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60화
60화 콜드브릿지
오랜 시간 동안 전투에 뛰어든 탓일까?
“하아~ 하~.”
안수찬은 괴로움에 울부짖는 고통 어린 절규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땅에 파묻힌 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코로 진하게 스며드는 피비린내와 썩기 시작한 시신들의 냄새가 점차 강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후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신해 갈수록 전투 감각은 예민해지며 공기마저 집어삼키는 광기가 그를 지배했다.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조차 망각한 채 싸움을 이어 가던 중.
문득 메시지가 올라왔다.
[전장 분위기가 고조에 달했습니다.]
[돌발 이벤트가 종료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다리 중앙을 사수하십시오.]
도중에 뒤로 빠져 숨을 고르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이 다리에 서 있던 안수찬은 메시지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가 서렸다.
‘드디어 끝이 보여.’
조금만 더 힘내면 보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거의 다 왔다!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토르의 영역 사람들을 이끄는 란샤오가 양손에 낀 너클을 부닥치며 소리쳤다.
“시발, 족쳐!”
“저 녀석들도 지쳤어! 중앙에서 밀어내!”
살아남은 자들은 그 말에 힘을 얻은 것처럼 없던 힘까지 끌어내 적들을 상대했다.
하나 그중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는 따로 있었다.
주안나.
안수찬을 따라온 그녀는 체력이 넘치는지 처음 싸우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일까?
안수찬은 질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더욱 호되게 몰아붙였다.
그러다 마주친 상대측 진영의 간부 한 명.
싸우는 동안 간간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지.’
그가 손에 든 망치를 꽉 쥐고 앞으로 달려들려는 순간.
상대측 진영의 간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속임수를 쓰기 위해 저러는 것인가 싶었지만 곧 느껴진 인기척에 그도 고개를 돌렸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한 인영.
‘뭐지?’
날아온 방향을 보면 절벽 아래 산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저 먼 거리를 날아왔다는 것에 절로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어딘가 낯이 익은 실루엣.
정체불명의 그자가 드디어 땅에 발을 딛는다.
쿠화아아앙!
동시에 터져 나오는 굉음과 충격!
싸움을 계속 이어 가던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 충격파가 일어난 곳을 쳐다봤다.
단박에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 셈이다.
먼지에 휩쓸려 보이지 않는 얼굴.
시끄러웠던 전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오직 발걸음 소리뿐.
안수찬은 먼지를 걷어 내며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정체불명의 그자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준석.’
먼저 올라간다는 말과 함께 코빼기도 보이질 않더니 이런 식으로 등장하다니, 그다운 행보였다.
준석은 제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주위를 슥 둘러본다.
찰나, 안수찬은 그와 두 눈을 마주쳤다.
안수찬은 개인적으로 그를 보며 놀라는 중이었다.
아니, 감탄이 나왔다.
‘그 짧은 사이, 그새 더 강해졌다.’
금안으로 본 그의 그릇은 비슷했으나 그에게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남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 그에게서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고 그는 깨달았다.
파즈즈즈즛!
전장에 휘돌던 전기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지배하기보다 마치 전기와 한 몸인 것처럼 가까운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친화력을 얻은 거야.’
어떻게 얻은 것인지는 모르나, 그 친화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준석은 바닥 아래로 모여드는 전기를 잠시 흘겨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두 개의 돌멩이였다.
그는 돌을 쥐고 팔을 쳐들어 외쳤다.
“이미 알아본 놈들도 있겠지. 이 두 개는 씰스톤이다!”
‘씰스톤이 두 개나…….’
안수찬은 씰스톤에 대해서는 이곳에 머무르고 있던 등반자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란샤오갸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물건.
‘안 그래도 이 전장이 끝나면 결투를 신청해 빼앗으려고 했는데.’
준석은 그걸 이미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이거 이번에도 진 기분이 드는데.”
그런데 씰스톤 두 개가 있다는 걸 왜 일부러 말을 하는 것일까?
괜한 이목만 끌고 위험할 텐데 말이다.
하나 그다음말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씰스톤을 가진 녀석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와라. 나와서 씰스톤 걸고 한판 뜨자.”
대놓고 대상을 지목했다.
토르의 진영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란샤오에게 향했다.
안수찬 역시 그를 보긴 마찬가지였다.
‘승부욕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렇담 거절할 리 없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서 뒤로 내뺀다는 뜻은 많은 것을 잃는다는 걸 말한다.
단순히 승부욕을 잃는 결과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직위와 명예가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지고 겁쟁이라는 오명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은 지금처럼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안수찬은 슬며시 웃고 있는 준석을 보며 거기까지 의도해 말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준석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혹시 쫄았냐? 쫄았으면 도망치시던가. 결국엔 나한테 잡혀서 뒤지게 털리겠지만.”
“이런 샹발래가!”
도발이 제대로 통한 듯, 가만히 있던 란샤오가 저돌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빨라!’
란샤오의 전력을 확인한 적 없는 안수찬은 살짝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란샤오는 큰 한 방을 먹이려는지 한쪽 주먹에 힘을 실었다.
노란빛의 입자가 번쩍인다.
그렇게 내지른 단 일합의 일격!
