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49화
49화 새로운 장비
구슬이 삼켰던 악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외부로 튀어나와 페일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미 그의 얼굴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몸체마저도 서서히 잠식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페일러!”
그를 돕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려고 했지만 그전에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분명히 페일러의 목소리였다.
“절대 다가오면 안 돼! 절대로!”
목소리만 듣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봤을 땐 악에 정신을 빼앗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가 경고한대로 뒤로 물러서서 지켜봤다.
“크르릉.”
-시체 썩은 냄새보다 더한 냄새가 이곳에 진동을 하는군.
뒤늦게 냄새를 자각한 나는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다칼의 말처럼 작업실에서 풍기는 냄새가 아주 지독한 수준을 넘어 악독했다.
더는 맡고 있기가 힘들어 한 발짝 더 물러섰다.
스르르!
그때 작업실을 뒤덮은 악의 기운이 움직임을 보였다.
넓게 퍼져 있던 기운이 페일러의 손아귀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며 보이지 않던 페일러의 얼굴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 후, 전부 드러난 그의 얼굴은 쓰레기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몰골이었다.
“크하하하!”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찡그리기는커녕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성공이야! 성공! 내가 성공했다고!”
나는 그가 무엇에 성공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잘 갈무리된 무기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은색으로 칠갑된 긴 막대 끝에 하나의 큰 보석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저건 어둠석도 아니고 악재 구슬도 아니야.’
아예 다른 형태의 물건이다.
“이제 됐어! 일로 와서 한번 보게!”
페일러 가 내게 그 지팡이를 건넸다.
보석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손에 스쳤다.
“이건…….”
분명 어둠과 악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보석의 정체를 파악했다.
‘어둠석과 악재 구슬을 합친 거야.’
솔직히 놀랐다.
탑에서 아이템을 합성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매우 어렵고 각 아이템 간에 상성도 잘 맞아떨어져야 하기에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성공해 내다니, 페일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다.
“어떤가?”
그가 기대가 잔뜩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지팡이 막대를 잡고서 휘둘러 보기도 하고 회전도 해 봤다.
‘가볍다.’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마찰력이 있어 딱 좋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마법을 사용했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마나볼트를 시전했다.
파즈즈, 파직!
지팡이 끝에 모이기 시작한 구체는 검고 불길했다.
어둠 속성 부여.
그리고.
쿠화아앙-!
마법증폭이 일어났다.
이는 레인보우 띠로 인한 증폭이 아닌, 무기가 가진 증폭의 힘이었다.
그로 인해 구체의 크기가 더 불어나 지름 5미터가 넘는 구체가 되었다.
‘엄청난 증폭률이군.’
하긴 띠의 증폭률까지 합쳐졌으니 더 큰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으리라.
하지만 그 무엇보다 다르게 변화한 것이 있었다.
스륵- 스륵-
막대 끝에 있는 보석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마법을 둘러싸는 중이었다.
‘악재 구슬이 가진 힘이군.’
그 기운이 끼치는 영향은 간단했다.
정신력 침투로 인한 광기화 혹은 악마화라고도 불렀다.
정신력이 나약한 생명체들을 미친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특징이 있었다.
한 번 정신을 빼앗기면 되돌아오는 것도 어렵다.
한데 그런 기운을 상시 뿜어내는 무기라니.
‘썩 괜찮군.’
직접적인 성능은 어느 정도 살펴보았으니 이제 글로 써진 옵션을 확인할 차례.
무기의 아이템 정보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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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재의 어둠 지팡이
효과: 악(惡)기운 흡수, 악(惡)기운 부여, 마법 증폭률 100%
조건부 효과: 소지자가 정신력을 소모하여 악(惡)기운 전부를 ‘일시 해방’을 할 수 있다. 단 소지자가 정신력을 모두 소모할 시 통제를 잃게 된다.
조건부 스킬 습득: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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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지팡에 달린 효과는 이미 파악이 끝난 것이고, 그 외에 내 관심에 들어온 건 일시해방 능력과 조건부로 얻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악의 기운을 해방시키는 능력은 악재 구슬만 가지고 있을 때도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악의 기운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해방만 시킬 수 있고 다시 구슬로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는데, 지금 이 무기에는 기본적인 통제력이 존재했다.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겠어.’
그리고 조건부로 얻는 스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바는 없지만 예상 가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악재 구슬을 완벽히 통제해 내는 자는 그 악의 기운을 이용해 각종 제악과 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아마 그것과 연관된 스킬이 아닐까.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페일러에게 말했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제야 웃음꽃을 피우는 그.
“캬하하하!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아! 잠깐, 방어구도 완성해 놨네. 기다려 봐.”
페일러 가 다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곧 다시 돌아온 그는 손에 방어구라기보다 일상복에 가까운 것을 들고 왔다.
“자. 이걸세.”
“이 거적때기가 갑옷이라고?”
“어허! 이 사람이! 거적때기라니! 직접 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옷을 건네받은 나는 두 눈을 번뜩 떴다.
별 볼 일이 없었던 겉모양과 달리 의외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갑옷처럼 단단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옷에서 마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굳이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전도율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그뿐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니 움푹 들어갔다가 강하게 튕겨져 나왔다.
탄력도 뛰어난 수준.
말 그대로 천황금의 힘이 이 옷에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핫! 표정을 보니 마음에 드나 보군.”
페일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이템 정보를 들여다보기 전이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엄청난 물건이야.’
순간 겉모양만 보고 거적때기라 판단했던 내가 우스울 정도였다.
