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권 14화
289. 광기가 물들었다 (4).
요한이 이정도의 거리를 원한다 면 그것을 들어주자.
무리하게 접근할 필요도,그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헤르듀크는 요한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아. 그런데 프란츠는 내 사람으 로 끌어들여도 되나?”
“능력 되시면 하시죠. 개가 어떻 게 살든 그건 자기 인생이니까.”
프란츠가 해줘야 할 일은 네 번 째 전조 때 나타날 차원수와 싸우 는 것.
그 이후 마왕을 잡고 나면 요한 을 책임져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바그너 가문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뭘 해도 상관없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물론 프란츠를 빌미로 저한테 일 시키려고 하지는 마시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정당한 대가만 있다면 일 따위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거 기대하지. 자. 그럼 먹을 것도 다 먹은 것 같은데…… 슬슬 가봐야 하지 않겠나?”
“예. 그럼 율초아에게는 왕자님 께서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 다.”
“그건 맡겨주게.”
빈 접시를 내려놓은 요한은 그대 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문이 닫히자 요한은 씩 웃었 다.
‘헤르듀크도 이제는 나에 대한 욕심은 끊은 것 같고……이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다 음 대 국왕은 헤르듀크가 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에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만약 그가 왕이 되었다고 뭘 어 쩌 겠는가.
로드만 왕국의 정치 체계 자체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가 왕이 되든 나마스가 왕이 되든.
귀족들의 힘이 건재한 이상 왕가 가 대놓고 요한을 칠 수는 없었다.
“그럼…… 난 걱정 없이 내 할일만 하면 되겠네.”
* * *요한이 수도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났다.
매년 지불해야 하는 세금의 납부 가 끝난 그 다음 날이 되자 그가 있는 저택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요한 공자님. 저는 율초아 황녀님의 수족인 발레리아 다키스라고 합니다.”
검은색 갑옷에 얼굴을 전부 가리 는 투구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를 빤히 보다가 가소롭 다는 듯 웃었다.
“얼굴 까봐.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괜찮으시 겠습니까?”
“괜찮아.”
발레리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투구를 벗었다.
투구가 벗겨지자 드러난 것은 은 회색의 긴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 온 긴 귀.
은회색 머리칼과 대비될 정도의 진한 갈색의 피부는 그가 어떤 종 족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 눈 안에 있는 핏빛 눈동자를 마주한 요한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말했다.
“율초아 황녀님께서 보내신 거라 면…… 나한테 줄 게 있을 텐데?”
그의 말을 들은 발레리아는 요한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요한은 귀찮아하며 손 사래를 쳤다.
“내가 다크엘프라고 편견을 가질 줄 알았냐? 아니면 무시하며 신뢰 하지 않을 줄 알았냐?”
대륙에서 수인만이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다크엘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암흑시대 때 오래된 자들의 수족 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황금시대 때 그들을 부활 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다크엘프들은 많은 이들에게 백 안시당하고 있었다.
“역시…… 듣던대로군요.”
“소문?”
“저는 헬리안과 친구입니다.”
“헬리안? 네가 말하는 헬리안이 내가 아는 파룬의 보모인 헬리안이 맞나?”
“보모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어떤 사인데?”
“노예로 있던 시절 탈출할 때 힘 을 합친 사이입니다.”
그 이후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동생을 찾는 데 도움을 줬었다.
발레리아가 사정을 설명하자 요 한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냐? 뭐 그건 중요한 게 아 니고. 줄 거 있으면 빨리 줘봐.”
“예.”
그는 곧장 품에서 작은 두루마리 를 꺼냈다.
그것을 받은 요한은 인상을 구겼 다.
“황궁 쪽에 들어갔던 자들이 모 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라.”
“그나마 한 명이 탈출하기는 했 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그 도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부상이었지?”
“무언가 강한 것에게 팔과 귀가 쥐어뜯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쥐어 뜯겼다…… 그것 외에는?”
“그게…… 조금 믿기 어려운 일 이라서……“뭔 소리야?”
“자신을 공격했던 자는 자신을 백이라 밝히고 백 개의 팔을 가졌 다고 합니다.”
“"•…뭐?”
대수롭지 않게 듣던 요한은 두루 마리를 살피던 손을 멈췄다.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 군. 따라와라.”
그가 몸을 돌리고 들어가려 하자 발레리아는 당황했다.
요한이 향하는 곳.
바로 마고 후작의 저택이었다.
“……저같이 천한 자가 들어가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때. 정 뭐하면 내 부하라 고 하면 되니까 들어와.”
“으음……발레리아는 걱정하며 안으로 들 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그가 투구를 착용했을 때.
저택의 안뜰에서 테오와 메이가 나왔다.
“엇? 자작님. 이 늦은 시간에는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그리고 그자는 누굽니까?”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다.
이 오밤중에,그것도 수도에서 투구를 착용해 얼굴을 가린 자라니.
테오와 메이가 묻자 요한은 발레 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내 정보원 중 하나야.”
“아하.”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서 만나 시는 겁니까?”
“안 되냐?”
“그건 아니죠.”
“그럼 볼일들 봐.”
테오와 메이는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보아하니 오밤중에 대련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순식간에 기사 둘이 품은 의심을 요한이 지워버리자 발레리아는 감 탄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도 됩니까?”
“재들은 내 실력을 믿고 있으니 까.”
“율초아 님을 만날 때도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았는데…… 자작님. 저를 믿어주시는 겁니까?”
“정보원을 안 믿으면 누굴 믿냐? 뭐야. 너 나한테 지금 사기 치는 거냐?”
