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52화
52화 씰스톤 (1)
이는 회귀 전이라면 감히 해내지 못할 위업이었다.
깽판을 놓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다른 점은 단 한 가지.
그때는 신좌를 농락하지 않았다.
회귀 전의 그에겐 신좌라는 존재는 넘보지 못할, 아득히 먼 존재로 보였다.
탑을 오르며 점차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것들이 지나온 후였다.
‘처음부터 A등급이라니. 뜻밖인걸.’
끽해야 B등급 정도를 쥐어 줄 줄 알았는데.
신좌를 분노케한 것이 의외로 탑의 큰 관심을 끈 듯했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에는 여기서 C등급을 부여받았었다.
한 번 등급이 부여되면 윗등급으로 올라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두 단계 상승은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그렇게 관심을 끈 만큼, 앞으로의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를 예고하듯이 제우스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천공의 주인이 이번 일은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일종의 경고 메시지.
하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메시지도 있었다.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가 매우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가 매우 호쾌하게 웃어 보입니다!]
하데스는 그가 아까 전에 영감탱이라 불렀던 일을 싹 다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딱히 그에게 호감작을 한 것은 아니었다.
준석의 입장에선 하데스나 제우스나 똑같은 놈들이다.
그럼에도 한 놈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하데스였다.
신약을 맺어, 지금 그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크엥~.”
마저 뒤처리를 하고 돌아온 다칼이 다시 그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이제 어쩔 속셈이지?
“어쩌긴, 한 번 깽판을 놓았으면 끝을 맺어야지.”
준석은 그들이 막고 있던 크록 마운틴을 향하는 길을 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산은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몇 킬로미터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다크스윔을 사용하면 단숨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앞으로 마나를 소모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벌써부터 마나를 소모해 힘을 빼놓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변수가 있을 수도 있고.’
물론 갑옷에 있는 힘으로 마나를 빠르게 수급할 수 있긴 하다.
다만 빠르게 수급이 될 뿐.
마나 탈진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걷는 동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천둥 소리와 발걸음 소리뿐.
그렇게 따분한 시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산 입구에 다다를 즈음.
다칼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침묵을 깼다.
-저곳에 아까 났던 탄내보다 더 진한 냄새가 진동한다.
“제우스의 계약자놈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거겠지.”
아까보다 탄내가 더욱 진하게 난다는 건 저들 틈 사이에 강한 녀석이 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곧 그는 입구로 들어섰다.
사방에서 기척이 감지된다.
대략 스무 명 정도.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그들은 말을 섞기는커녕 대놓고 살기를 드러냈다.
마중 나간 이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고 그 혼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사사삭!
귀뚜라미들처럼 수풀에서 뛰쳐나오는 그들.
“다칼.”
“캬하아아앙!”
다칼이 다가오는 이들을 순식간에 돌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 일부 몇 놈이 있었다.
다크퍼드.
준석은 그들을 향해 어둠 속성이 담긴 윈드퍼드를 방출했다.
“끄으윽!”
“으억!”
칼날로 버무려진 바람이 그들의 몸을 조각내 버렸다.
하지만 단 한 놈만은 그 공격을 회피했다.
파직! 파지직!
“흐아아압!”
번개가 깃든 창을 있는 힘껏 내던지는 남자.
콰가가!
날아드는 창은 대기를 찢듯 소리를 냈다.
다크소드.
[행운의 룰렛이 발동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룰렛에서 <5>이 나왔습니다!]
[발동한 스킬 레벨에 <+5>이 일시적으로 적용됩니다!]
[다크소드 레벨이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한층 더 강력한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차아앙!
3미터에 이르는 길쭉한 검이 창을 걷어 내고 곧장 상대에게 날아갔다.
얼마나 재빠른지, 상대는 날아드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푹!
“으억…….”
그의 머리를 단숨에 관통하고 지나갔다.
준석은 들어선 산길을 올려다봤다.
대략 천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제우스의 계약자들이 만든 아지트가 존재한다.
일명 번개 쉼터라 불리는 곳.
수백 명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은 준석이 원하는 물건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
……
……
……
대략 반쯤 올랐을까?
그는 오르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섰다.
메시지가 올라온 탓이다.
[크록 보스가 처치되었습니다!]
이곳, 산의 이름이기도 한 크록이 잡혔다.
필시 층에 머물고 있던 녀석들의 손에 잡혔을 터.
이 산이 크록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산꼭대기에 크록이라는 마물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죽어도 매 미션마다 부활하며, 수십 명이 달려들어야 할 정도로 강하다.
아무튼. 그 크록을 잡으면 씰스톤이라는 물건을 얻을 수 있다.
씰스톤을 손에 쥔 자는 딱히 특별한 능력을 얻지는 않지만, 권력의 상징이 된다.
씰스톤은 소환석.
풍부한 음식과 온갖 희귀한 아이템들을 판매하는 탑의 상인을 불러들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씰스톤의 실제 쓰임새를 모르는 이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님 알고 있어도 이후의 일이 감당이 안 되니 방치하는 것일 뿐이거나.
준석도 그 씰스톤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탑의 상인에게 구매할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가 진짜로 관심이 있는 건 다른 쓰임새였다.
