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77화
77화 지배자 라네스 (2)
쿠구구구…….
동그랗게 움푹 파인 벽 아래, 자그만 산처럼 쌓인 파편들.
나는 그곳에 묻힌 라네스가 뛰쳐나오길 기다리며 허공에 검을 빠르게 늘렸다.
십여 개가 넘는 검들이 라네스를 향해 겨누어졌다.
한데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절대 이런 걸로 끝이 날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서 나오지 않겠다면 먼저 선방을 쳐 주지.”
콰가가가가!
폭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검들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드르륵!
식탁에 앉아 있던 오십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칼 같은 군무를 보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각자 무기를 꺼내 들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폭격처럼 떨어뜨렸던 검들을 재빨리 회수해 내 몸을 중심으로 원형 포지션을 만들어 방어적인 포지션을 취했다.
그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망설임을 가지거나 회피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무작정 파고드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이 최면에 걸렸다는 건 분명해.’
라네스가 저지른 짓일 터.
이 많은 인원을 최면에 걸리게 하려면 마나든 생명력이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필코 자신의 힘을 소모하는 대가는 아닐 것이다.
금방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희생과 재물.
남의 힘 혹은 남의 생명력을 이용하여 강한 힘을 발휘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커.’
최면에 걸린 이들은 휘두른 검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단순히 맹목적으로 달려들기만 하다 보니 상대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하나 저들을 상대하기보다 최면을 건 놈을 먼저 처리하는 게 더 이로웠다.
다크스윔.
어둠이 되어 직접 녀석이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팡이가 들린 손을 뻗어 마법 연계를 펼쳤다.
다크월.
귀에서 룰렛 돌아가는 소리가 간만에 들려왔다.
[행운의 룰렛이 발동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룰렛에서 <5>이 나왔습니다!]
[발동한 스킬 레벨에 <+5>이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어스월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더욱 단단하고 거대하며 유연한 벽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쿠구구구!
일시적으로 10레벨이 된 마법 벽이 빠르게 치솟았다.
그러며 산처럼 쌓여 있던 파편들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머리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라네스가 곧 파편을 걷어 내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나는 이미 치솟아 있는 벽을 이용해 그것을 아래로 구부러트렸다.
콰앙!
“커억!”
90도로 휜 벽이 라네스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엘리렌스.
[각 마법의 속성이 강화됩니다.]
[각 속성의 내성이 일부 형성됩니다.]
다크딥트리.
촤르륵!
땅에 떨어진 라네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속박한 후 뒤를 흘겨봤다.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또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다크월로 네 개의 벽을 세웠다.
그것으로 공간을 완벽히 차단했다.
쿵! 쿵!
벽을 부수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르지만 10레벨에 세운 벽인만큼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리라.
다시 라네스에게 집중했다.
그는 두 눈에 피를 흘렸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 붉어진 이마를 보며, 코앞에 십자가를 형성했다.
치이익……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살을 태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릴 뿐 그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흐흐흐흐.”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하!”
“원래도 정신 나간 놈이 더 정신이 나갔군.”
이내 웃음을 멈춘 그가 감고 있던 두 눈을 강제로 떴다.
상처를 입은 눈에서 여전히 피가 흘렀다.
“제가 그쪽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군요. 아니,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이 자리까지 찾아온 인물 중에는 가히 최고입니다.”
그 얘긴 즉 여태 이곳을 뒤집어엎으려 했던 등반자들이 숱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라네스가 살아 있다는 건 그들의 계획이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치이이…….
라네스의 이마가 계속 타들어 간다.
하나 이를 개의치 않은 채 곧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 그뿐. 혹시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겁니까? 제 제안을 뿌리칠 정도로 정의감이 넘쳐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뭐. 정의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럴 수 있죠. 그런데 그거 전부 다 위선에 불과합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말 한번 번드럽네. 정의? 위선? 쓰레기를 치우는데 그런 이유가 필요하나?”
정의감을 집어넣어 두더라도 인육을 먹는 놈과는 상종할 이유도 살려 둘 이유도 없었다.
