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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탑 등반자-59화 (59/230)

회귀한 탑 등반자 59화

59화 백옥 열매

매끈한 고급 나무 침대에 갈색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모포와 이불.

바닥에 깔린 카펫은 방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다칼은 부드러운 카펫이 마음에 든 듯 대자로 누워 몸을 비비적댄다.

나는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에 몸을 눕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아~.”

우리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적적한 공간에 들어서자, 이제야 제대로 쉬는 느낌이 든다.

공간을 채운 고요함이 외로움을 느끼게 하긴커넝 오히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역시 쉴 땐 아무도 없이 조용히 있는 게 최고지.”

나는 두 눈을 감고 잠시 느긋함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눈을 뜬 나는 손에 들린 구슬을 쳐다봤다.

하얀 이 구체의 이름은 백옥 열매.

아까 전에 촌장 엘리에게서 받은 물건이다.

백옥은 아셔 마운틴에서 나오는 아주 회귀한 열매로서, 섭취하게 되면 추위에 강한 체질로 변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추위에 무적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 오래 견딜 수 있는 체질로 바뀐다는 것 자체부터가 큰 메리트가 있었다.

비록 회귀 전에는 이미 누군가가 섭취해서 먹지 못했지만 이번엔 우연의 계기로 얻어 냈다.

“에레나, 다 그 여자 덕분이지.”

그녀의 소환수가 다칼을 먼저 공격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에 대한 사과 표시였다.

물론 다칼이 오히려 상대 소환수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느냐가 중요하지.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이걸 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줄 테니 마을은 건드리지 말라는 건가.”

애초부터 쉬어 갈 생각이었을 뿐, 마을을 건들 생각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딱히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밖에 일행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했는데도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이런 걸 줘서 그쪽 마음이 편하다면 결국 서로 윈윈인 셈이었다.

‘배도 어느 정도 꺼졌는데. 먹어 볼까.’

“카합.”

열매가 상당히 차가워서 입에 넣으면 차가울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다.’

이상 신호가 온 건 열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뒤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후~ 갑자기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갑네.”

하나 딱히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차가운 느낌만 들 뿐.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점차 징후가 사라져 갔다.

[체질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추위로부터 강해집니다.]

[빙결 내성이 조금 생깁니다.]

[정신력이 올랐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생긴 변화는 의외였다.

[백옥 열매를 섭취하며 성화의 깃 효과 일부가 영구적으로 흡수됩니다.]

[추위에 더욱 강해집니다.]

[빙결 내성이 강해졌습니다.]

백옥 열매랑 성화의 깃에 이런 시너지가 있을 줄이야.

뜻밖의 소득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릉?”

잠을 청하던 다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흠, 그대에게서 찬기가 느껴지는군. 열매를 먹었을 땐 미약하다가 갑자기 기운이 강해졌다. 무얼 한 거지?

“기운이 느껴지나? 난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데.”

-기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기감? 하긴 오래 산 신수라면 기감이 뛰어나겠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 역시 몸이 이리 변하면서 기감이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그보다 어떻게 된 거지?

“그냥 우연이야. 백옥 열매랑 성화의 깃이 시너지를 일으킨 거지.”

-오호.

만일 성화의 깃을 쓰지 않은 채 백옥 열매를 먹었다면 이런 우연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이내 나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조금이라도 원기를 회복하려면 지금 쉬어 둬야 했다.

그렇게 잠에 들려고 하는데 다칼이 입을 열었다.

-동행자여,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사실 이전부터 궁금했던 거지. 그대는 왜 탑을 오르지? 수많은 등반자들에게서 그 이유를 들었지만 나는 그대가 오르는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반대로 물어볼게. 넌 왜 나랑 같이 탑을 오르지?”

-그거야 그대가 꼭대기에 낙원이 있다고 하였기에 그렇지. 뭐.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도 섞였지만. 내게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건 역시 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비슷한 이유야.”

다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조금 더 자세히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다칼, 네가 그곳에 가려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자유 때문이지.”

-그렇다.

“난 삶의 대한 자유 때문이야.”

다칼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탑을 오르다 보면 내가 이전에 살던 곳들과 비슷한 풍경을 만나게 되지. 그럴 때마다 안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여기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게 돼.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등반자가 탑을 오르기 위한 게임 재료에 지나지 않아. 등반자들에겐 목숨을 거는 일일지라도 이 공간, 이 배경, 이 탑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재료의 밑바탕이 되는 거지.”

-게임 재료라. 흐음……

다칼은 고민이 깊어진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다칼을 보며 생각했다.

탑을 올라 지구를 구원하려는 이유는 그리움 때문도 있지만, 탑에서의 삶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삶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공간 안에서 아무리 개척을 해도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한정한 공간 속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벗어나려고 해 봐도 결국에는 원점이다.

또한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상상력을 죽이고 마비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탐구심과 상상력이 없으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다칼이 말했다.

-전부 다 이해가 된 건 아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그대는 탑이 만들어 낸 틀 속에서 신좌들에게 놀잇감처럼 놀아나다 죽기 싫다는 거군.

“뭐. 비슷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내려다보니, 어느덧 다칼이 옆에 와서 누웠다.

