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65화
65화 인식 속에서 사라진 통로 (1)
토르 진영의 거처 빅트리.
준석은 거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곳의 이름을 빅트리라고 지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무는 거대하고 웅장했다.
높이만 해도 백여 미터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토르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자~ 마셔! 마셔!”
“오늘은 먹고 죽는 거야!”
“워우! 워우! 워우!”
콜드브릿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싹 다 잊어버린 것처럼 술과 안주를 한가득 끼고 한껏 취해 있었다.
좋게 보자면 단순 명료하고, 나쁘게 보자면 뒤가 없고 생각이 없었다.
“캬하으~.”
다칼도 어느새 술자리에 끼어 술을 들이붓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안수찬이 양손에 술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자.”
준석에게 별말 없이 술잔을 건넸다.
그것을 조용히 받아 든 그는 잔의 속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들이켰다.
꿀꺽꿀꺽꿀꺽.
목이 말랐었는지 술술 넘어간다.
“쓰으읍~.”
들이켜고 난 뒤에 찾아오는 알싸함은 정신을 번뜩 들게 했다.
“캬하~ 달다. 달아.”
같이 술을 들이켠 안수찬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간만에 술을 먹은 준석 또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술만 한 잔 들어갔을 뿐인데, 지친 육신을 달래는 기분이다.
‘그래. 잠시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준석은 술잔을 또 기울였다.
덩달아 술을 마시던 안수찬은 이내 할 말이 있는 듯 옆을 흘끔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준석도 같이 옆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음? 뭐가 말입니까?”
“쭉 지켜봐 왔는데, 준석 씨는 꼭 미래를 알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그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준석 씨. 저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없습니까?”
“흐음.”
준석은 더는 시치미를 떼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힌트를 많이 주긴 했지.’
오히려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러한 의심을 했으리라.
자신이 해 왔던 행동들은 미리 정보를 알고 있거나 혹은 미래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 많이 섞여 있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 탑을 처음 들어왔을 때 그쪽한테 주어진 고유 스킬이 예언과 관련된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그리 생각할 터다.
회귀를 했다고는 상상치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굳이 밝힐 생각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꼭 예언이 아니더라도 정보를 습득하는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만 있다면 타인에게는 미래를 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점지 스킬도 비슷해.’
일단은 안수찬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대답을 해 줘야 더는 껌 딱지처럼 붙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내놓자.
생각을 정리한 준석이 입을 뗐다.
“제가 아니라고 말해 봐야 안 믿을 것 같은 표정이네요.”
“예. 준석 씨가 자기 감을 믿듯이 저도 제 감을 믿습니다. 이번에도 다리 위에 뜬금없이 나타나 란샤오가 씰스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노린 것하며, 보통 등반자라면 모를 보스 몬스터를 소환까지 해냈죠. 마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외에도 이전에 알고서 행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쪽 추측이 어느 정도는 맞긴 하지만, 예언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정보를 알고 있는 것뿐이지.”
“……예언이 아니라고요?”
“네. 그냥 정보 몇 개를 먼저 아는 것뿐입니다. 그게 미래를 아는 것 같이 보였던 거고.”
“……아.”
약간은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이길 바랐던 느낌이었다.
하긴. 누군가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만큼 쓸 만한 정보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갑작스레 둘 사이를 끼어드는 한 그림자.
“어우! 깜짝이야! 주안나! 놀랐잖아!”
주안나가 술잔을 홀짝 들이켜며 준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연다.
“그쪽이 나보다 강한 이유. 이제 알겠어.”
“굳이 정보 몇 개 몰라도 그쪽보단 강했을 것 같은데.”
주안나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준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봤다.
방금 한말은 도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미래의 일을 몰랐다고 해도 그녀보다는 강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재수 없어.”
“강한 게 재수 없는 거면 그쪽 말은 칭찬인 건가? 칭찬 감사히 받지.”
“흥!”
“안나야, 또 왜 그래. 이전에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렇게 미안해해 놓고서. 언젠가 다시 사과한다며.”
안수찬이 한 말에 주안나가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홱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수찬은 준석에게 얘기했다.
“안나가 승부욕이 강해서 그래요. 그쪽이 조금만 이해해 줘요.”
“신경 안 씁니다.”
되레 그는 그녀의 반응을 재밌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내 준석은 안수찬에게 빈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술 더 없습니까?”
“당연히 더 있죠! 뭐.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답변은 들었으니까. 술은 제가 더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준석은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긴가.”
인적이 드문 장소.
빅트리의 뒤쪽으로 발걸음 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넝쿨로 뒤덮인 땅굴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곳을 미리 알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이 장소를 직접 알려 준 이는 따로 있었다.
[전투에 미친 투신이 함정은 없다며 빨리 들어가 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했던 토르였다.
준석은 주변을 경계하며 어둠 속을 유유히 걸었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이곳에서 강력한 힘이 담겨 있는 줄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뒤늦게 점지가 발동했다.
깊이가 있는 길을 쭉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막다른 곳이 나왔다.
그곳엔 새하얀 빛을 내는 가느다란 줄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투에 미친 투신이 그거라며 소리칩니다!]
준석은 그 가느다란 줄기를 손으로 회수했다.
[천백의 줄기를 얻었습니다.]
‘천백의 줄기…….’
딱 봐도 귀해 보이는 것이, 엄청난 효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됐다.
우선은 먼저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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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백의 줄기
영구 효과: 체력+30, 정신력+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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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과 정신력을 30이나……?’
