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권 4화
179. 빨리 만들게 (2).
침묵이 댄스홀을 가득 메웠다.
요한은 얌전히 레이몬을 지켜보 았다.
그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움 직일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요한이 주시하는 사이 레이몬은 빙긋 웃었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후후후.”
거절당했지만,레이몬의 표정은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레이몬은 힐 끔 요한을 보았다.
“저 녀석이 선배의 행복입니까?”
“요한이 가져다준 작은 행복이란 다.”
요한만이 아니다.
바그너 영지에서 머무르며 아단 이나 헤갈,유아랑.
그 외에 윌카스트 백작이라든가.
바그너 영지의 백성들이라든가.
가끔 오는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그렇다.
그들이 자신에게 의지하고,또 존중하는 모습.
그것은 가족을 잃은 빌헬미나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면 괜찮아. 레이몬. 너도 이제 로드잖니.”
“예.”
“너는 분명 마법의 극의에 도달 할수있을 거야.”
빌헬미나의 상냥한 말을 들은 레 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를 홀짝이자 빌헬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바그너 영지에 계속 있을 거란다. 그러니 언제든지 찾아와주렴. 네가 좋아하 는 미트 파이를 만들어줄 테니까.”
미트 파이라는 말에 레이몬은 살 짝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예전에 빌헬미나가 레이 몬에게 처음 해줬던 요리였다.
“선배.”
“음?”
“사실 저 미트 파이. 별로 안 좋 아했습니다.”
그녀의 손자가 좋아하던 요리가 미트 파이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 빌헬미나는 미 트 파이를 만들 줄 몰랐다.
그렇기에 연습이 필요했고,그 연습의 결과물 처리는 항상 레이몬 이 맡았었다.
사실은 미트 파이를 그리 좋아하 지도 않았는데.
빌헬미나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 어 좋아한다고 말하고,억지로 먹 은 것에 불과했었다.
“그랬니……그제야 빌헬미나는 레이몬의 마 음을 눈치챘다.
"미안하구나.”
“아뇨. 그 대신.”
레이몬은 요한이 따라 준 차를 전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씩 웃었다.
“전 선배가 만들어준 야채수프 좋아합니다. 나중에 먹으러 가겠습 니다.”
“후후…… 그래. 언제든지 찾아 오렴.”
그것만으로 끝났다.
레이몬도 더 할 말이 없었고.
빌헬미나도 더 해줄 말이 없었 다.
“요한. 그럼 나는 먼저 가볼 테 니……“예. 할머니. 늦었으니까 쉬세요.”
밖에서 기다리던 메이가 빌헬미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녀가 완전히 댄스홀을 나가자.
서서 그녀를 배웅하던 레이몬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어…… 괜찮으십니까?”
“……그,그래. 괜찮다.”
빌헬미나의 앞에서는 그저 허세 를 부렸을 뿐이다.
실상은 마음이 꺾였다.
그토록 오랜 시간 유지하던 첫사 랑이자 짝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어버렸다.
“이런 걸 보고도 사랑이 뭐가 멋 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멋진 것이다.”
씩 웃은 레이몬은 요한의 팔을 꽉 잡았다.
“팁니까?”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정말 마법밖에 없게 되었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계속 마법에만 집중했다.
로드가 된다면.
훌륭해진다면 빌헬미나를 돌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결국 빌헬미나는 자신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는 다른 이들 이 치유해주었다.
더 이상 자신이 두가지 목적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가지에만 집중하게 되었으니.
좀 더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엘릭서 말이다.”
“예.”
"반년 안에 만들어주마.”
“……진짜 괜찮은 겁니까?”
엘릭서 정도 되는 최고급 물약을 만든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마법의 극의에 다가가는 일이다.
이제야 요한은 레이몬의 말이 이 해가 되었다.
첫사랑.
남은 미련.
그것을 끝냄으로써 완전히 마법 에 집중하려던 것이었다.
“솔직히 좀 기대하시지 않으셨습 니까?”
“그래. 했다. 하면 안 되냐?”
울컥한 레이몬은 싸늘히 말했다.
요한의 말대로 솔직히 이번에는 기대했었다.
