 있는 다칼이 뒤를 슬쩍 돌아본다.

-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의 목을 뜯어 버릴 수 있다. 준석, 어떻게 할 셈이지? 저놈 이름을 아는 걸 보면 이미 회귀 전에도 알고 있는 놈 같은데. 어디 쓰임새라도 있는 건가.

“쓰임새라면 있지.”

당연하게도 크렉스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지 때도 녀석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날짜와 위치는 다를 지언정, 마주한 건 이 진료소이다.

만일 상대가 탑의 초대를 받은 등반자이거나 등반자들끼리 낳아서 태어난 탑의 거주민이라면 난이도와 관계없이 다신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각 난이도에만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이니까, 중복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하나 크렉스는 누군가의 손에 만들어진 인형. 동시에 생명력을 부여받은 특수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인형들을 주도하는 건 탑이었다.

오직 탑의 미션을 위해 존재하는 중복된 개체로서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걸어야만 한다.

일종의 게임 NPC와도 같았다.

다만 일방적으로 싸우기만 했던 몬스터들과는 달리. 대화가 통하며 때론 미션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는 눈앞의 크렉스는 앞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될 녀석이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크렉스가 다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그저 진료소의 한낱 의사일 뿐. 과거의 저를 찾는 거라면 잘못 찾아왔습니다.”

나는 다칼을 뒤로 물러나게 한 후 크렉스에게 한발 다가섰다.

“버린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이렇게 누군가를 돕는 의사가 된다고 하여 과거 블러디타이거 수장으로 활동할 때 한 짓거리들이 없어지는 게 되나?”

“……제가 저지른 짓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지만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절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나도 필요한 걸 얻으면 돌아갈 생각이었어.”

크렉스는 마치 무엇을 요구할지 두려워하듯,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죠?”

“우리보다 먼저 여기에 들어온 놈이 있을 거야. 일단 그놈의 목숨을 가져가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로 원하는 건 네놈이 가진 피리를 네가 직접 부는 거야.”

피리 언급에 녀석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대체 피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

‘골이 아프겠지.’

그것은 블러디타이거 소속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고급 정보였다.

피리는 비상 상황에서 블러디타이거 녀석들을 한데 불러 모을 수 있는 수장만이 가진 특별한 호출기였다.

나도 그 호출기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회귀 전, 아무 생각 없이 잡아들였던 블러디타이거 소속 베디돌이 자기 살자고 막 내뱉은 정보였으니까.

비록 지금의 크렉스는 블러디타이거를 떠났지만, 여전히 수장 자리가 공백인 상황에서 피리의 힘은 유효했다.

“으음…… 두 가지 모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그쪽이 오기 전에 진료소에 찾아온 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리 같은 건 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예.”

피리의 존재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라 날 기습적으로 공격했던 놈마저 감싸는 걸 보니 크렉스는 역시 그놈과 인연이 있어 보였다.

예상은 했다.

애초에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것 자체부터가, 여길 안전한 아지트라고 여겼다는 거니까.

‘보아 하니 두 개 다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하네.’

“할 수 없지. 여길 태우는 수밖에.”

크렉스가 굳은 얼굴로 발톱을 천천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다칼과의 기세 싸움에서 밀리며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하긴. 선택지가 없겠지.’

“크햐아아아앙!”

포효를 내지르며 두 앞발을 거침없이 휘두른다.

“다칼.”

부르기도 전에 다칼이 앞으로 뛰어나왔다.

“캬하아앙!”

“크르앙!”

호랑이와 늑대 싸움.

지구의 기본 상식에선 둘의 싸움에서 호랑이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다칼이 어디 보통 늑대인가?

신수종인 다크울프였다.

다칼은 어둠을 밖으로 표출해 그것을 자기 손처럼 이용했다.

쾅! 쿠우웅!

한바탕 요란이 벌어졌다.

하나 싸움은 얼마 가지 않아, 크렉스가 어둠에 제압당하며 끝났다.

네 발 모두 묶여 버린 크렉스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포효만 내지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어차피 자기 힘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거면서 달려들긴.”

크렉스는 진료소의 환자들 때문에 본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을 위해서 기어 나온 인형 환자들이 몰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도 이랬지.’

이지에 있던 크렉스의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녀석이 개과천선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니었으면 진료소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누워 있는 크렉스를 내려다봤다.

“마지막이야. 내가 말한 놈을 데려오는 건 딱히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직접 찾아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만 피리를 불어. 그럼 네놈 목숨도 살려 주고 이 진료소는 그냥 내버려 두지.”

피리를 직접 빼앗아 불지 않고 자꾸만 녀석에게 하라는 이유가 있었다.

‘녀석이 가진 피리는 녀석에게만 반응하지.’

내가 빼앗아서 불러 봐야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이다.

그 때문에 무력의 한계를 넘어 자발적으로 하게끔 만들 수 있는 약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약점이 크렉스에겐 진료소였다.

이곳은 녀석에게 있어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

그런 곳이 사라지게 되면 녀석의 인생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큭!”

크렉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피리에 대해서 알았는지는 모르나, 피리를 불게 되면 일이 겉잡을 수없이 커지게 될 겁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리를 부는 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거야 그쪽 생각이고.”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걸 보면 자극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나는 진료소를 바로 태워 버릴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듯이 마나볼트를 시전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네놈과 함께 이곳을 태워 버리는 수밖에.”

곧 지팡이를 정면으로 겨누었다.

파지지! 파직!

