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탑 등반자 9화
9화 숨겨진 무덤 (2)
하얀 긴 머리카락과 흰 수염, 공허해 보이는 두 눈.
탁해 보이는 잿빛 피부.
그가 분신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네놈이 세포네를 어떻게 알고 있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녀 때문에 금기를 어기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탑을 올랐잖아.”
그가 세포네에게 가지는 집착은 엄청났다.
자신이 손해를 봐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보통내기의 등반자가 아니구나.”
어조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 속에 들끓는 화가 느껴졌다.
“항상 거울을 통해서만 세포네를 지켜보는 거, 지겹지도 않아?”
“그것까지 네놈이 어떻게……!?”
“영감. 제안 하나만 할게.”
“제안?”
“세포네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단 나와 계약이 아닌 신약을 맺어.”
“뭣이? 신약?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떠드는 것이냐!”
“모르면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지.”
신약.
신좌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계약을 맺는 것으로 일반 계약과 전혀 달랐다.
일반 계약은 신좌의 능력을 일부 빌려 오는 것이 전부이지만 신약은 신좌의 모든 능력을 빌려 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좌만이 가진 무기, 신기까지도 잠깐 동안이지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전에 난 하데스와 일반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 이번엔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신좌들과 계약을 아예 안 맺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그건 탑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신좌들을 이용해야 돼.’
하데스 입을 열었다.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거지?”
나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제우스와 신약을 맺겠지. 그리고 내 손으로 세포네를 죽이게 될 거고.”
고요한 물결처럼 잠잠하던 그의 얼굴이 주변의 어둠과 함께 크게 일렁였다.
“감히……!”
숨이 막혀 온다.
파직!
그때, 공중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며 숨통이 트인다.
하데스가 선을 넘으려 하니 탑이 개입을 한 것일 터.
나는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잘 선택해야 될 거야.”
“……제우스가 네까짓 놈과 신약을 맺을 것 같은가!”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제우스가 세포네를 노린다는 건 영감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회귀 전에 제우스는 한 등반자와 신약을 맺는다.
그리고 기어코 그 등반자에게 시켜 세포네를 죽인다.
실제로 하데스와 신약을 맺는데 실패하면 난 그 역할을 대체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등반자가 걸었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겠지만.
하나, 이런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데스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데카인을 죽이려면 제우스의 힘보다는 하데스의 힘이 필요해.’
하지만 결국 어떤 길로 가든 단순 계약을 맺었었던 그때보다는 전부 나은 방향이 될 것이다.
“만일, 네놈이 제우스를 선택해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지.”
슬슬 따분해지려고 한다.
“무슨 말을 계속 빙빙 돌려서 해. 서로 피차 시간이 없으니 선택하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건방진 놈. 이것으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이기고 지고가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것뿐이지.”
하데스가 침묵했다.
그러다 이내 무겁게 입을 연다.
“난 세포네를 얻고, 넌 내 힘을 써서 무엇을 하겠는 거지?”
“당연한 걸 왜 묻지? 등반자라면 탑을 오르는 게 전부일 텐데.”
“……좋다. 네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단 네놈이 세포네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지 못한다면 그땐 신약은 없던 얘기로 하지.”
계약과 달리 신약을 맺고 파기한다는 것은 신좌에게도 부담스러운 일.
그럼에도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나와 신약을 맺기 싫은가 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반드시 세포네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낼 테니까.
설사 그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신약이 깨진다고 해도, 대체할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얘기는 끝인가?”
곧 하데스는 내게 손을 뻗어 왔다.
“손을 잡아라.”
난 잿빛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을 잡는 순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미 결정을 내렸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이윽고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가 등반자에게 신약을 맺길 청해옵니다.]
[신약을 맺으시겠습니까?]
[동시에 이명을 밝히길 청해옵니다. 이명을 밝히시겠습니까?]
‘아니. 신약만 맺겠어.‘
이명을 밝혀 패를 까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내게 큰 힘을 빌려줄 신좌이나, 그렇다고 가까운 친우. 혹은 신뢰할 동료는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이용할 뿐이다.
곧 메시지로는 서로가 지켜야 할 약속들이 올라왔다.
하데스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전수하고 내가 필요할 때 신기를 빌려 주는 것.
그리고 난 약속대로 세포네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는 것. 또한 제우스의 신약자가 세포네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할 것.
