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62화
62화 고대종 (1)
산등성이 같은 등껍질은 작은 산 하나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다.
그것을 지탱하는 여섯 개의 발은 갑각류가 가진 발처럼 뾰족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 뿌연 파란 안개의 형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두 눈동자였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시 혹은 환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안이군.’
-마안이다. 조심해라.
다칼과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 둘한텐 통하지 않아.”
다른 특징을 가진 마안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심연의 어둠을 이용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둠의 내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처음에 느껴졌던 몽롱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 마안의 힘이 내게 잠시라도 발동했다는 것은 그 힘이 매우 강력하다는 의미였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라 이건가.’
많은 경험을 쌓다 보면 혜안이 생기고 그럼 상대를 보기만 해도 추측이 가능한 것들이 생긴다.
“가아아아악!”
그런 내가 보았을 때 주피로는 11층에는 맞지 않는 규격 외의 존재.
나를 제외한 이곳에 있는 모든 등반자들이 덤벼들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가늠하기 힘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소환한 것일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전력을 다하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해.’
단순히 감정만 앞선 직감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이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판들을 깔아 오지 않았는가?
쿵! 쿠웅!
주피로가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가듯 중앙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움직임은 대단히 느렸지만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커다란 여파로 찾아왔다.
다리가 견디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강렬한 지진이 발생했다.
대지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큰 영향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아직 다리를 빠져나가지 못한 등반자들은 강한 진동에 몸을 허우적대기 바빴다.
“가아악! 가아악!”
이내 자리를 잡은 주피로가 등껍질의 색을 파랗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파즈즈즈즈!
등껍질의 각 모서리 부분에서 고압의 전기가 발생하고 있었다.
안 봐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보였다.
전기 에너지를 응축해 한꺼번에 방출하려는 것일 터.
아직 다리에는 등반자들이 남아 있었다.
부상에 기절해 있는 녀석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꽤 되리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녀석이 방출한 전기 에너지에 휩쓸려 모두 죽게 될 수도 있었다.
탓!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두 발을 가볍게 튕겨 곧장 주피로에게 접근했다.
그러며 다리에 아직 멀쩡히 발을 딛고 서 있는 안수찬을 보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등반자들을 데리고 뒤로 빠져요!”
평소 남이 어찌 되든 상관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경이 쓰였다.
재앙에 가까운 녀석을 소환한 건 나니까.
그리고 녀석은 내 사냥감이었다.
다른 놈들에게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안수찬은 내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안수찬과 같이 있던 주안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주피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힐끗 날 쳐다보더니 이내 검을 들고 주피로에게 뛰기 시작한다.
‘어림도 없지.’
슈하아아악!
나는 윈드퍼드로 그녀를 저 멀리 날려 보낸 뒤 주피로의 등껍질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파즈즈즈즈즛!
이미 상당한 양의 전기 에너지가 응축 과정을 끝마쳐 방출하기 직전이었다.
“다칼, 떨어져!”
다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등가교환으로 뾰족한 금속 막대를 생성했다.
이것이 나의 피뢰침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찰나.
퍄자자자자!
등껍질에 모인 방대한 양의 전기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곧게 뻗어 나가던 전기들이 모두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콰가강! 콰강!
나는 금속 막대로 스며들어 온 전기 에너지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집중했다.
생각보다 에너지가 엄청난지 그 열기가 얼굴에까지 전해졌다.
만일 만뢰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콰가가가! 콰가가!
날아드는 속도가 워낙 빨라, 단 수 초 만에 수십, 수백 번의 공격을 받아 냈다.
이윽고 방전을 끝내고 정적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지이이이잉- 파직!
지이잉- 파직!
수백 번의 공격을 받아 내 탄생한 전기 에너지가 집결된 금속 막대가 시퍼렇게 빛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제우스가 사용하는 번개의 모습과 유사했다.
아마 이걸 보고 있으면 만뢰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라 분노해 까무러치겠지.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야생마처럼 구는 전기 에너지는 내 손아귀에 말끔히 정제된 상태다.
하지만 나 또한 오래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받아 냈다면 이제 그걸 내뱉을 차례.
지이잉- 파직!
‘그대로 되돌려 주지!”