“카펫에서 잘 것처럼 굴더니. 마음이 변했나?”

-그저 변덕이다.

“그래?”

-그렇다.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모른다.

그러나 우리 둘 다 각자만의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다른 것이 맞지 않아도 목표가 비슷하다면, 앞으로 탑에서 이어질 여정을 그 누구보다 잘 견뎌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나는 이미 눈을 감은 다칼을 보며 말했다.

“잘 자라고.”

* * *

툭, 툭.

발소리에 깬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워 저 멀리 있는 현관문을 쳐다봤다.

그러며 창문을 잠시 흘겨본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는 걸 보면 아직 활동 시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지?’

나는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든 다칼을 내버려 두고 조용히 현관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팡이를 앞세우며 문을 재빠르게 열어젖혔다.

“허읍! 어, 어! 어! 까아악!”

문 앞에 서 있던 에레나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지려는 걸 내가 손으로 붙잡았다.

경사처럼 기울어진 그녀의 몸.

“고, 고마…… 어? 으아악!”

푹!

그녀가 뒤로 굴러떨어져 눈 속에 파묻혔다.

“푸훕.”

어제 저 여자의 소환수가 다칼을 공격하려고 한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이씨! 이봐요! 아저씨! 붙잡았다 놓는 게 어디 있어!”

“자기가 조심해야지. 누구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 집 앞엔 왜 기웃대는 거야?”

“아, 그게…….”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이리저리 배배꼬는 걸 보면 하기 싫을 일을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어제 일은 미안해요! 제 소환수가 실수를 했어요.”

“실수가 아니라 고의겠지.”

“아무튼! 미안하다고요! 미안해! 꼰대처럼 쪼잔하게 사과도 안 받아 주고 그러는 건 아니죠? 저도 큰맘 먹고 온 거라고요! 당신 소환수 때문에 내 소환수가 얼마나 다쳤는데!”

“겨우 목 조금 긁힌 것 가지고.”

실제로 다칼은 제압만 했을 뿐, 해하지는 않았다.

“긁힌 것도 다친 거거든요!”

“아. 그래. 그래서 사과는 다했고? 용무는 그걸로 끝? 이만 가 봐라, 꼬맹아.”

“뭐, 뭐!? 꼬맹이? 내가 어딜 봐서 꼬맹이야! 이래 봬도 165센티는 넘거든!”

“꼭 키가 작아서만 꼬맹이냐. 하는 짓이 영락없는 애새끼 같으니까 꼬맹이라고 하는 거지.”

“씨이……!”

“훠이~ 놀아 줄 시간 없으니까, 다른 데 가서 놀렴.”

“크햐아아아악~.”

-무슨 일이지?

인기척에 잠에서 깬 듯, 다칼이 찢어지게 하품하며 밖을 나왔다.

“별일 아니야. 애 한 명 달래 주느라고.”

-그렇군.

“애 아니라니까!”

나는 에레나를 무시한 채 다칼에게 말을 이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슬슬 움직일 준비 하자고.”

-알았다.

나와 다칼은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마을 밖을 나서려고 하니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던 에레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봐! 아저씨! 내 말 들었어!? 어디 가냐고!”

“어딜 가긴. 이만 떠나야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가 버리면 언니한텐 뭐라고 말해!”

“그거야 너 사정이지. 훠이, 비켜.”

강제로 밀어내고 걸어가자 뒤에 있는 그녀가 소리쳤다.

“어딜 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데려다줄게!”

“포인트 없다. 손님 필요하면 다른 사람 알아봐.”

“공짜로! 공짜로 해 준다니까!?”

“어. 그래. 필요 없어.”

계속 무시를 일관하니 결국엔 떨어져 나갔다.

“하여간, 질긴 여자야.”

곧 마을을 벗어나 아셔 마운틴의 끝자락,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크록 마운틴에 디파이어가 존재했듯이, 아셔 마운틴에도 디파이어 녀석들과 마주쳤다.

물론 속성이 다른 얼음을 다루는 녀석들이었지만, 아셔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녀석들이기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절벽 끝에 다다랐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니 11층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보통 위에서 아래로 내려 봐야 잘 보이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더욱 시야가 잘 보이는 것 같았다.

한쪽은 제우스의 영역인 크록 마운틴.

한쪽은 토르의 영역인 시그 마운틴.

그리고 그 사이에 다리로 존재하는 콜드브릿지.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은 참으로 웅장했다.

-다음은 어디로 갈 생각이지? 격전지인 콜드브릿지로? 아님 시그 마운틴으로?

“으음. 지금쯤 콜드브릿지에서는 돌발 이벤트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시간이고. 그렇담 그곳에 란샤오도 있겠지.”

싸움을 좋아하는 놈이 그런 격렬한 전투에 빠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 층에서 헤어졌던 안수찬도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

‘재밌겠어.’

-그럼 목적지는 정해졌군.

“그래. 꽉 잡아.”

나는 거리를 재듯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이내 제자리에 멈추고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도약을 시도했다.

파아앙!

높이 날아올라 콜드브릿지를 향해 접근하는 나는 씩 웃으며 혼잣말을 속삭였다.

“어디 한번 날뛰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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