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31화
31화 꼬리잡기 (1)
이번 층은 이전 층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주적이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믿음에 배신당하고, 영원한 동맹이란 없으며, 안전한 쉼터 따윈 사라지고 사람들은 항시 서로를 견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조금 더 얍삽하고 치밀하며 보다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으리라.
곧 미션의 자세한 내용이 메시지창으로 올라왔다.
[진행 중인 미션에 합류합니다.]
[이번 미션은 꼬리잡기 게임입니다.]
[가지고 있는 색깔 띠를 빼앗기지 않은 채로 앞 순서의 색깔 띠를 빼앗으십시오.]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빨간색<-주황색<-노란색<-초록색<-파란색<-남색<-보라색<-빨간색]
[미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남은 시간: 10:50:33]
스킬 사용 제한.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게 적용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터다.
우선 마도사에게 있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니 무기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스킬 사용이 제한된다고 해서 내 입지가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도사라 불리기 어려운 육체적 조건을 갖춘 지 오래.
심지어 스킬만 제한당했을 뿐이지 아이템 효과를 이용하면 전투는 압승이었다.
이내 추가적인 미션에 대한 설명이 떴다.
[등반자는 앞 순서의 색깔 띠를 빼앗는 그 즉시 미션을 종료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진행한 미션들과는 다르게 개인 미션으로 진행되며, 미션을 종료할 시 그것은 개인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튜토리얼 미션인 만큼 보너스 기회가 주어집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띠에 숫자가 표기되어 있을 겁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를 이용해 그 숫자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으며 그 기회는 단 한 번만 주어집니다.]
[그렇게 채운 숫자는 미션 종료 즉시 두 배로 적용이 되어 등반자의 포인트로 다시 적립이 됩니다.]
내가 유희한테 말했던 포인트 투자가 이것이었다.
단순히 보았을 땐 포인트 벌이로 보이지만 실은 해당 층의 기여도에도 연관이 있다.
보통의 등반자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
나 또한 회귀 전에는 포인트를 불리기 위해 투자했을 뿐.
기여도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등반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291,165포인트입니다.]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띠 숫자를 얼마나 채우겠습니까?]
약 30만 포인트라니, 많이도 모았다.
저것만 두 배로 불려도 60만 포인트였다.
사람이라면 잃을 것이 두려워 적당히 투자를 하겠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포인트를 사용해야 할 일은 없어.’
그렇다면.
“전부. 전부를 걸겠어.”
띠리리리.
그때 띠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가던 숫자는 정확히 여섯 자리가 돼서야 멈추었다.
[291,165포인트가 차감되었습니다.]
이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제로.
이 띠를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순간 알거지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 녀석은 얼마나 집어넣었으려나.”
-신성력을 가진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다크울프는 그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이 미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터.
-보니 자넬 많이 신뢰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말한 대로 했겠지.
“아마 전부는 아닐 거야. 한 80, 90퍼 정도 투자했으려나.”
-그 정도면 충분할 듯싶은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럴 의도로 말을 했으니까.
그나저나 자꾸 다크울프라고 표현하기가 불편하단 생각이 들었다.
뭔가 정감도 안 느껴지고 이름 같지도 않다.
하긴 애초에 다크울프란 말도 남들이 정해 준 호칭일 뿐. 자기가 원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뭐지?
“혹시 다크울프란 이름 말고 따로 이름이 있어?”
-당연히 가지고 있다. 자네도 보았을 텐데?
“이명 말고.”
-이명 말고라…… 한때 쓰던 이름이 있지.
“뭐.”
-다칼.
“다칼? 무슨 의미라도 담겨 있나?”
-아니 없다. 그냥 내가 지은 것이지.
“다칼, 다칼이라…… 흠. 나쁘진 않네. 그럼 앞으로 다칼이라 부를 게.”
“캬하앙!”
-정말 오랜만이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다칼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게 기분이 좋은 지 다칼은 나름 우렁찬 울음소리를 냈다.
“그럼 슬슬 움직일까.”
내가 가지고 있는 색깔은 보라색. 그렇다면 남색을 가지고 있는 등반자를 찾아야 했다.
스스슥ㅡ
마침 가까운 곳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몸을 움직여 기척이 느껴진 곳에 접근했다.
거기엔 딱 노리기 쉬운 여성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이 끼고 있는 띠 색깔을 확인하곤 바로 관심을 꺼 버렸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띠의 색깔은 노란색.