나는 주피로가 있는 곳을 향해 금속 막대를 내리꽂았다.
아니, 그걸로 부족해 전기 에너지 속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닿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나는 도중에 들려오던 소리를 마법으로 차단해 버렸다.
워낙 강력한 충돌음이었기에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발생하는 충격파.
나는 충격에 휘말리기 전에 미리 다크스윔을 시전했다.
어마어마한 반격이었지만, 녀석이 있는 곳을 주시했다.
다른 놈들이었으면 진작 소멸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내가 보기에 이 정도로 죽을 녀석이 아니었다.
“고오오옹!”
역시 살아 있다.
아직 연기가 다 걷히지 않아 제대로 된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다음 공격을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스타일로 마법을 구사해야 한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일반적인 공격으론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다.
그리고 애꿎은 데를 노리면 가지고 있는 힘만 뺄 뿐,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십자가 형상을 가진 홀리크로스를 시전했다.
홀리크로스는 9층 미션 보상으로 받은 마법.
현재 가지고 있는 마법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쏟아붓는 마나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나를 들이부운 만큼 그것과 비례해 마법의 힘이 증가한다.
어찌 보면 큰 공격이 필요한 주피로를 상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하나 한꺼번에 많은 힘을 담아낼 수 있는 만큼 단점도 존재했다.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크다는 것.
만약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바닥난 마나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공백이 생겨난다.
하나 성공적이게만 노릴 수 있다면 이것만큼 필승카드도 없었다.
스아아아-
처음에도 강하게 빛을 뿜어내던 십자가이지만.
마나를 쏟아부으면 부을수록 점차 그 존재감을 외부에 뚜렷이 드러냈다.
[행운의 룰렛이 발동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룰렛에서 <+6>이 나왔습니다!]
[발동한 스킬 레벨에 <+6>이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홀리크로스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한층 더 강력한 신성력과 고열을 뿜어냅니다.]
쩌저적! 쩌저적!
주피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대기 중에 생겨난 커다란 얼음덩이들.
한데 얼음덩이 주변에 불이 감싸고 있었다.
두 개의 속성을 섞은 마법이었다.
주피로는 전기와 불.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몬스터.
녀석은 대기에 지뢰를 매설하듯 수많은 불얼음덩이들을 만들어 냈다.
‘접근을 막겠다는 건가.’
아님 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메나이어 배지로 보호막을 두르고 있어 1차적 방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폭발력을 전부 막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긴 아셔 공격도 한 번 견디는 게 전부였는데. 녀석 공격은 한 번 견디는 것도 어렵겠지.’
그러면 그 전에 선방을 치는 수밖에.
아직 신성한 십자가에 마나를 덜 들이붓긴 했지만 이 정도도 큰 한 방으론 충분할 것이다.
휘오오오-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남아 있던 연기가 날아간다.
“갸아아아아아!”
그러며 주피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예상 이상인데?’
처음으로 먹였던 공격이 얼마나 먹혔는지 궁금했는데.
등껍질의 절반이 아예 증발해서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하나 다른 곳은 매우 멀쩡해 보였다.
한데 바람이 연기만 걷어 낸 것이 아니었다.
펑! 퍼펑! 퍼퍼퍼펑!
바람으로 불얼음덩이들이 서로 부딪혀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어코 내 옆에 있던 불얼음덩이까지 터져 버렸다.
나는 급히 다크스윔을 시전했다.
그러며 저 멀리 떨어진 십자가를 이쪽으로 끌어왔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등가교환.
다시금 금단의 마법을 시전해 녀석의 약점을 수색했다.
빠르게 줄어들어 가는 마나.
‘찾았다!’
그러나 나는 약점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약점이라고?’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나 그 약점이라는 게, 녀석 이마에 단단한 크리스털로 둘러싸여 있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 단단함이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냥 저기에다가 십자가를 박아 넣으면 운이 좋아 크리스털을 파괴하고 어쩌면 흠집만 줄지도 몰랐다.
보통 생명체라 하면 자신의 약점을 가장 안전한 곳에 두는 법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상당한 대가가 따르긴 하겠지만 등가교환을 이용해 십자가를 저 안으로 공간 이동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다른 방법을 떠올린다면 다크스윔뿐인데.