구체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갈 듯한 기세를 보이는 순간.

“안 돼에!”

계단에서 내려온 한 여자가 크렉스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살짝 놀랐다.

‘인형이 아니잖아?’

그녀는 분명한 사람이었다.

이 골목은 사람이 지내기는 어려운 곳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베디돌들이 득시글대는 곳이기에, 세다고 자부하는 등반자들도 혼자서는 출입하지 않는다.

한데 이런 데 혼자서 있다니.

“김유림 씨! 대체 왜 나왔습니까?!”

크렉스가 그녀를 보며 화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돌아본다.

“그럼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있어?”

그 와중에 다칼은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저 여자다! 우리가 쫓던 그놈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저 여자란 말이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귀찮음을 덜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근데. 한국인인가 봐?”

“왜? 한국인 처음 봐?”

대답과 함께 얼굴에 단검을 들이민다.

나는 딱히 피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했다.

“아니. 날 공격한 놈이 어디서 굴러들어 온 놈인가 해서.”

사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내게는 딱히 큰 의미가 없었다.

같은 고향 출신 혹은 같은 나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유대감? 그런 건 지구가 멸망한 이후에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생존이 우선시되었으니까.

그것은 탑도 마찬가지다.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소속감, 유대감 따윈 별것도 아닌 걸로 취급하게 된다.

파직!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준비되어 있는 마나볼트를 쏘았다.

그러자 그녀가 즉각 반응해, 가로로 검을 휘둘렀다.

반응 속도와 신체적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오히려 여태 만난 등반자들 중에서는 탑급이다.

이내 그녀에게 닿기 직전인 마나볼트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오호~.”

그것을 보고서 그녀가 어떻게 공격을 하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방향타도 맞지 않고 닿지도 않았는데 검을 휘둘러서 마나볼트를 두 쪽으로 만들었어. 그 얘긴, 검을 어떻게 휘두르든 원하는 타깃을 맞추는 능력을 가졌다는 거고, 검기에 마법을 파훼하는 힘까지 담겨 있다는 거다. 무엇보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보호막마저 뚫고 들어오지. 뭐야. 완전 사기잖아?’

하지만 사기에 가까운 능력답게 단점도 있었다.

핏, 핏핏!

그녀가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 몸에는 잔 상처들이 늘어 갔다.

그러나 그 무엇 하나 치명상은 되지 못했다.

나의 빠른 회복력은, 잔 상처들을 빠르게 치유했다.

가만히 응시만 하고 서 있던 나는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공격스타일이 흥미롭긴 한데. 싸움은 여기까지 하지.”

다크월.

쿠구구구!

김유림의 시야를 가린 뒤.

윈드퍼드.

피잉!

“크읏!”

압축한 바람을 총알처럼 작게 만들어 날려 보내자, 김유림은 그대로 벽을 뚫고 날아갔다.

나는 곧장 벽을 없애, 그녀가 놓친 단검을 바람으로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연달아 마법을 시전한다.

컬스버닝.

화아악!

파란 불꽃이 그녀의 전신에 타올랐다.

“꺄아앗!”

컬스버닝은 인식 저하와 면역력 저하를 일으키는 저주 마법.

몸에 붙은 불은 뜨겁지 않다.

하나, 눈으로 불꽃을 보고 뜨겁다고 착각했는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꺄아! 저리 가!”

불꽃 하나 때문에 침착함을 잃어버린 김유림은 어떻게든 몸에 붙은 불을 꺼 보려고 발버둥질했다.

하지만 저 파란 불꽃은 저주로 인해 불타오르는 것이기에 절대로 꺼트리질 못했다.

“유림 씨!! 캬하아아아앙!”

어둠에 묶여 꿈쩍도 하지 못하는 크렉스가 그녀가 당하는 걸 보고 본 힘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나는 다크웹을 중첩으로 시전해 녀석을 고치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으로 감싼 단검을 손에 쥐어 크렉스의 얼굴만 드러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단검은 귀속이었다.

손에 쥐려고 하니, 엄청난 중력이 단검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아깝네, 꽤 괜찮은 템 같았는데.”

입맛을 다신 뒤 마나볼트를 시전해 공중에 띄워 놓았다.

그리고 전기에너지를 미세하게 컨트롤해 크렉스의 얼굴을 드러낸다.

“푸하아! 하아~ 하아~.”

크렉스가 숨을 크게 토해 냈다.

그러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피리를 불겠습니다! 그러니 유림 씨는 제발 풀어 주십시오!”

크렉스는 진료소 때문이 아니라 김유림 하나 때문에 마음을 바꿔먹었다.

‘설마 했는데. 인형과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그런 게 가능한 것일까? 모른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는 크렉스의 눈빛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론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만큼, 고등한 생명체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좋아. 다칼, 저 여자가 딴짓 못하게 감시하고 있어.”

“크르르.”

-그러지.

다칼에게 김유림을 맡아 두고, 나는 크렉스가 움직일 수 있도록 풀어 주었다.

“자. 피리를 불어. 그럼 저 여자도, 진료소도 안 건드릴 테니.”

말하고 보니 내가 마치 악당이 된 것 같다만, 일이 이렇게 되길 자초한 건 저들이었다.

이내 크렉스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자그만 피리를 꺼내 들었다.

오래전에 봤던 것이지만, 보고 나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저것이. 내가 바라던 그 피리라는 것을.

크렉스가 그것을 입을 가져가며 불기 전에 한마디를 내뱉었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 끝에 피리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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