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25화
25화 레드 포그 (2)
나는 금방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안수찬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이 빨리 나타나고 있어.’
여태껏 난이도에 따른 변경점을 보았을 때 크나큰 전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밑의 작은 전개들은 언제든 변동성을 가졌다.
물론 그대로인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독의 증세가 빨라지는 것은 예상했던 경우의 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저 예상이 맞아떨어졌을 뿐이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안수찬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하아, 하~ ……심장, 심장이 필요해.”
빠르게 악화된 모습을 보이는 그는 이미 난 안중에도 없었다.
넋이 나간 채로 오크들을 찾으러 다닌다.
하지만 앞의 시야가 확보되질 않으니 찾는 데 난관을 겪었다.
설사 마주친다고 해도 지금 저 상태로는 누구 하나 해치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그 뒤를 적당히 따라가다가 몰래 뒤로 빠졌다. 그리고 아공간에 넣어 뒀던 심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안나와 안수찬, 둘이 먹을 심장은 이미 챙겨 두었다.
굳이 내가 챙겨 주지 않더라도 둘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챙겨 주고 싶었다.
이 김에 마음의 빚이라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나는 그에게 심장을 주기 전에 심장에 묻어 있는 피를 손목에도 묻혔다.
또 살짝 입에도 묻혀 줬다.
방금 막 사냥하고 온 것처럼 꾸며야만 했다.
준비를 끝내고 앞을 내다보니 어느새 그는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안개가 껴 있는 바람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찾아낼 방법은 있었다.
나는 마을 지도를 꺼내 주변의 빨간 점들을 확인했다.
‘저기 있네.’
가까운 곳에는 점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를 금방 찾아냈다.
안수찬은 여전히 오크를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도중에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강제로 멈춰 세웠다.
곧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는 두 눈의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심장을 건네며 말했다.
“드세요. 해독젭니다.”
말하자마자 그의 눈에서 이채가 띠었다.
“해독제……!”
그는 마치 귀한 물건을 다루듯 다뤘다.
“하읍!”
살기 위한 본능 때문인지 일체 망설임 없이 오크의 심장을 입에 가져갔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망설일 법도 하건만.
미래에 살아남았던 탑의 생존자답게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후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를 섭취한 그가 이내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입에 묻은 피를 쓱 닦더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준석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조금은 어수룩해졌던 말투가 이전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어요.”
싫은 기억을 떠올리듯 몸을 떠는 그였다.
그러고 보니 눈의 초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 근데 잠깐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분명 방금 전까지 나랑 같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건 어떻게 구해 온 거지?”
“도중에 자리를 비웠는데 몰랐습니까?”
“자리를 비웠다고요……? 어. 왜 내가 몰랐지.”
고개를 갸웃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음. 하긴 주변을 살필 경황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몸은 괜찮습니까?”
“예.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긴 한데. 평소에 안 먹던 걸 주워 먹어서 그런가…… 속이 약간 쓰리네요.”
그가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배를 손으로 문지른다.
“약간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안나! 그 녀석, 비위가 그닥 센 편이 아닐 텐데……. 그놈. 심장을 얻어 놓고도 못 먹고 있는 거 아냐?”
그녀의 비위가 얼마나 약하면 아까는 떨어져 있어도 별걱정을 안 하던 사람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저는 안나를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쪽은 어떻게 하실래요? 원하지 않으면 굳이 같이 안 가도 돼요.”
“그러면 전 다른 데를 돌아다니면서 안개를 제거할 방법이나 찾아보겠습니다.”
“저도 안나를 찾는 대로 바로 대안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그리고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서로 신호를 주는 걸로 하죠.”
“신호?”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음……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는 거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이네요.”
신호는 딱히 어떤 소리를 낼지 정하지 않고 서로 최대한 크게 낼 수 있는 소리로 정했다.
그리고 나는 다급히 가 보려는 그를 붙잡았다.
“아직 뭐 더 할 말이라도 남았습니까?”
난 아공간에 있던 심장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혹시 몰라서 하나 더 챙겨 뒀던 겁니다. 안나 씨한테 필요할 수도 있으니 챙겨 가세요.”