지금의 다크스윔으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면 다크스윔은 공간 이동이 불가능했다.
우선은 마나를 충분히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등가교환을 사용키로 마음먹었다.
수웅-!
가까이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다칼이었다.
-괜찮은가?
“괜찮아.”
-그래도 방금 전의 공격이 꽤 치명적으로 들어갔군.
“등껍질 절반 날린 걸로는 안심할 수 없지.”
다칼이 내 옆에 있는 십자가를 힐끔 쳐다본다.
-저걸 저 녀석에게 먹일 생각인가?
“그래. 그런데 약점을 노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올랜드 마나 반지와 이뮨의 마나갑옷으로 인해 마나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그거야 초반에 마나량이 적었을 때 얘기이다.
지금은 몇 분은 있어야 바닥난 마나 그릇을 전부 채우는 정도였다.
-그럼 내가 시선을 끌어야겠군.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내게 맡겨라.
주피로를 노려보는 다칼.
녀석의 몸에 새겨진 하얀 초승달에서는 얕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지. 저 정도면 반달인데, 언제 반달로 변했지?’
변화는 그뿐이 아니다.
아주 미세하지만 다칼의 몸집이 점차 커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피로의 영향 때문인지, 먹구름만 껴 있던 하늘에 작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그 틈 사이로는 반달이 떠 있었다.
‘설마 달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건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저것은 달의 여신 페르라가 남긴 목걸이니까.
지금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다칼의 힘이 강해지면 견제도 강하게 할 수 있어.’
그러면 그만큼 내가 수월히 마나를 회복할 수 있다.
“갸아아아아아!”
“크하앙!”
다칼이 주피로의 관심을 끈다.
나는 그동안 계획한 대로 마나 회복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외로 다칼은 선전하는 중이었다.
자그만 덩치에도 불구하고 주피로에게 전혀 밀리질 않는다.
물론 다칼이 녀석에게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칼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한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일시적으로 마나를 담는 그릇이 넓어집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리치네스까지 사용했다.
“좋아…… 다칼! 이제 그만 빠져!”
내 말을 듣고 다칼이 재빨리 물러선다.
“자. 간다.”
등가교환.
우우웅!
형태를 유지 중이던 십자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릇에서 쑥 빠져나가는 마나.
워낙 방대한 마나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보니 탈진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슬아슬했어.’
거대한 힘을 공간 이동시키다 보니, 아무래도 들어가는 대가가 컸다.
단순히 마나를 몽땅 들이부운 것이라면 몰라도 저 마법 안에는 수많은 증폭이 들어가 있었다.
레인보우 띠로 인한 마법 증폭.
악재의 어둠 지팡이로 인한 마법 증폭.
그리고 축복의 차로 얻어 낸 마법의 힘까지.
“고오옹?”
주피로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늦게 자신의 이마를 올려다봤다.
녀석의 얼굴이 서서히 빛으로 물들어 간다.
씨이이이이-!
그리고 금속 막대를 내리꽂았을 때와는 달리 고요함 속의 소름 끼치는 소음이 주변을 덮쳤다.
곧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커다란 십자가 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끝이 난 것일까?
분명 공격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상하리 만큼 끝이 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되레 내 직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치이이이-
엄청난 고열에 녹아내린 흔적이 보인다.
이마가 달려 있던 머리는 아예 소멸해서 사라져 버렸고, 다른 부위마저 그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남은 것은 검은 잔해뿐.
끝이 난 것처럼 보였으나.
투두둑.
잔해 속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투쾅!
자그만 형체 하나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왜소한 몸집을 가진 괴생명체는 다리 중앙에 두 발로 착지를 하더니 곧장 나를 노려다봤다.
이내 입을 크게 벌려 소리친다.
“가야야악!”
비록 전체적인 외형은 달랐으나 녀석이 주피로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녀석이 가진 두 눈동자.
방금 전에 들려온 괴성.
그것은 이전 주피로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그럼 그렇지. 이리 쉽게 끝날 리 없지.”
나는 비릿하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어 지팡이를 가슴팍 앞에 두곤 마법을 시전했다.
마나볼트.
파직! 파지직!
2차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