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46화
46화 추방자들 (1)
늦은 밤.
혼자 저녁을 먹고 돌아온 유희는 욕조에 몸을 눕힌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쯤 돌아왔으려나…….”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친구 녀석.
왠지 방에 가 봐도 아직까지 안 돌아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같이 가 볼 걸 그랬나.”
금세 고개를 젓는다.
오랜 시간 동안 친구로 지내 온 만큼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혼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
같이 따라갔으면 괜히 방해만 됐으리라.
‘원래부터도 혼자 행동하길 좋아했지.’
가끔은 그게 별로기도 하지만 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만 하면 자기만의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여기 참 좋다. 오랫동안 눌러앉고 싶을 만큼.”
이전 층들과는 다르게 기본 시설들이 전부 갖춰져 있었다.
깨끗하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이 얼마만일까?
삼시세끼 챙겨 먹으며 배가 항상 부른 것도 그렇고, 거적때기가 아닌 새 옷도 사 입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 비하면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뒤로 돌아보면 무언가가 하나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추억이 닮긴 삶.
이곳에는 여태 자신이 걸어온 인생이 없었다.
그리고 남의 터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자기만의 터전, 자기만의 고향.
살면서 그런 것이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당연한 필연적 욕구였다.
‘왜 준석이가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탑 정상에 오르려고 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
지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그녀는 앞으로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층을 오르는 걸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즈음.
쏴아아-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몸에 타월을 두르고 침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만 잠에 들려던 그때.
까아악- 까아악-
밖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 설마 또?”
유희는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스니어 떼들이 다시 도시를 급습했다.
이번엔 그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이전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규모.
그녀의 입장에선 녀석들을 내버려 둔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를 입을 사람들을 걱정했다.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자기보다는 조금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안한 게 나았다.
유희는 타월을 벗어 던지고 아공간에서 갑옷을 챙겨 입었다.
검과 방패까지 챙긴 유희가 방밖을 나섰다.
그러며 준석이 돌아왔는지 확인했지만 역시나 돌아오지 않았다.
“까악! 까악!”
스니어들은 각종 물건들을 깨부수고 밖에 나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유희는 녀석들을 보며 검을 어깨 위치까지 올렸다.
“안 그래도 새로 얻은 스킬들을 써 보고 싶었는데.”
검에 신성력을 둘렀다.
형상화된 신성력은 들쭉날쭉하지 않고 차분히 갈무리된 편이었다.
왼손잡이인 그녀가 이내 오른쪽 허리춤 방향으로 검을 이동시키며 자세를 낮췄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멈춘다.
그러고는 몸의 신성력을 신체 밖으로 끌어냈다.
신체 전부가 하얗게 빛이 서리더니 일순간 검 궤적이 크게 돌았다.
수하아아앙-!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검기가 두 갈래로 나뉘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홀리투더문.
방금 그녀가 사용한 스킬의 이름이었다.
비싼 돈 주고 산 스킬답게 다수의 스니어들은 단 한 번에 휩쓸었다.
“후아~.”
그러나 상당한 힘이 소모되는 만큼 자주 사용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주변을 정리한 뒤 재빠르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광역 힐을 전개했다.
이 역시 새로 얻은 스킬이었지만 범위가 넓어진 만큼 효과는 이전에 사용하던 힐보다는 미미했다.
그래도 다수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까악! 까악! 까악!”
스니어들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 채 그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한번 급습하면 이 싸움이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걸 이미 겪어 본 바.
분명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혼잡한 와중에 성문 입구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추방자들이 쳐들어왔다!”
“위층 등반자도 있어! 다들 도망쳐!”
추방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알아먹을 수 없었지만 도시와 적대하는 세력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준석이가 저쪽으로 갔었는데.’
회귀자라면 혼자서 잘해 나가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성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끄아악!”
“아악! 어, 엄마!”
성문 앞에서는 말 그대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슴팍에 나무그림이 새겨진 이들이 벌인 행동이었다.
‘저들이 추방자들인가?’
어떻게 보든 저들을 막아야 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특히.
후웅후웅- 푸욱!
“끄억!”
저 창을 들고 있는 남자.
유희는 추방자들의 리더 오웬을 응시했다.
그가 창을 휘두르다 말고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죽여 버려! 너희들을 죽음의 길로 내쫓은 이기적인 새끼들이다!”
이후 무기를 들지 않은 등반자들에게 다가간다.
유희는 곧바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검을 보곤 오웬이 말한다.
“오호. 이 층에서 신성력을 다룰 줄 알아?”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다 이내 몸을 움직여 정면으로 창을 내질렀다.
쑤욱-!
“……!?”
까앙!
방패로 창을 막은 유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해…… 여타 등반자들과는 달라.’
그저 공격을 한번 막았을 뿐인데 방패를 쥐고 있는 손이 저려 왔다.
이 정도의 강한 공격을 몇 번이나 되받아칠 수 있을까?
몇 번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치이익! 챙!
맞대응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오웬은 그 공격을 쉽게 맞받아쳤다.
채채챙! 챙! 챙!
찰나, 십수 번이 넘는 공격이 오고 갔다.
콰앙!
“끄윽…….”
그리고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유희였다.
그에겐 오르크 검술도 신성력이 담긴 일격도 소용없었다.
그만큼 격차가 났다.
이내 창을 던지는 자세로 바꿔 잡은 오웬이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다른 놈들보다 낫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군.”
쉐엑-!