“언제 또 하나를 더……. 이건, 잘 가지고 있다가 잘 전달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오크랑 마주치면 방심하지 말고 조심하세요. 안개가 녀석들을 다르게 변화시킨 것 같습니다.”
“예? 다르게 변화시키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더 포악해지고 강해졌습니다. 길게 설명하는 것보단 녀석들을 만나 보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겁니다.”
“아, 음…… 그래 봐야 오크지. 뭐. 그래도 명심은 할게요.”
그가 빠르게 사라져 간다.
이것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해 주었다.
원래는 그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주안나를 구하러 간다고 하기에 계획을 바꾸었다.
‘혼자서 해결하자.’
굳이 안수찬 말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보다는 그것이 마음이 편하리라.
나는 지도를 꺼내 현재 위치를 파악했다.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대략 삼백여 미터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이동했다.
그러다 도중에 멈춰 서서 먼 곳을 응시하듯 앞을 내다봤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 표시로는 약 십 미터 밖에 정체 모를 대상이 있었다.
빨간색 점으로는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췩!”
내는 소리를 보니 오크다.
나는 곧바로 다크소드를 시전하여 지도의 빨간색 점 위치와 내 위치를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그리고 정면에 칼끝을 겨눈다.
순간, 손짓했다.
슈우우욱ㅡ 푹!
적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맞추지는 못한 듯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가 빨라졌다.
“우아아아!”
안개를 걷어 내고 매섭게 내려쳐 오는 도끼날이 얼굴에 들이닥쳤다.
나는 허리를 뒤로 살짝 눕혀 피하곤 아래로 두 손을 짚어 녀석의 머리를 걷어찼다.
“카학!”
그리고 오크의 몸에 박혀 있는 다크소드를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찰나 오크가 뒤로 넘어가며 날 노려봤다.
오뚝이처럼 다시 몸의 중심을 잡은 오크가 같은 도끼질을 해 왔다.
“쿠하아아!”
증표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쌍십자로 날아드는 연격을 피해 내며 다크소드를 손에 잡고 앞으로 찔러 넣었다.
녀석은 아예 피할 생각이 없는 듯 파고드는 검을 피하지 않았다.
푹!
그대로 목에 박히는 검.
보통이면 그 공격을 맞고 쓰러져야 정상이지만.
“크르르……!”
녀석은 여전히 죽지 않은 채 몸을 움직였다.
그러며 오히려 자기가 검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다크볼트.
파팍!
나는 두 번 주먹으로 때려 거리를 벌리고 뺨따귀에 검은 구체를 갈겼다.
콰앙!
“크허어…… 커허어!”
공격에 적중한 녀석의 얼굴은 찢겨진 살갗 안으로 빠르게 펌프질을 하고 있는 근육과 핏줄이 그대로 드러났다.
붉게 물든 두 눈은 광기가 서린 듯하다.
저것이 레드 포그 독에 중독된 오크의 진짜 모습이었다.
녀석들은 독에 대한 항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되레 그 항체가 녀석들의 정신을 파고들어 변화를 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오크의 심장을 먹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됐다.
다만 그 유지 시간이 매우 짧고, 각자 가지고 있는 정신력 수치에 따라서 다르게 영향을 끼쳤다.
정신력 수치가 강한 인간의 경우 거의 영향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만일 정신력 수치가 낮은 인간일 경우엔…….
“쿠하악! 쿠어어어!”
바로 저 녀석처럼 광기를 부리는 미친개가 되는 것이다.
목숨 따윈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오직 분노에만 충실한 감정의 노예로 말이다.
다크소드.
나는 다가오는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쿠헉…….”
괴성이 멎는다.
그리고 그리 질기게 움직이던 오크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던 나는 다시 가던 길로 발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오크 수장의 집에 도달했다.
집이 단층으로 되어 있긴 하나, 그 넓이와 둘레가 다른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런 집에서 살면 넓고 좋겠네.’
짧게 감상을 마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다.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방인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지하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끼익ㅡ
낡은 문을 열어, 컴컴한 곳의 계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철창으로 된 문.
철창문을 열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열쇠라면 이미 가지고 있었다.
오크 수장에게서 빼앗았던 열쇠.
철컥.
[숨겨진 저장고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에 메시지들이 더 있었다.
[선택 미션이 주어집니다!]