상아탑에서 빌헬미나가 나가고 그녀를 찾아갔었다.
그때 그녀는 너무나 큰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받아주지 못했 다.
이후에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홀린 것처럼 굶주린 이들의 배만을 채워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타이론 영지 때였다.
그때 그녀가 말했었다.
이제는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 했었다.
그렇기에 찾지 않았다.
소식을 듣지도 않았다.
두려워서.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 어서.
그런데 이곳에서 만나게 된 빌헬 미나는 달랐다.
가족이 살아 있을 때보다는 약하 지만 그래도 밝은 미소를 띠고 있 었다.
그것에 조금은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고맙다.”
“말로만 하지 마시고 뭔가 보답 이라도 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엘릭서를 더 빨리 만들어준다고 했을 텐데.”
"그럼 더 빨리 마법서와 연구일 지를 보시겠군요.”
“하아. 좋아. 뭘 원하지?”
그의 질문에 요한은 바로 답했 다.
“상아탑 내부에 심해의 주인의 석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어떻게?”
보는 자들이 미쳐버리는 물건이 바로 그것이다.
너무 피해가 심해 차마 연구는 할 수 없어 봉인해 둔 것.
그것을 요한이 언급하자 레이몬 은 크게 놀랐다.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접니다. 그거 주십시오.”
레이몬은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 다.
그 시선에 어깨를 으쓱인 요한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실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케리만을 해치우고 얻은 것이지요.” 상자를 열어 성해포를 걷었다. 슬쩍 드러난 불의 흡혈귀의 석상을 본 레이몬은 인상을 쓰며 주춤거리고 물러났다.
"이런 것은 가지고 있을 만한 것 이 아니다. 이걸로 뭘 하려는 것이 냐.”
“별거 안 합니다. 그냥 모으는겁니다.”
‘외부의 개입을 최대한 막으려는것이지.’
회귀 전에 그들이 얼굴 없는 자 의 석상에 홀렸던 것처럼.
엄한 놈들이 개입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될 석상이 필요했다.
그러니 아예 접근 자체를 막아버 리기 위해 석상을 모두 모아 두고 싶을 뿐이었다.
“ —O으1그 ......•”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석상 또한 상아탑의 물품이니…… 상아 탑의 의뢰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관리를 잘할 수 있나? 너도 알 고 있겠지만 이 석상은 위험한 물 건이다.”
처음 그 석상이 발견된 마을은 광신도들로 모여 있던 곳이다. 인 신 공양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제사까지 진행되었었다.
그곳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레이 몬도 포함되어 있었었다.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며 그는 고 개를 저었다.
“관리를 잘못하면 그 끔찍한 사 건이 재현될 수 있다. 마스터라 하 더라도 오래본다면 석상이 내뿜는 광기에 휩쓸릴 수 있어.”
"압니다.”
“잘 보관할 수 있나?
“예.”
요한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레 이몬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내어줄 수 밖에.
“한번 해보지.”
“감사합니다! 레이몬!”
‘그거 얻으려고 상아탑에 잡혀서 이 년 동안 미친 듯이 의뢰를 해결 했었는데.’
빌헬미나 덕분에 이 년이라는 시 간을 벌게 되었다.
요한이 만족하자 레이몬은 얼굴 을 쓸어 만졌다.
“정말 오늘은 무척이나 피곤하 군. 아무것도 생각하지말고 푹 쉬 어야겠어.”
* * *다음날이 되자 레이몬은 빌헬미 나를 만나지 않고 떠났다.
일단 이번 일에 상아탑은 개입하 지 않겠다는 확답은 받았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제 치안통제국의 해체만 남았 군.’
하지만 그것도 딱히 걱정되는 문 제는 아니었가.
요한이 벌인 한차례의 사냥 때문 일까?
치안통제국의 행동은 위축되어 있었다.
거기에 요한은 이미 위조 금화사 건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요한은 속 편히 평소 하는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요한. 아침 먹어야지?”
마고 후작의 저택에서도 요한의 아침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훈련을 마치고 들어오자 빌 헬미나는 웃으며 요한을 반겼다.
“어. 드레스 벗으셨네요?”
