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76화
76화 지배자 라네스 (1)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아사와 화형을 꼽는다.
천천히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는 아사.
빠르고 강렬하게 고통을 느끼는 화형.
역사적으로도 극형 중에 하나로 화형을 꼽았다.
화아악!
“아악! 아아악!”
톱을 든 사내는 시뻘건 불에 타고 있었다.
챙, 탱그랑!
어떻게든 꺼 보려고 발악한다.
[쌓아 온 악행의 누적치가 높습니다!]
[정의를 실현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정의의 방화자’ 효과가 발동하였습니다!]
칭호가 상대를 악으로 단정했다.
화아아아!
“으아아!”
몸에 기름을 부운 듯, 불의 화력이 더욱 세졌다.
앞으로 녀석이 죽을 때까지는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난 그 모습을 냉랭히 쳐다봤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인간을 도축하는 녀석에겐 아주 잘 어울리는 형벌이었다.
물론 녀석이 지은 죄는 영원히 씻겨 낼 수 없다.
자신이 죄를 씻어 내기 위해 선의를 베풀든 고통을 받든, 그것은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를 받은 이는 그 고통을 영원히 기억한다.
“선의든 고통이든, 그런 흉내라도 내면 다행이지.”
보통의 인간이면 하지 못할 짓을 한 놈이다.
그것은 이미 죄책감 따윈 없다는 걸 의미했다.
한마디로 구제불능 쓰레기.
더 이상 비명이 들려오지 않는다.
화력이 셌던 탓인지 금세 시커먼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왜일까?
한번 끓어오른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탑에서 쌓아 온 경험 때문에 감정 통제를 잘하는 편이지만, 그동안 억눌러 왔던 분노가 함께 터져서 그런 듯했다.
기척이 느껴진다.
“네놈,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피가 묻은 식칼을 든 늙은이가 나타나 이쪽을 쳐다본다.
한 놈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다.
이렇게 대규모로 관리하려면 아무래도 손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늙은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까지 길을 잘못 들 리가 없을 텐데…….”
오는 길에 있던 함정을 말하는 듯하다.
늙은이는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이내 바닥에 있는 잿더미를 발견했다.
비교적 온순해 보이던 얼굴이 순간 악귀처럼 살벌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뛰어와 식칼을 내지른다.
하나 움직임이 워낙 느려, 다소 힘이 빠졌다.
나는 무표정한 눈길로 늙은이를 쳐다보며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늙은이는 싸움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를 찔러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많이 찔러본 놈처럼.
다시금 복부로 파고드는 공격!
이번에도 살짝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곤, 지팡이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늙은이의 팔뚝을 붙잡았다.
우두둑!
“……!”
악력을 가해 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이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아무리 독한 놈이라고 할지라도 미세한 표정의 변화라도 있을 텐데 말이다.
늙은이는 팔이 꺾이기 전과 표정이 비슷했다.
“무통증이군.”
탑에서 무통증자를 만나 본 적이 있기에 증상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무통증인 걸 들킨 것이 상관없는 듯 조용히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다다르지 못했다.
서걱!
허공에 소환해뒀던 다크소드를 움직여 늙은이의 목을 베어 버렸다.
무통증자라면 고통을 주고 싶어도 주질 못하니 굳이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나는 두 동강난 늙은이 앞에 다가가 중얼거렸다.
“죄책감도 없는 쓰레기들.”
이내 늙은이가 나온 쪽을 쳐다봤다.
저곳에 통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뒤로 돌자 할 일을 마친 다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쇠고리에 걸려 있던 사람들은 전부 찬 바닥에 놓였다.
당연히 그들은 의식이 없었다.
“마취를 강하게 했을 테니 한동안은 의식이 없을 거야.”
-그렇겠지. 준석, 이들은 이대로 두면 죽는다.
“알아.”
주변의 공기가 차다.
이들은 냉각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노출되어 있다 보니 몸의 체온이 낮아져 있을 것이다.
보통이면 진작에 죽었을 테지만 15층까지 올라온 등반자는 기본적으로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회복력도 뛰어나, 여기 온도만 조금 올려 주면 금방 의식을 찾으리라.
파직! 파직!
나는 불을 피우는 대신 마나볼트를 띄워 열기를 만들었다.
조금씩이지만 새파랬던 몸에서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다칼, 네가 여기서 조금만 있어.”
-그대는?
“이 짓거리 한 놈들이 찾아, 다신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해 줘야지.”
“캬햐아앙.”
-괜찮은가? 도와주지 않아도. 그 라네스라는 놈 하고도 결국 마주치게 될 텐데.
“언제는 도움이 필요했나. 혼자서도 충분해.”
다칼을 이곳에 두고서, 아까 전에 늙은이가 왔었던 길로 가 보았다.
예상대로 문이나 통로가 있었다.
지그재그로 꺾여 있는 통로를 지나자 곧 드넓은 주방이 나왔다.
대략 여덟 명 정도가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요리를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전부 뒈져 버려.”
화륵!
정말로 하나도 남김없이 그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주방 끝 칸에는 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다크스윔.
그 코앞으로 이동해 곧장 문을 열었다.
철컥.
“으아아악!”
불에 타는 놈들 중에 하나가 먼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녀석에게 시선을 끌린 나는 다시 앞을 내다봤다.
거대한 홀이 보인다.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지 상당히 세련되게 잘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홀에는 식탁이 수십 여 개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음식도 없이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이 오십여 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은 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들어오든, 침입자가 들어오든, 아예 관심도 반응도 없었다.
꼭 최면에 걸린 인간들 같다.