제우스의 신약자로부터 세포네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한다는 것은 내가 언급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앞서 약속한 내용을 지키려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바로 수긍하고 넘어갔다.
나는 곧 선언했다.
“신약을 맺는 데 동의한다.”
[죽음이자 어둠을 그늘에 진 자와 신약을 맺었습니다.]
[등반자들 중 최초로 신좌와 신약을 맺었습니다!]
[등반자의 이명의 격이 오릅니다!]
[같은 등반자들 중 일부는 당신의 이명의 격을 보고 따르거나 혹은 우러러볼 것입니다!]
[일부 신좌들이 신약을 맺은 당신을 주시합니다!]
[일부 신좌들이 신약을 맺은 당신을 적대합니다!]
수많은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중에 이명의 격을 먼저 주목했다.
보통 어떤 신좌와 계약을 맺냐에 따라 오르는 이명의 격이 차이가 났다.
그리고 계약과 신약 사이에도 오르는 이명의 격 차이가 있다.
한물갔다고는 하나, 하데스는 격이 매우 높은 신좌.
나는 그런 신좌와 신약을 맺었으니, 이명의 격이 상당한 수준으로 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한 격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불러온다.
뿐만 아니라 탑에서 오는 마음속 공허함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는 이전에 계약을 했을 땐 없었던 것들.
물론 그때도 노력으로 이명의 격을 올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격을 올리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었다.
하지만 이젠 시작부터 다르다.
지금 이 정도의 격이라면, 이전에는 다다르지 못했던 신좌를 뛰어넘는 격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신약을 맺은 하데스가 말했다.
“약속대로 내 힘을 빌려주어야겠지. 원래는 내 힘이 담긴 물건 중 하나를 줘야 하나, 넌 이미 내 것을 가로챘으니. 그 반지를 매개로 내 힘을 전달해 주겠다.”
하데스가 팔을 뻗어 반지에 손을 댔다.
스으으.
이내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반지에 박힌 검은 보석으로 스며들었다.
[반지에 하데스의 힘이 깃들었습니다.]
[반지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반지에 새로운 스킬들이 각인됩니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새로운 스킬들을 습득하지 못합니다.]
[조건을 충족시켜 주십시오.]
나는 바로 반지의 옵션을 확인했다.
(((((((((((((((((((((((((((((((((((((((()
(귀속) 어둠의 반지
효과: 어둠친화력, 어둠내성, 빛속성마법 약화
조건부 효과: ……?
조건부 효과: ……?
스킬 습득: 다크스윔(Lv1), 다크웹(Lv1) ……?
(((((((((((((((((((((((((((((((((((((((()
원래는 없던 조건부 효과가 두 개나 생겼다
’신약을 맺어서 생긴 힘인가.‘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당장에는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차차 알아가게 될 터다.
그리고 이외에는 딱히 내가 알던 기존의 효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얻을 수 있는 스킬들이 더욱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했다. 자, 그럼 이제 네 녀석의 차례.”
하데스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세포네를 데려오는 거라면 당장에 못해. 알잖아?”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 세포네의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것이다. 신약도 그렇고. 평범한 등반자라면 알 수 없는 얘기일 텐데. 네놈의 능력이 무엇이냐. 이명 공개를 거부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겠지.”
그는 내 고유 능력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내가 지니고 있는 고유 스킬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말해 줄 의무도 없었다.
“이미 영감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그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지.”
“역시 그 능력인가…….”
아마 하데스는 지금 내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은 것은 예언과는 전혀 달랐다.
모두 실제로 겪은 일들이니까.
오히려 예언보다 더욱 뚜렷했다.
“내 하나만 경고하지.”
하데스가 내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려 두며 말을 이었다.
“그 능력을 너무 맹신하지마라. 괜히 네놈의 명만 줄어들 터이니.”
쿠구궁……!
그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
하데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더니 왔을 때처럼 신기루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보아하니 일행들을 데리고 온 것 같은데. 그중 한 녀석이 꽤 위태해 보이더군. 끌끌! 그래서 내 선물을 준비해 두었지. 기대를 해도 좋을 거다.”
콰가강!
다시 한번 요란스럽게 천둥소리가 울리곤, 나는 순식간에 하데스가 만들어뒀던 공간에서 벗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유희가 의식을 잃은 하성태를 붙잡고서 몸을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곧장 달려가 하성태의 상태를 체크했다.
딱 봐도 의식이 없었다.