설마 이곳에 이런 게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준석은 환하게 웃더니 천백의 줄기를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좋은 것일수록 빨리 취해야 하는 법.
맛도 생긴 것과 다르게 나쁘지 않았다.
달달한 사탕수수를 씹는 기분이랄까?
체력이 바닥 나 있던 터라, 몸의 변화도 금방 체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피곤하던 정신이 말끔하고 뚜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먹기만 했을 뿐인데, 꼭 오랜 휴식을 취한 기분이야.’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당장에 다음 층으로 향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을 취했으니 이만 돌아가자.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니 안수찬이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준석은 그에게 다가가 새로 가지고 온 술잔을 받았다.
“한참을 찾았는데, 술 가져다 달라고 해 놓고 어디에 갔다 온 겁니까.”
“저쪽에서 볼일을 좀 보고 왔습니다.”
혼자 좋은 걸 먹고 왔다고 말할 순 없으니 에둘러 얘기했다.
그러자 안수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건배합시다! 건배!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를 내는데 우리도 질 수 없지! 자 빨리 건배!”
준석은 그와 술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목을 축인다.
“크으으~.”
아직 천백의 줄기에서 나온 단내가 남아 있다 보니 술맛도 더 좋게 느껴졌다.
안수찬은 필을 받은 듯 아예 술통 하나를 가지고 왔다.
준석은 그 술통을 보며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같이 먹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마셔 줄 땐 제대로 마셔 줘야 하지 않겠는가.
“건배!”
이후에도 둘은 몇 번이고 잔을 부딪쳤다.
* * *
깊이 잠을 자다 조용히 눈을 떴다.
술을 진탕 마시고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안수찬은 옆에서 코를 골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조용히 잠이 든 주안나가 보인다.
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칼.”
“크르응.”
-갈 시간이 되었나 보군.
작은 목소리에도 금방 반응을 보였다.
“쓰르읍.”
다칼은 입가에 묻은 술을 혀로 핥으며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나는 다칼을 보며 말했다.
“먹는 걸 보니 아주 술고래던데. 그간 어떻게 참았대.”
-그대가 할 말은 아니군. 술통째로 들이마신 게 누군데.
“크흠~ 그냥 물 같아서 마신 거지.”
-나도 마찬가지다.
이내 수다를 멈추고 거처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두루마리 한 개를 꺼내 들었다.
아셔를 잡고 얻어 냈던 두루마리.
인식 속에서 사라진 통로, 그것을 거침없이 펼쳤다.
스르르르르!
펼쳐진 두루마리는 마치 붉은 카펫이 깔리듯이 바닥에 깔렸다.
보기에는 통로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카펫에 두 발을 딛고 서는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통로라는 걸.
카펫을 밟고 있으니 보이지 않던 환영이 보였다.
사람 한 명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문 한 개와 그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인식 속에 사라진 통로 속 공간…….’
꼭 잘 꾸며진 정원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정원을 응시하며 한걸음씩 다가섰다.
문을 통과하고, 하나의 차원을 건넜다.
그리고 멀리 있다고 느껴졌던 정원은 어느덧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콧속에는 꽃향기가 짙게 배였다.
동시에 탁한 마나가 스며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기엔 평화롭군.’
하지만 탑에서 평화는 사치로 취급된다.
어딜 가든 위협이 있기 마련이었다.
리페우스의 말로는 이 통로를 지나고 나면 상당한 마나를 거머쥘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절대 대가가 없는 보상이 아닐 것이다.
한 발짝 더 내딛자, 메시지가 올라온다.
[타락한 정원에 들어왔습니다.]
겉보기엔 여전히 화려함이 가득했지만, 곧 이곳의 무엇이 타락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유령의 형상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령이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는 정령의 모습에는 검은 먹물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다.
이제야 왜 대기에 떠도는 마나가 탁하게 느껴졌는지 이해가 된다.
정령은 대기 마나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
그런 존재가 타락했으니 당연히 마나가 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대기에 이 정도의 영향을 주려면 정령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필요했다.
그때.
“쌔해애애액!”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어떠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인간과는 모습이 달랐다.
머리끝은 꽃의 형상을 지녔으며, 아래로는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굴곡진 몸매, 그리고 꽃의 뿌리처럼 생긴 두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꽃의 정령 네펜데스가 등장하였습니다.]
네펜데스는 날 노려보더니 이내 꽃잎에서 파란색 가루를 방출했다.
분명 어떤 영향을 끼쳐올 터.
급하게 숨을 참아본다.
하나 입자보다 작은 가루를 전부 막아 낼 순 없었다.
[유혹의 가루를 들이마셨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육체를 통제하는 능력이 저하됩니다.]
디버프가 많이도 걸렸다.
등가교환으로 유혹 가루의 힘을 걷어 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착용하고 있던 갑옷에서 효과가 발동했다.
[이뮨의 마나갑옷 효과 ‘마법 면역’이 발동합니다.]
[혼미해졌던 정신이 원래대로 되돌아옵니다.]
[확보되지 않던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옵니다.]
[육체를 통제하는 능력이 원래대로 되돌아옵니다.]
“쌔해해액!”
네펜데스가 멀쩡해진 내 모습을 보곤 놀라고 있었다.
그러고는 혼자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어찌 내 유혹을……!”
뻔한 대사를 읊어 대는 녀석.
유혹이 통하질 않으니 이제는 다른 수를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내 어깨 위에 있던 다칼이 몸을 움직였다.
한데 아주 큰 변화가 일었다.
“크햐아아아앙!”
아기처럼 자그맣던 다칼이 이전의 거대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