‘지금 잡았으면, 저기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자 손에 있겠군.’
씰스톤을 빼앗기 위해 직접 찾아나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쉼터에 가면 자연스레 얻게 될 테니까.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만 하면 됐다.
* * *
암석으로 만들어진 집들만 해도 수십 채.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알몸의 석상이 놓인 분수대.
남녀 가릴 것 없이 살색이 많이 드러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향락이 가득한 공간에 희희낙락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곳 번개 쉼터의 수장 바크는 포도알을 한 웅큼 집어삼키며 쉼터의 입구를 쳐다봤다.
크록을 사냥하고 내려온 수하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들 지친 것이 역력해 보인다.
그는 친히 앞에까지 마중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스톤은?”
“여기 있습니다.”
맨 앞줄에 서 있는 남자가 씰스톤을 그에게 건넨다.
씰스톤을 손에 거머쥔 그가 탐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이것만 있으면 이곳의 유지와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아이템이 이번만큼은 나올지도 몰랐다.
“좋아. 수고했어.”
바크가 그냥 등을 돌리려고 하자 남자가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무슨 할말이 남아 있나?”
“아, 그…… 크록을 사냥해 오면 음식을 주시겠다고…….”
“아아! 내가 그랬었지. 그래…….”
바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 옆에 있는 녀석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커억!”
파직! 파쟈쟈쟈쟈!
“으아아아악!”
바싹 타 버려, 잿더미만이 남은 시체.
눈앞에 서 있던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바크는 한 발짝 다가서서 사람을 죽인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두곤 말했다.
“뒤를 봐주는 신좌도 없어 서러울 텐데. 아무렴 들어줘야지.”
크록 사냥에 나섰던 이들은 모두 신좌가 없는 등반자들. 정확히는 신좌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바크는 뒤에 서 있는 자들을 보며 씩 웃었다.
“자자! 뭐 하고 있어. 어서들 가서 먹으라고! 맘껏!”
“감, 감사합니다! 바크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자신들도 저렇게 될까 싶어 서둘러 앞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도 잠시.
그들은 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더니 방금 전의 일은 싹 다 잊어버린 듯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크하하하! 보기 좋군. 보기 좋아! 개새끼들마냥 잘도 처먹으니.”
이내 바크는 시선을 돌려 지나가던 여자를 힐끔히 쳐다봤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그가 혀를 날름거린다.
“이봐! 너!”
“예!?”
“일로 와 봐!”
여자는 몸을 살짝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
“흐음…….”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쪽 귀가 가려진 머릿결을 손으로 훑는다.
“고년 참. 앙큼지게 생겼어.”
팔찌 아공간에 들어가지 않는 씰스톤을 품 깊숙한 곳에 넣은 바크는 여자를 데리고 음습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에게 거절할 힘 따윈 없었다.
쉼터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고 절대적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고유 스킬이 있었다.
최면.
그러나 조건부 최면이었다.
우선 자신보다 절반 이하의 정신력을 가져야 하고 공포든 두려움이든 이성적으로 통제치 못하고 마음이 약해져 있어야 했다.
완벽히 최면을 걸기까지 조건이 까다롭지만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어떤 명령이든 따르는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쉼터에 있는 대다수는 최면에 걸려 그의 명령이라면 절대적으로 따랐다.
그가 떠나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설사 최면에서 깨어나 이곳을 벗어난다고 해도 다음 층이나 아래 층으로 갈 수 있는 포탈과 계단은 완벽히 통제 중이었다.
그리고 최면의 대상도 아무나가 아닌 룰이 정해져 있었다.
주로 신좌와 계약을 맺지 않은 자들.
뒷배를 봐주는 자가 없으니 맘 놓고 일을 저지를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신좌와 계약을 맺은 자들도 아주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제우스가 아닌 다른 신좌와 계약을 맺은 이들 또한 상황적으로 나을 뿐.
크록 마운틴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의 지배를 받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는 아주 특별한 아이템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향락의 진주.
가까이 있는 대상을 잠식해 가듯 천천히 향락에 빠뜨리는 힘을 가진 구슬이었다.
그의 부름에 두려움에 떨던 여자 또한 어느덧 양볼을 빨갛게 물들이고서 쾌락에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한창 재미를 보던 바크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제우스가 보낸 메시지 탓이었다.
“조심하라고? 헹! 어깟 놈인지는 몰라도 와 보라지!”
제우스가 경고를 보내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기에 그는 이번에도 별일 아니겠지라며,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어떤 놈이 오든 산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제우스의 계약자들에게 막힐 것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비명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바지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쏴아아아-!
비가 오고 있었다.
항시 먹구름이 껴 있는 이곳에선 비가 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빗방울을 고대로 맞은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검어?”
하얗고 투명해야 할 비가 검었다.
화산재라도 섞여 비가 검어진 것일까 싶었지만 그렇기에는 비의 색깔이 너무도 검고 불길했다.
그뿐이 아니다.
빗방울에 닿은 피부가 아주 천천히 변질해 가고 있었다.
살이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그는 비의 정체를 알아챘다.
“마법이군.”
누군지는 몰라도 그 누군가가 이 근방에 어둠의 비를 내리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