“크흑흑. 어리석군요.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인데.”
“기회? 기회는 우위에 서 있는 자가 주는 게 기회고.”
“뭐. 이렇게 붙잡혀 있으니 우위에 있는 것 같습니까? 깨닫게 해 드리죠.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피이잉!
이마에 두던 십자가를 녀석 무릎에 쏘았다.
녀석의 말을 더 들어 줄 필요가 없었다.
“큭!”
중심이 무너져, 몸의 절반이 꿇렸다.
홀리크로스.
피잉!
나머지 한쪽 무릎에도 십자가를 관통시켰다.
애초부터 이마에 쏠 생각은 없었다.
너무 쉽게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면 상대에게 좋은 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 줄 생각이었다.
“크흐흐.”
이젠 아예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나 보자.’
화륵!
나는 등가교환 마법을 시전해 불꽃을 소환했다.
그러자 라네스가 웃음을 멈추고 말을 내뱉는다.
“지금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쪽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를.”
말하자마자 변화가 일었다.
꿈틀꿈틀.
갑자기 녀석의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몸통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피부색마저 변해 갔다.
파쟈쟈쟉! 팅!
그를 붙잡고 있던 나무줄기들이 끊어졌다.
그리고 손상을 시켜놨던 무릎도 빠르게 낫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몸집이 두 배로 커졌다.
“우아아아아!”
괴물처럼 함성을 내지르는 그것을 보고 직감했다.
녀석이 변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리 자신만만해했군.”
나는 곧 최종적인 형태를 올려다봤다.
두 개의 뿔을 가진 소머리와 인간의 근육을 닮은 몸통, 그리고 딛고 서 있는 두 다리 역시 털이 달린 소의 다리와 유사했다.
그리고 등에 생긴 붉은색의 작은 두 날개가 눈에 띈다.
모습이 마치 미노타우로스와 악마의 날개를 섞어 놓은 것만 같았다.
‘이제야 이해가 가네.’
그동안 맞춰지지 않던 퍼즐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난 저것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좌를 알고 있었다.
데모디오.
고층에 존재하는 악마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데, 특이점은 인육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또한 데모디오의 계약자들은 인육을 섭취해 힘을 증강시킨다.
‘인육을 취미 삼아 먹는 게 아니었어.’
벽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최면에 걸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
‘먹은 그 힘으로 계속 최면을 건 거야.’
한마디로 도축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저놈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것이다.
놈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개새끼는 한 놈뿐이다.
라네스는 아공간에서 거대하고 길쭉한 둔기를 꺼내 들었다.
크기가 내 몸의 세 배는 되어 보인다.
콰앙! 쿠구구구…….
라네스는 둔기를 휘둘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부수었다.
10레벨의 벽을 단박에 부수다니, 분명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게 느껴진다.
벽이 부서지니 최면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 가며 나를 포진했다.
붉게 일렁이는 불길한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한동안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라네스가 먼저 나지막이 말했다.
“쳐라.”
최면당한 사람들이 먼저 내게 뛰어들었다.
뭐. 잔챙이들 먼저 보내 힘을 빼놓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네 뜻대로는 안 되지.’
다크딥트리.
사방 바닥에서 나무들이 치솟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줄기로 잡아채더니 목을 조여 기절을 시켰다.
이후.
다크스윔.
스으윽-
라네스 머리 위로 이동해 발을 내리찍었다.
파아아앙!
“커억……!”
마나 방출을 이용한 충격파로 흐름을 끊어 놓은 뒤 아직 시전을 해제하지 않은 검들을 불러들였다.
“우아아아!”
라네스는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재빠른 반응을 보였다.
둔기를 360도 휘둘러 주변에 풍압과 어둠을 내뿌렸다.
나는 어둠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풍압 때문에 날아든 쭈뼛쭈뼛 선 어둠의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어서 라네스가 자신의 둔기에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형상화된 어둠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죽어라!”
곧바로 내려쳐 온다.
피하려는 그때.
탁!
기절해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의식을 되찾아 내 발을 붙잡았다.