퍼어어엉!
아직 주변에 가시지 않은 먼지가 그 일격에 뒤로 밀려났다.
“갔네.”
“저런 주먹을 맞곤 못 살아남지.”
다들 상대가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매한 판단이었다.
‘씰스톤은 각 산에 하나씩 있다고 했어. 보통은 제우스와 토르 진영에 있는 두 개를 이용한다고 했지.’
나머지 하나는 혹한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보스가 매우 강력해 그간 아무도 잡지 못했다고 했다.
한데 준석이 토르 영역에 있는 씰스톤을 제외하고 두 개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아무도 잡지 못했던 보스 녀석을 잡았다는 얘기야.’
그런데. 과연 저런 주먹에 나가떨어질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아는 준석은 티끌의 영향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곧 모습을 드러낸 준석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방금 전의 일격을 보호막으로 막아 냈다.
살짝 금이 가 있긴 했으나 막은 것은 막은 것이니까.
“……!?”
란샤오는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막는 건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준석이 그를 보며 나지막이 입을 뗐다.
“선빵은 양보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쿠항-!
일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상당수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안수찬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단순한 발차기였어.’
그런데 그걸 맞은 란샤오는 저 멀리 나가떨어진 것도 모자라 아예 일어서지도 못한 채 기절해 버렸다.
‘마법도 필요 없다는 건가.’
마법에도 능한데, 육체의 힘도 뛰어나다.
분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보다 먼저 한발 앞서가고 있었다.
한편 란샤오가 당한 것을 뒤늦게 인식한 토르 진영 사람들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다수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장의 리더가 당했다는 것은 전세가 기울었다는 뜻.
하나 제우스 진영 사람들 또한 웃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크록 마운틴의 씰스톤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신들의 수장도 당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준석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란샤오가 기절해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아무도 그를 막거나 덤비려고 들질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과 공포감.
약 하루 동안 전장을 누비며 살아남은 그들조차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안수찬은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여기 있는 그 어떤 이들도 아닌 방금 전에 모습을 드러낸 준석이라고.
* * *
[씰스톤을 얻었습니다.]
란샤오의 품속을 뒤져 돌을 얻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등반자들 중 최초로 세 개의 씰스톤을 모았습니다.]
[세 개의 씰스톤을 모은 업적으로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씰스톤으로 상인을 소환 시 상왕을 만날 수 있는 권한을 얻습니다.]
상왕의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만나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봐 왔던 건 그 밑에 있는 상인들.
그래도 회귀 전에 상인들에게 얻어 낸 정보가 있기는 했다.
상인과 상왕 간에 차이는 판매하는 아이템의 양과 아이템의 수준에서 온다.
탑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이나 매우 귀한 것들을 취급한다고 들었다.
‘분명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겠지.’
이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의 리더가 당해서일까?
토르 진영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하나 누군가가 용기 있게 소리 내어 외쳤다.
“상대는 겨우 한 명이야! 다들 병신같이 있지 말고 덤벼들어! 이대로 씰스톤을 빼앗길 거냐고오!”
그 말이 사람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세긴 해도 뭐! 저 자식이 가지고 있는 씰스톤이 없으면 술도 먹지 못하고 굶게 생겼구만. 다들 다시 되찾아 오자고!”
“저놈 잡아!”
“와아아아!”
수십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었다.
“쯧쯧.”
나는 한심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군중의 심리란 참으로 쓸데없는 감정과 사고력이 섞인 심리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숫자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지 되는 줄 알고 착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숫자,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이루지도 얻어 내지도 못하는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랬다면 진작 누군가가 탑을 정복했겠지.’
“다칼.”
“아우우우우-!”
-내게 맡겨라.
다칼이 마안의 눈을 번뜩이자, 거침없이 다가오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돌로 변해 갔다.
뒤늦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금 조용해진 주변.
이제 토르 진영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중에는 안수찬과 주안나도 있었다.
주안나는 내가 가진 걸 탐내듯이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당했던 기억 때문인지 쉽사리 덤비지는 못했다.
‘더 덤비는 녀석들은 없나 보군.’
그렇다면 슬슬 탑의 상왕을 만나볼 차례.
세 개의 씰스톤으로 봉인당한 그 녀석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그 물건이 필요했다.
나는 한쪽 손아귀에 세 개의 씰스톤을 꽉 거머쥐었다.
이어서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소환을 위해 외쳤다.
“탑의 상왕이여. 내 부름에 답하라.”
외침과 함께 빛이 번쩍이는 씰스톤!
일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긴장한 눈빛으로 서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처럼 느려졌다.
하늘에서 빠르게 내리치던 번개 또한 갑자기 거북이가 기어가듯 느리게 뻗어 나간다.
곧 다리 위로는 자그만 균열이 생겨났다.
고오오오-
그 크기는 점차 커져 가더니 한 번에 여럿이 그곳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잠시 후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윤기가 휘날리는 백색 털에 작고 날카로운 발톱.
얼굴에 긴 수염과 사납게 뜬 두 눈.
축 늘어진 꼬리로 붙잡고 있는 회중시계.
그리고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에 이고 있는 왕관까지.
상왕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