불길할 정도로 고요하다.
딸각, 딸각.
그 와중에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예복 같은 것을 입고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5미터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남자는 입에 넣었던 포크를 빼며 이쪽을 바라봤다.
“그쪽에 앉으시죠.”
이런 상황이면 본래 당황스러워하거나, 누구냐고 묻거나, 혹은 공격적인 행위를 보이거나 할 텐데.
남자는 내가 이곳에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침착한 태도로 자리에 앉으라 권유했다.
접시에 담긴 고기를 포크로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네가 라네스지.”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나를 째려보듯 쳐다봤다.
“예. 맞습니다. 그쪽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다른 놈들은 전부 당했다는 것이겠죠.”
“역시 상층부를 관리하는 지배자라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네.”
당장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당장에라도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하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권유한대로 그와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할지 들어 보고 싶었다.
“앉았으니, 얘기나 들어 볼까?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죽기 전에 유언 하나 정도 남겨도 좋고.”
라네스는 마저 손을 움직여 포크로 고기를 집어삼켰다.
몇 번 오물오물 씹더니 입을 연다.
“고기가 육질이 살아 있어 부드럽습니다. 혹시 하나 드셔 보시겠습니까?”
나는 접시에 담긴 고기를 쳐다봤다.
육안으로만 봐서 그게 무슨 고기인지 알 수 없으나 주방을 지나쳐 왔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유추가 가능했다.
보고 있으니 역겨움과 함께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건 너나 처먹고 본론이나 말하지.”
“보기보다 성미가 급하시네요. 좋습니다. 지금 얘기하길 원하니 말하죠.”
라네스가 이내 양쪽 팔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한데 한쪽 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저건 올튼 왕가 표식?’
에르샤처럼 십자로 그어진 흉터가 없었다.
그 얘긴 즉 라네스는 올튼 왕가의 적통이라는 의미였다.
‘어떻게 올튼 왕가 사람이 여태 살아 있을 수 있지? 멸망했다고 알려진 올튼 왕가가 몰래 대를 이어 왔었다는 건가?’
아무리 봐도 거짓 표식은 아니었다.
“……하시죠.”
표식을 보느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저랑 같이 일하자고 말했습니다.”
“뭐. 적과의 동침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만 저는 제안하는 겁니다. 물론 피라미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음에 안 들었으니 다 때려 부수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테지만. 이런 건 원대한 계획을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그쪽을 높게 삽니다. 별 버러지 같은 놈들 수백 명보다 제대로 된 사람 하나가 낫죠.”
라네스는 밑에 얼마나 죽던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신경을 썼으면 피라미드에 정착하지도 않았으리라.
솔직히 놈의 개인적인 것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올튼 왕가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어볼 방법을 찾는 동안 질문 하나를 던졌다.
“원대한 계획? 뭐 따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라도 있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곳 피라미드는 그런 계획의 보탬이 될 일부에 불과합니다.”
라네스는 내 손의 장갑을 보더니 이내 자신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 주었다.
“혹시 이 문양을 알거나 보신 적 있습니까?”
알다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나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내 장갑에 새겨져 있는 문양과 똑같군.”
“이 문양은 올튼 왕가를 의미합니다. 그쪽이 끼고 있는 장갑도 올튼 왕가에서 만든 것이죠. 그쪽은 모르겠지만 과거 한때 탑 전체를 아울러서 층을 지배하던 것이 올튼 왕가죠.”
스스로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다 말해 주고 있었다.
따로 질문을 지어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얻어걸린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뿐이었다.
“한때라는 건 지금은 망했다는 건가?”
쾅!
침착함을 보이던 그가 식탁을 내리쳤다.
“망하다니요! 그저 더 큰 업적! 지배! 원대함을 위해 잠시 웅크렸을 뿐입니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전 올튼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건 기회입니다! 그쪽이 올튼 왕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
라네스는 손을 뻗더니 말을 이었다.
“이 손만 잡으세요. 그럼 원하는 모든 걸 가지게 될 겁니다. 이미 층 곳곳에 왕가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곳도 왕가를 일으키기 위한 배양지와 같은 곳!”
나는 두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말하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때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일부가 살아남았다는 거군.’
이미 층 곳곳에 왕가의 사람들이 있다면, 언젠가 그들이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피고 움직이는 순간이 올 터.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회귀 전에 왕가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선 일은 없었으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계획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한테 계획이 가로막혔거나 모종의 일이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헛된 희망이라는 거지.’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이곳, 배양지부터 영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라네스의 두 눈이 빛났다.
이렇게 말을 섞다가 몰래 뒤에서 칼침이나 놓을 줄 알았는데, 이 녀석, 진심이었다.
정말로 날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솔깃한데?”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군요. 멍청한 놈이 아닌 이상,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
“아니. 그 솔깃 말고. 개소리가 아주 솔깃하다고. 하아~ 네놈들은 어떻게 된 게 하나도 바뀌는 게 없냐.”
“에? 그게 무슨…….”
인물은 달랐으나 이지에서 본 상층부의 지배자도 이런 느낌이었다.
자신이 한 짓을 정당화하고 회유하려고 했다.
“쓰레기들 머리에는 쓰레기만 담겨 있단 말이 딱 맞군.”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다크스윔을 시전해 등 뒤로 이동했다.
라네스는 곧 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본다.
그때, 미리 준비하고 있던 두 개 손가락을 뻗었다.
“아악!”
녀석이 두 눈을 찔리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시발!”
예상치 못한 공격에 욕을 지껄이는 그였다.
나는 이어서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팡!
“억!”
맞고 저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날아가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