[문지기 샤프 울프들을 피해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문지기 샤프 울프들을 모두 정리한 후 저장고에 이르십시오.]
[선택에 따라서 보상이 바뀝니다.]
처음으로 주어진 선택 미션.
하지만 이건 물으나 마나였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정해진 길을 선택했다.
[미션을 선택하셨습니다.]
[문지기 샤프 울프들을 모두 정리한 후 저장고에 이르십시오.]
[제한 시간은 없습니다.]
몇 보 앞으로 더 발을 내딛자 어둠침침한 곳에 숨어 있던 샤프 울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덩치 큰 녀석들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기나긴 통로를 지키는 중이었다.
본래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꽤 요란을 떨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녀석들의 상태는 이미 좋지 않았다.
견제를 위해서 계속 이빨만 드러내고 있을 뿐.
저 녀석들 또한 레드 포그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나는 두 개의 다크소드를 양어깨 위로 올려 둔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크하앙!”
맨 앞, 선두에 있던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바로 손짓을 하여 한쪽 어깨에 떠 있던 검을 움직였다.
푸욱!
“깨앵!”
“커어엉! 커엉!”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늑대 녀석들도 달려들었다.
그러나 죽어 가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
겨우 검 두 자루를 이용해 그 많은 늑대들을 도륙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세웁니다!]
[수십 마리의 샤프 울프를 단시간 안에 처치하였습니다!]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20,000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기어코 통로 끝에 이른 나는 열려 있는 창살을 지나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쭉 둘러본다.
“워우.”
절로 감탄이 나왔다.
수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여기에 온 이유가 먹을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한동안 발동하지 않았던 점지 스킬이 발동한다.
다크월.
쿠구구구! 쿠구구구!
나는 중앙에다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벽을 세웠다.
그렇게 벽을 시전했다가 없애자 그곳에 길이 생겨났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던 바닥이 드러난다.
네모난 회색 벽돌들.
그중에 홈이 파여져 있는 벽돌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홈에 손가락을 끼워 들어 올렸다.
덜컹!
스위치를 켠 듯 곧 벽돌들이 아래로 꺼지며 큰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 밑엔…… 석판이 있었다.
그리고 낡은 책 한 권과 회색 돌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곧바로 거기에 있는 아이템들을 집었다.
[조각난 고대 석판C를 획득하였습니다.]
[오르크 비전 검술책을 획득하였습니다.]
[봉인 해제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좋았어.”
이것으로 필요한 석판들은 모두 모은 셈이다.
‘그렇담 풍요 로브를 얻는 문제는 해결이 됐고.’
나는 다른 아이템에도 시선을 돌렸다.
오르크 비전 검술책.
검술 스킬 중에서 등급을 매기자면 A급에 해당하는 고급 검술 스킬이었다.
하지만 톱날검과 마찬가지로 내가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우선 석판과 검술책은 아공간에 집어넣어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돌.
봉인 해제석.
이것은 회귀 전에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당연했다.
이건 하드 난이도에만 존재하는 물건이니까.
어디에다가 써야 할 물건인지는 알고 있다.
“후우~”
나는 크게 숨을 들이 내쉬며 저장고 끝으로 향했다.
그제야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벽의 마법진이 보였다.
우웅ㅡ 우웅ㅡ
들고 있던 봉인 해제석이 크게 진동한다.
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하게 떨리는 돌.
쩌저적ㅡ
동시에 벽을 보호하는 마법진은 금이 가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가까워졌지만 한 번 더 내디딜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 틈을 메우려 한 발 더 앞으로 내딛는 순간.
콰자자작! 쨍그랑!
마법진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며 마법진 뒤에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어두웠지만 내게는 그 안의 풍경들이 뚜렷이 보였다.
보통 등반자들은 이곳이 원래 음식의 저장고인 줄 안다.
하지만 실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봉인 감옥.
사람들에게는 잊힌 이름이었다.
한데. 과거에 왜 그리 불렸을까?
이유가 있었다.
이곳엔 녀석이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르르…….”
위용 넘치는 검은색 털 갈기와 황금색 두 눈.
드러낸 입 사이로 튀어나온 거대한 두 어금니.
그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발톱을 소유한 존재.
“캬하아아아아앙!”
신수 다크 울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