그래도 무슨 옵션이 달렸는지 확인은 해야 하니 아이템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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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뮨의 마나갑옷
효과: 마나 회복률 증가, 일부 마법 면역, 일부 물리 공격 흡수, 자체 마나로 내구도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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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옵션 없이 오직 효과에 대한 것들만 나열되어 있었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부 마법 면역과 일부 물리 공격 흡수라…… 가히 이상적인 갑옷이군. 그렇다고 완벽한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일부이니까.’
마법은 어디까지 면역인지 테스트를 해 봐야 할 문제이며 일부 물리 공격 흡수 또한 테스트를 하여 어디까지 흡수할 수 있는지 파악을 해야 했다.
“어험!”
이내 눈앞에 서 있던 페일러가 갑옷을 뺏어가며 말을 잇는다.
“아직 우리들 사이에 해야 할 일이 남은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크흠. 내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20년 넘게 이 일을 하며 이런 진귀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건 손에 꼽네. 이 무기와 갑옷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거야.”
최대한 가격을 높여 볼 심산인지 사견이 길었다.
사견을 더 늘어놓기 전에 나는 먼저 제시했다.
“1만.”
“뭐, 뭣이!? 1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 정도면 들어간 재료값의 반의반도 안 나올 것 같네만.”
“알고 부른 겁니다.”
“알고 불렀다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아공간에서 파란 깃털을 꺼내 들었다.
“나머지는 이걸로 지불하죠.”
“깃털? 헹! 무슨 깃털 하나를 가지고 퉁을 치려고…….”
깃털을 바라보던 그가 말이 없어졌다.
“잠깐만 줘 보게!”
깃털을 가져가 살피던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멜트스니어의 머리 깃털 아닌가!?”
“예.”
멜트스니어만이 가진 파란색 깃털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스니어의 황제를 잡았다는 일종의 증거.
하지만 그런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특별한 기능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소지자에게 큰 행운이 따른다는 것.
그러나 그만큼 큰 제약이 따르는데, 해당 층을 벗어나면 그 효력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나 같은 등반자에겐 별 쓸모도 없는 아이템이지만 층의 거주민이라면 다르지.’
페일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걸 취하려면 분명 협곡에 있는 멜트스니어를 잡아야 할 텐데…… 대체 어떻게…… 자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군.”
날 향하는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순 사기꾼으로 보는 것 같더니 이젠 신뢰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내가 거래 큐브에 포인트를 담으려고 하니 그가 두 손으로 큐브를 가리며 말렸다.
“1만 포인트는 안 줘도 돼! 가격 지불이라면 이걸로도 충분히 치렀어.”
그냥 조용히 받을 수도 있는데 그는 자신의 양심을 지켰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정감이 가는 양반이다.
나는 거래 큐브에 포인트를 담아 건넸다.
“그래도 받아 두십시오. 재료값으로 많이 써서 남는 포인트도 별로 없을 텐데.”
“허참!”
두 손에 꼭 쥐어 주니 마지못해 받는 그였다.
“그럼 이제 계산도 끝났으니 이건 제가 가져갑니다.”
나는 먼저 갑옷을 건네받은 뒤 로브 안에 갑옷을 착용했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요 며칠 허전했는데 다시 손에 지팡이가 생겨나니 일종의 충족감이 느껴졌다.
‘좋아.’
“커허음! 그러고 보니 그쪽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군. 이름이 뭔가?”
“이준석입니다.”
“이준석…… 좋은 이름이군. 내 이름은…… 음. 아까 보니 내 이름을 부르던데. 하여간 인포메 놈들.”
구시렁대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자네 어깨 위에 있는 그건 뭔가?”
다칼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그냥 소환수입니다.”
-또다시 소환수로 전락하는군. 엄연히 신수와 소환수는 다른 존재이건만.
다칼도 자신이 신수라는 걸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소환수라…… 흠. 잠깐만. 잠깐만 가지 말고 기다리게!”
그가 작업실에 있는 창고로 뛰어 들어간다.
그러더니 이내 돌아와 내게 물건 하나를 건넸다.
“가져가. 그쪽 소환수한테 도움이 될 거야.”
페일러가 건네준 것은 하얀 초승달이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잠깐만, 이건…….’
뒤늦게 목걸이의 정체를 알아본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회귀 전에도 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하지만 이 목걸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때 신좌 중에 하나였으나 지금은 소멸해 버린 신좌.
달의 여신이자 소환수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페르라의 힘이 깃든 하승달 목걸이였다.
‘이게 왜 여기에……?’
“지금은 그 효력이 거의 남아 있질 않아 크게 쓸모는 없을지 몰라도 한번쯤은 자네 소환수에게 도움이 되어 줄 거야.”
흥미로웠다.
이것이 왜 여기에 흘러들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페르라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었다.
페일러가 말한 대로 언젠가 한번은 도움이 되어 줄 터.
나는 그것을 다칼의 목에 걸어 주려고 시도했다.
“캬하응, 캬향!”
-거치적거리는 건 딱 질색이다!
“다 널 위해서 쓰라는 거야. 내 맘 모르겠어?”
-그리 얘기하니 더 불길하군.
이후에도 계속되는 거절.
‘안 되겠군. 필살기를 쓰는 수밖에.’
나는 녀석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좋아.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지. 유익한 건 하나라도 더 사용해야 탑을 더 빠르게 오를 텐데. 그래야 네가 원하는 곳에도 더욱 빨리 이를 테고. 그런데 이런 것 하나 거치적거린다고 머뭇거리는 꼴이라니. 그때 했던 말들이 전부 진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크르르응…….”
-왠지 말려든 것 같다만…… 좋다! 그리 의심을 한다면 그때 한 맹세가 진심이라는 걸 보여 주지!
다칼이 어둠으로 목걸이를 뺏어 가더니 스스로 자기 목에 그걸 착용했다.
한데 그것을 목에 거는 순간.
휘이이잉!
갑작스레 다칼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