“그,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됐어. 그리고 교차검증은 또 할 거야.”
이미 양유위에게도 조사를 명령 해놨다.
아무리 율초아와 거래를 하는 사 이라지만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필로틴 제국의 제도에도 도둑길 드원들이 잠입했으니 그들에게 정 보를 얻어내 검증해야한다.
‘그것보다 백 개의 팔. 그 말이 좀…… 어쩌면 벌써 세 번째 전조 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암흑시대 에 있었던 오래된 자들을 지금으로 끌고 오는 것.
발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상황도 가정해야 했다.
요한은 발레리아를 데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백의 팔이라고 했나? 백의 팔을 가진 거대한 괴물을 만났다고 했 어?”
“아,아닙니다. 황궁에 침입한 자 들이 마주친 것은 한 남자였습니 다.”
“남자?”
“예. 그가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는 백의 팔의 권능이 있다고.”
“그리고?”
“그리고…… 반투명한 백 개의 팔이 황궁에 들어간 자들을 모두 찢어발겼다고 합니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그는 울먹거 리며 말했다고 한다.
“그 권능에 죽은 자들은 바론의 곁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흠……‘백의 팔의 권능이라. 그럼 아직 시작되지는 않은 건가?’
세 번째 전조는 오래된 자들을 불러오는 것이지 사도 따위를 만드 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을 빌리는 사도 정도라 면 제물만 잘 바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요한은 팔짱을 끼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황궁이나 수도에서 검은 로브 입고 다니는 놈들 못 봤냐? 대머리에 몸에 문신 많은……“혹시 올드원을 말씀하시는 겁니 까?”
“오? 알아?”
“예. 한때 수도에 나타난 적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율무기 황태자와 거래를 하려 했던 것도 봤고……“진짜?”
그건 몰랐다.
놀라는 요한에게 발레리아는 바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개들이 손잡고 있냐?”
“그건 아닐 겁니다. 올드원들은 필로틴 제국의 공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왜?”
“그들이 황궁에 침입했고,그곳에서 꽤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 다. 개중에는 황족들도 있어 서……“어허. 미친놈들.”
제정신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 만 그런 짓까지 했을 줄이야.
요한이 감탄하자 발레리아는 한 숨을 쉬었다.
“그때 그들을 전부 죽인 것이 바로 율경입니다. 올드원이 죽인 황족 중 하나가 율경의 아들이지 요.”
“오…… 그렇군.”
“그래서 올드원들은 수도에는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그런가?”
“작정하고 숨어다닌다면 모르겠 지만…… 수도에 대한 통제가 심 한 만큼 그건 힘들 겁니다.”
‘그럼 올드원이 개입한 건 아니 라는 건가?’
“그럼 걔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 지?”
요한이 신기해하며 중얼거리자 발레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들었 다.
“제가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해봐. 해. 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봐. 누가 못하게 막았냐?”
그는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들어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 이 이야기는 다크엘프의 치부와 관련된 것이다.
망설이던 발레리아는 무거운 한 숨을 내쉬었다.
“그저 소문입니다만…… 황궁에 서 오래된 자를 키우고 있다는 이 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건 요한도 처음 듣는 이야기 였다.
회귀 전에 필로틴 제국의 황궁 에는 요한도 들어가 봤다.
하지만 그곳에 오래된 자 같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가기 전에 처분되 었을 수도 있겠지만……만약 그랬다면 흔적이라도 있었 을 것이다.
요한이 떨떠름해 하자 발레리아 는 다급히 설명을 이었다.
“그저 소문입니다. 죽음의 대지 에 들어가기 위한 연구를 위해 오 래된 자를 돌본다…… 뭐 그런 얘 기죠.”
“에이〜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다. 애초에 오래된 자가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죠? 하하하. 그래서 저도 망설였던 겁니다……발레리아가 웃자 요한은 씩 웃 었다.
“그래도 조사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아.”
“……예?”
허황된 소문으로 치부하고 넘어 가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요한이 이렇게 말을 꺼 낼 줄은 몰랐다.
놀란 발레리아에게 요한은 대뜸 말했다.
“도둑 길드의 길드원을 이용해 서 황궁 지하의 정보를 얻을 수 있나?”
“그건……“못해?”
“힘들 겁니다.”
이미 황궁에 한 번 잠입했다가 모두 죽었다.
도둑 길드에서도 함부로 움직이 지는 못할 거다.
발레리아가 난감해하자 요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크림슨 우드의 일도 있고 아예 마냥 무시하기만은 어려운 일이 군.’
만약 진짜로 오래된 자를 돌보 고 있었다면?
물론 필로틴 제국에도 바론 교 단이 있는 데다가 상아탑이나 연 금술사 길드가 있다.
그러니 오래된 자의 기운이 느 껴지면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 을 것이다.
하지만 모종의 방법으로 그 기 운을 억누르고 있었다면?
‘회귀 전에 봤던 것이 전부라고 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번에 녹색 산맥에 다녀오며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 역시 회귀 전에 모든 것을 봤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실제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답 은 없지.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 봤으면 좋겠는데……하지만 황궁은커녕 제도조차도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혹시 제도에 내가 갈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그곳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요한 자작님에 대해서 압니다. 그리고……제도는 검문을 철저하게 한다.
거기에 수도 내에서는 얼굴을 함부로 가릴 수 없다.
“마법으로 어떻게 숨길 방법 은?”
“그것도 힘들 겁니다. 사람 가 죽이라도 뒤집어써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는 이상……‘그럼 방법이 있겠군.’
요한은 무림이 있던 차원에서 썼던 방법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 다.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 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