창이 날아들어 그녀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어깨에 창이 박힐 뻔했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힐끗 쳐다봤다.
피가 흘러내린다.
살짝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느껴진다.
이대로라면 당할 것이 뻔한 상황.
그때.
“유희 씨!”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태 씨!”
이젠 같은 길드 소속인 하성태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유희는 가까이 온 그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 그게 익숙한 냄새가 나길래.”
“냄새?”
그는 말하기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유희 씨한테만 나는 냄새요. 아! 그렇다고 변태로 보시진 마시고! 이건 뱀파이어가 되면서 생긴 능력일 뿐이니까!”
“오해 안 해요.”
“정말요?”
“네. 근데…… 좀 변태 같긴 하네요.”
“으음…… 역시…… 아무래도…… 그렇죠……?”
“그보다 저 좀 도와줘요! 분하지만 저 남자, 혼자서는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유희가 곧 오웬을 가리켰다.
이내 오웬과 눈을 마주친 하성태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만.”
“추방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요. 저자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무법지대라지만 그건 너무한데.”
오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멋도 모르는 애송이 새끼들이 막 지껄이긴. 이 모든 게 네놈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걸 모르나? 하긴. 알 리가 없지.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고.”
유희가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
“몰라도 하나는 알겠네요. 당신네들은 죽이는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다는 거. 그런 사람들이라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많은 걸 알 수 있죠. 일단은 구제불능 개쓰레기들이라는 거.”
“하. 탑을 오르는 놈들 중에 쓰레기가 아닌 놈이 있긴 하나? 만약 있어도 튜토리얼 층에서 진작에 죽었겠지. 너희들이나 나나 다르지 않아.”
“쓰레기도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가 있고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가 있잖아요. 그쪽이 딱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아닐까요?”
“쓰레기가 하나 더 늘었다고 건방 떨긴.”
두 눈을 번뜩인 오웬이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있던 창을 인력의 힘으로 끌어왔다.
그걸 손에 쥔 뒤 곧바로 뛰어온다.
“제가 먼저 시선을 끌게요!”
하성태가 먼저 그를 향해 뛰쳐나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희도 뒤이어서 공격에 뛰어들었다.
* * *
검은 협곡에 들어선 준석은 절벽에 자란 나뭇가지들에 올라타 있는 스니어들을 올려다보았다.
“까악! 까아악! 까아악!”
떼로 뭉쳐 다니는 쥐새끼들처럼 새카만 물결이 절벽의 전부를 뒤덮었다.
“크르르…….”
-다들 널 노려보고 있다.
다칼의 말에 준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먹잇감 하나가 굴러 들어왔으니, 얼마나 탐나겠어.”
-그도 그렇군.
셀 수없이 많은 눈동자가 노려보는 느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지간한 등반자는 이곳을 찾아오면 스니어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리라.
하지만 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었다.
“까악! 까악! 까악!”
가까이 있던 스니어들이 하나의 먹잇감을 쫓아 드디어 날갯짓을 퍼덕였다.
준석은 공격하는 대신 보호막을 먼저 둘렀다.
투두두두두!
스니어들이 부리로 쪼아 대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어느덧 녀석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시야.
준석은 여유로이 보호막 안에서 마나볼트를 시전했다.
파직! 파지직!
금세 전방위로 둘러싸인 전기 구체들.
준석은 두르고 있던 보호막을 해제하고 각 구체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파쟈쟈쟈쟈쟉!
“께에엑!”
“께에에에에!”
직격타를 맞은 스니어들이 전기에 바싹 튀겨져 힘없이 추락한다.
준석은 그들의 최후 따윈 관심에도 없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시야를 벗어나 협곡의 끝자락을 내다봤다.
그곳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새 한 마리가 거대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수백 미터 밖의 거리에서도 그 풍채가 느껴지는 덩치와 머리에 뾰족 튀어나와 있는 파란 깃털이 특징인 녀석.
녀석에게 다가가려면 수만 마리에 가까운 스니어를 뚫어야만 했다.
현실적으론 해당 층의 등반자가 저걸 뚫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멀리서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도중에 스니어 떼가 막아서서 녀석을 맞추는 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다면 직접 접근하는 수밖에 없는데, 회귀 이전에 준석은 녀석에게 접근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달랐다.
굳이 그리 어렵게 뚫을 필요도 없었다.
등가교환을 사용하면 되니까.
‘킹스니어처럼 불특정한 놈도 아니고 바로 특정 지을 수 있는 놈이야. 그렇다고 해도 바로 즉사를 시켜 버리면 대가로 얼마나 받아갈지 모른다. 다만 내 눈앞으로 강제 이동시키는 거라면…….’
그는 곧바로 마나를 끌어올려 마법을 시전했다.
다른 한편으론 다크소드를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지이이이잉-!
이내 자기만의 왕좌에 앉아 있던 멜트스니어가 그의 눈앞으로 순식간에 끌려 왔다.
“께에에엑!”
놀란 반응을 보이는 까마귀의 황제.
뒤늦게 빠져나가보려고 하지만 이미 빠져나가기엔 늦었다.
“체크메이트.”
푸욱!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멜트스니어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깔끔하고 빈틈없는 동작이었다.
[스니어들의 황제 멜트스니어를 처치하였습니다!]
[50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업적을 달성합니다!]
[혼자서 멜트스니어를 처치하였습니다!]
[특별보상이 주어집니다.]
[35,000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천리안 와드가 지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