어제 하루 꾸몄던 것이 마치 꿈 처럼 느껴진다.
요한이 익히 알고 있는 빌헬미나 의 모습으로 그녀는 돌아와 있었다.
“그 옷이 예쁘기는 하지만 일하 기에는 불편하잖니.”
“선물로 드릴 테니 가끔이라도 입어주세요. 바그너 영지에서도 파티를 할 때가 많으니까.”
“그래. 한번 생각해보마.”
“아예 파티 때마다 제 파트너로 참석해주면 어떠세요?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른을 파트너로 모시 는 경우는 많은데.”
“그런 소리 말렴. 난 네가 어여 쁜 신붓감 데리고 오는 것을 꼭 보 고 싶으니까.”
빌헬미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자신이 괜히 요한의 혼삿길을 막 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귀족들에게 요한의 인기는 꽤나 높은 편이었다.
조금만 영애들에게 관심을 보이 면 금방 결혼할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사고만 치며 돌아다니니 빌헬미나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껍”
“이상한 소리 말고 아침 식사나 하렴. 네가 좋아하는 오믈렛이랑 캐비지 롤 해놨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만 닦고 가 지요.”
콧노래를 훙얼거리며 걷는 빌헬 미나를 보며,요한은 쓰게 웃었다.
* * *아침 식사가 끝나고,다시 훈련 을 가려는 요한을 윌카스트 백작이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난 오늘 내려갈 생각이다.”
“아. 그렇군요. 마고 후작님도 같 이 가십니까?”
“그래야겠지?”
겨울도 아닌데 영주가 자리를 오 래 비워 둘 수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 바그너 영지에는 업 무를 대신해 줄 사람도 없다.
지금쯤 아단과 유아랑,하온달이 미친 듯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피로를 생각해서라도 얼 른 내려가야 했다.
“가는 길에 야스진도 데려갈까 생각 중인데. 넌 어떻게 할 거냐?”
“야스진이요……요한은 힐끔 야스진을 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내려가고 싶냐?”
“제가 필요하십니까?”
“있으면 좋긴 하지만. 뭐 없으면 없는 대로 할 수 있으니 괜찮아. 아버지 가실 때 같이 가도록 해.”
자신이 없는 사이 치안통제국과 도둑 길드가 싸우게 될 수도 있었 다.
그때 부상자가 생길 것을 대비하 기 위해서 야스진을 뒀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일도 거의 막바지나 다름없으니 그가 없어도 된다.
요한이 손사래를 치자 야스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공자님 심심하시면 제가 남지 요.”
“심심할 틈이 어딨냐.”
“위조 금화 사건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그 말에 야스진은 식은땀을 흘렸 다.
뭔가 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이 야기 였다.
야스진은 옆에 있는 윌카스트 백 작에게 다급히 말했다.
“저,백작님. 저보다는 백작님께 서 남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 습니다.”
이제는 요한의 표정으로 대충 분 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걱정하는 야스진과,더 걱정하는 윌카스트 백작.
둘을 향해 요한은 여유롭게 웃었 다.
“할머니는 남을 겁니다. 사고 안 칠 테니 걱정 마시고 가십시오. 메 이! 메이!”
“예!?”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마고 후 작이었다.
그의 마차에 짐을 싣던 메이는 요한이 부르자 허겁지겁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랑 야스진도 가는 김에 좀 같이 모시고 가줘.”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빌 헬미나 님은 어떻게 합니까?”
마침 빌헬미나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녀를 향해 요한은 웃으며 말했 다.
“할머니. 전 조금 더 수도에 남 아야 하는데. 같이 있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요한의 요청에 빌헬미나는 상냥 히 웃었다.
“물론이지.”
그녀의 답을 듣자마자 월카스트 백작은 빌헬미나의 손을 꽉 잡았다.
“빌헬미나. 부탁드립니다. 저 녀 석이 사고 좀 덜 치게 막아주십시 오.”
“호호……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요한은 작 게 투덜거렸다.
“누가 들으면 제가 사고만 치는 줄 알겠네요.”
윌카스트 백작과 빌헬미나는 그 의 불만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