잠깐 시선이 간 사이.
쿠우웅! 파칭!
둔기는 두르고 있던 보호막을 단숨에 부수고 내 머리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앙! 쾅쾅쾅쾅!
이후 순식간에 공격이 연타로 들이닥쳤다.
강한 충격의 울림이 전신을 훑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뾰족한 가시로 된 어둠은 내 몸을 꿰뚫지 못했다.
또한 갑옷이 물리적 충격을 흡수하며 여러 번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캬하하하하! 이 공격에는 아무도 못 당하지!”
날 끝낸 줄 알고 기뻐하는 라네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주위에 피어난 먼지로 인해 아직 살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조용히 녀석을 끝낼 마법을 준비하려는데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가 진정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 주라 말합니다.]
아무래도 녀석의 속성이 어둠이라 그런 지, 그가 뻗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영감이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거든.”
마침 반지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올랜드 마나 반지 조건부 효과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법의 시전 시간이 감소합니다!]
‘테스트도 해 볼 겸 그 마법이나 사용해 볼까.’
13층에서 일정 수준의 마나를 충족시키고 어둠의 반지를 통해 얻어 낸 새로운 어둠 마법.
회귀 전에는 얻지 못했던 마법이었다.
얻고 나서 14층에서 딱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는데.
아직 그 마법에 대해서 파악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마구 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마법에 비해 시전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나 소모도 매우 크기 때문에 사용치 않고 묵혀 뒀었다.
하나 계속 묵혀 두기만 해선 전력이 되지 않는다.
‘마나가 충분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사용하기에 딱 적합하지 않을까?
상대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고, 올랜드 마나 반지로 인해 마법 시전 시간도 줄어든 상태이다.
“후~.”
나는 체내에 있는 마나를 지팡이 끝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이동을 하더니 순간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의 절반가량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나와 공명하는 어둠석.
우우우웅-!
“……!”
순간 수백 번에 이르는 진동이 지팡이에서 손을 타고 발끝까지 지나갔다.
진동이 워낙 빠르고 강렬하게 지나가다 보니 육체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보통은 견디기 어려웠다.
우우우웅-!
이것으로 두 번째.
우우우웅-!
세 번째.
우우우웅-!
네 번째.
…….
…….
…….
전해져 오는 진동이 열 번째를 넘어갔을 때.
먼지가 사라지고, 드디어 녀석과 얼굴을 마주했다.
“크헝?”
라네스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네놈이…… 그 공격을 맞고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여태 만난 놈들이 전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했나? 그게 아님 겨우 그런 공격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병신 같은 발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뭐, 뭣!”
“무슨 솜방망이를 맞은 것 같던데. 그리고 네놈이 무기에 두른 게 어둠이 맞나? 제대로 된 어둠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던데.”
역린을 건든 듯 라네스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데모디오 님이 주신 어둠의 힘을 욕하다니!”
우우우웅-!
이것으로 열다섯 번째.
준비는 끝났다.
“겨우 그 공격에 살아남았다고 입을 놀리는 게 같잖구나! 내 진정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 주지!”
라네스가 또 다른 공격을 하기 위해 힘을 끌어모았다.
녀석의 몸에서 방출되는 어둠의 기운.
그리고 둔기에는 이전보다 더욱 날뛰는 기운이 형상화되어 불처럼 타올랐다.
“이거나 처먹어라!”
힘이 이전보다 더 담겨 있는 것 같긴 한데, 내 눈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딱히 아무런 대비 없이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손으로 받아 낸 공격!
충격은 물론이고 날 집어삼키려는 어둠을 모조리 파훼시켜 버렸다.
아니, 흩어지려는 어둠을 내 지배력 밑에 두어 되레 뾰족한 가시 형태로 만들었다.
이후 녀석에게 되돌려 보냈다.
“크허어어!”
자기 어둠에 오른쪽 가슴을 뚫린 라네스.
쉬지 않고 나는 쿵! 소리가 나게 지팡이를 바닥에 찍고서 혼잣말로 속삭였다.
“다크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