‘다리만 다친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복부 아래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피를 많이 흘린 상황.
이대로 가만두면 죽을 터다.
“어때?”
유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도 그간 조금은 정을 쌓았는지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안 좋아.”
내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 또한 마음이 좋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연이지만 내가 데리고 다니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방치해 두는 건 옳지 않았다.
현재로써, 그를 치료할 방법은 두 가지.
하나, 2층에 있는 마을로 돌아가 신전에 포인트를 지급해 치료한다.
둘, 다른 무덤에 있는 그걸 사용한다.
첫 번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상태를 보았을 때 그만한 시간을 견뎌 낼 재간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법밖에 없었다.
‘역시 그걸 사용하는 수밖에 없나.’
나는 곧바로 자리서 일어나 뛰었다.
“이준석! 갑자기 어딜 가려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곳에는 하데스의 무덤 말고도 여러 무덤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한 곳엔, 하데스의 충직한 수하였던 로이드가 잠들어 있었다.
난 그 로이드의 피가 필요했다.
다만 하데스가 내 일행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했는데.
나에 대한 불만이 있는 녀석이기에 어디로 튈지 몰랐다.
아마…….
‘지금 날 골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녀석들을 깨운 거야.’
나는 다크볼트와 다크스윔을 번갈아 사용하며 미리 대비를 했다.
파지직! 파직!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하나를 생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금방 다크볼트가 만들어진다.
파지직! 파직!
파지직! 파직!
다섯 개 이상이 겨우 수 초 만에 형성이 됐다.
다크스윔 또한 시전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마법컨트롤로 내가 아무리 시전 속도가 빨라졌다고 해도 이건 평소의 시전 속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원인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둠의 반지 조건부 효과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효과 ‘고속캐스팅’이 발동합니다!]
‘반지 효과 중에 하나구나.’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하는데.
딱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건이 충족됐다는 것은 환경적인 요건이 충족된 것임이 분명했다.
덕분에 대비를 더욱 빨리할 수 있게 됐다.
잠시 후, 비석에 피로 글씨가 써져 있는 무덤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로이드의 무덤.
역시나 무덤 주위에는 녀석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커어엉! 커엉!”
피 색깔과 비슷한 붉은색 두 눈과 썩은 살과 뼈를 드러낸 개 다섯 마리.
녀석들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출구의 문지기이자 무덤지기들.
본래는 우리가 출구로 가기 전까지 잠에 들어 있어야 하지만 하데스가 강제로 깨운 것이었다.
“컹! 컹컹!”
보기만해도 살벌했다.
하지만 케르베로스와 비교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숫자만 많지, 정중앙에 있는 헬하운드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떨어져 나갈 터였다.
녀석들의 군집력은 저놈에게로부터 나오니까.
“컹컹!”
이내 개 다섯 마리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어느 방향으로 흩어지든 상관없었다.
파지직! 파직!
나는 준비되어 있던 다크볼트 십여 개를 하늘 높이 띄웠다.
그리고 정중앙 헬하운드에게 다크웹을 걸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후, 떠 있는 다크볼트들을 곧장 아래로 꽂아 내렸다.
콰가가가가강!
[10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포인트가 들어온 것을 통해 녀석이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컹컹! 끼잉! 낑!”
예상한대로 우두머리가 죽자, 나머지 녀석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녀석들을 내버려 둔 채 로이드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을 깨부수었다.
챙!
그 안에서 나온 검 한 자루와 로이드의 피가 담긴 병 한 개.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준석아! 빨리 와 봐! 숨을 안 쉬는 것 같아!”
하성태를 돌보고 있던 유희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가까이 다가가 하성태의 맥박을 짚었다.
박동이 희미하다.
나는 바로 하성태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병뚜껑을 열어 로이드의 피를 마시게 했다.
당사자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살리려면 이 방법뿐이다.
피를 다 마시게 한 후 기다렸다.
“뭔가 붉던데. 대체 뭘 먹인 거야?”
“피.”
“피!?”
“어. 평범한 피는 아니지. 뱀파이어의 피니까.”
로이드는 뱀파이어 일족이었다.
그런 그의 피를 마셨으니, 이젠 하성태 또한 로이드처럼 뱀파이어로 변하리라.
“그럼, 저 사람이 이제 뱀파이어가 되는 거야?”
“그런 셈이지. 하지만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때.
“하아압!”
아무런 반응도 없던 하성태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