색깔을 건너뛰고 띠를 가지려고 해 봐야 띠가 등반자의 팔목에서 안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 기습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괜한 힘만 빼는 것이다.
물론 띠가 있는 팔목만 잘라 내서 가지고 다닐 수는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금방 자리를 옮겼다.
그 지역을 조금 벗어나자, 빌딩처럼 높은 나무가 나온다.
나는 곧장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이런 술래잡기와 비슷한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적의 위치와 그 외에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시야 확보이다.
지형이야 회귀 전에 가지고 있는 기억과 비슷해 크게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바뀐 난이도로 인해 혹시나 바뀐 지형이 있을지도 몰랐다.
변수도 확인할 겸 적의 위치 파악도 끝낼 심산이다.
“절경이네.”
위에서 내려다보는 숲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한때 지구도 이렇게 푸른 적이 있었는데…….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곧 먼저 미션에 뛰어든 사람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남색을 가지고 있는 자를 찾아 헤매던 찰나.
‘찾았다.’
상대할 적의 위치는 파악했겠다, 그 뒤에 지형을 확인했다.
‘나머지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저기는 뭐지? 원래 저런 게 있었나?’
기억을 되새겨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저리 큰 호수 지형은 없었던 걸로 안다.
‘하드 난이도에 새로 생긴 구역이라는 거군.’
나중에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럼 지형 파악도 끝냈으니…….’
“읏차!”
나는 수십 미터 높이를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러며 중간중간 있는 나뭇가지들을 붙잡아 가속을 줄이고 끝내.
쿵!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다.
“후읍.”
이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며 나무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때.
[날개 달린 목동의 신발 조건부 효과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효과 ‘효과 증폭’이 발동합니다!]
[효과: 이동방해면역, 이동속도 600%증가, 민첩x6]
타이밍이 좋았다.
몸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지며 움직이는 감각도 한층 더 세밀해지고 예민해졌다.
이내 지근거리에 닿은 나는 남색 띠를 가진 등반자 앞을 지나쳤다.
[남색 띠를 획득하였습니다.]
허무하리 만큼 손쉽게 상대의 띠를 빼앗았다.
상대는 아직 띠를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조건이 충족됩니다.]
[미션 종료가 가능합니다.]
[미션을 종료하겠습니까?]
이대로 미션을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누구보다 빠르게 5층에 있는 에도리카스 도시에 발을 딛게 될 터.
하지만 5층에 빨리 올라가 봐야 크게 얻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질 뿐.
“아니.”
[그대로 미션이 진행됩니다.]
나는 들고 있는 남색 띠를 내려다봤다.
5,040
그가 띠에 투자한 포인트는 5천 정도였다.
‘피라미군.’
하지만 그 곁에 다른 등반자들도 있었다.
정확히 셋.
내가 빼앗은 띠 말고도 두 개의 띠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한 놈은 파란색. 한 놈은 빨간색.’
파란색은 다음에 필요한 색깔이니 필요했지만 빨간색은 필요가 없었다.
“야! 저기!”
뒤늦게 날 발견하고 경계를 한다.
하나 그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팟!
“어, 어……?”
순간 파란색 띠를 가진 사람 코앞으로 이동해 그가 가지고 있는 띠를 회수했다.
“이것들은 내가 가져가지.”
“야! 너! 띠!”
“저 녀석이 가져갔잖아! 잡아!”
하지만 그들이 그리 말했을 땐 이미 늦었다.
금방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 먼 곳까지 이동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멈춰 선 나는 팔목에 두르고 있는 띠를 바라봤다.
벌써 띠가 세 개나 모여 있었다.
이를 지켜본 다칼이 내게 한마디 했다.
“캬하앙~.”
-꼬리잡기가 이렇게 쉬운 게임인지 몰랐군. 그래도 조금 더 흥미진진할 줄 알았는데.
“어려운 상대를 만나면 어렵고, 쉬운 상대를 만나면 쉬운 게 이 게임의 본질이지. 좀만 더 기다려 보라고.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어려운 상대를 만나게 될 테…….”
나는 말을 잇다 말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온다.
“다칼, 어둠.”
다칼은 눈치 빠르게 자신이 소환해 다룰 수 있는 어둠을 내보였다.
그리고 난 그 어둠을 내 지배하에 둔 채, 순간 덮쳐 오는 공격을 막아 냈다.
치잉! 쩌저적…….
서리가 맺혀 있는 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주안나.’
그녀와 두 눈을 마주친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나를 공격해 왔다.
공격에 들어간 힘을 보면 그녀는 진심인 듯했다.
‘같이 다니는 안수찬은 어디 간 거지? 흩어진 건가?’
빠른 미션수행과 기동성을 위해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저나 공격한 이유를 찾던 나는 이내 그녀가 차고 있는 띠들을 보았다.
초록색, 노란색, 주황색 그리고 빨간색.
그녀가 다음에 노릴 색깔은 보라색.
‘내 띠를 노리고 있는 건가.’
이전 층에서 동료였다고 이번 층에서도 동료라는 법은 없다.
애초에 그런 얘기를 섞은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래도 주안나가 날 공격해 온 건 예상외이다.
칭!
나는 어둠으로 그녀의 검을 튕겨 냈다.
서로 아무런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길이 아래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보고 흠칫 놀라는 그녀.
‘숫자를 보고 온 건 아닌가.’
아마 보라색 띠에 찍혀 있는 숫자를 확인했을 터.
그렇다면 미리 숫자를 보고 온 것은 아니란 건데.
솔직히 말해서 보라색 띠를 보고 온 것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저 나를 노렸을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없지. 항상 어떤 변수라도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까.’
이유에 대해서 딱히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내게 적의를 드러냈다면 설사 그게 누구라고 하더라도 맞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아아ㅡ
양손에 어둠을 끌어와 뭉치게 만들었다.
아직 다칼의 힘이 약해서인지 쓸 수 있는 어둠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하는 덴 충분할 터.
‘현재 내 지배력으론 어둠을 근거리밖에 사용 못해.’
팟!
주안나가 먼저 검을 들고 내게 다가온다.
몸이 닿는 거리에, 서리가 맺힌 검이 왼쪽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어둠을 쥐고 있는 한 손으로 날아드는 검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을 뻗어 목을 부여잡았다.
“끄윽!”
단숨에 제압이 되어 버린 그녀.
잡힌 목을 통해 어둠이 뻗쳐 나간다.
주안나는 점점 숨이 막혀 괴로워하고 있었다.
향후 얼음공주라 불리며 이름을 떨칠 등반자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내게 한낱 애송이에 불과했다.
툭!
“켁……! 쿨럭쿨럭!”
나는 엎드린 채로 거친 숨을 토해 내는 주안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어 입을 열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날 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하지. 대신 이거는 내가 가져가는 걸로 하겠어.”
“…….”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띠들을 전부 챙겨 들었다.
[초록색 띠를 획득하였습니다.]
[주황색 띠를 획득하였습니다.]
[노란색 띠를 획득하였습니다.]
[빨간색 띠를 획득하였습니다.]
[일곱 개의 띠를 전부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특별보상이 지급됩니다.]
[10,000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덕분에 시간을 소모할 필요 없이 일곱 개의 띠를 전부 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여기서의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표정을 보니 더 이상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음…… 한번은 물어볼까.’
“이봐.”
주안나가 날 올려다본다.
“날 왜 공격한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띠를 가져가려고?”
“…….”
“하~ 입 무거운 건 알지만 말을 좀 해보지 그래. 그리 답답하게만 있지 말고.”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싸워 보고 싶었어…….”
“뭐?”
“너랑 싸워 보고 싶었어. 결국에는 졌지만…….”
진 게 상당히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거와 별개로 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봤지만 설마 저런 대답이 날아올 줄이야.
얼음공주가 왜 자기와 분위기도 안 맞는 뚝배기 브레이커랑 같이 다니나 했더니.
내 착각이었다.
이제 보니 둘은 닮아 있었다.
‘아주 둘이 경쟁심이 불타오르는군.’
이런 걸 보면 꼭 둘이 남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싸워 보고 싶어서 싸움을 걸었다. 그게 이유라고?”
“안 믿어도 상관없어. 애초에 내 행동을 해명할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오히려 저렇게 나오니 신뢰가 가는 건 왜일까?
그래도 이대로 두고 가기엔 조금 뭔가 아쉬웠다.
‘생각해 보면 괘씸하단 말이지. 이전 층에서 안수찬을 통해 도움도 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뭔가 더 손해를 봤으면 좋겠는데…….
‘아.’
이내 괜찮은 방법을 떠올린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주안나에게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