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권 17화
142. 계시가 있었다 (2).
이정도로 운을 띄웠다면 플로란 스가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플로란스가 온다고 생각은 하 고……. 다음은 설득할 방법인데.’
하지만 설득 자체가 딱히 어려운 것은 아니 었다.
그리고 플로란스가 원하는 것은 요한 역시 바라는 것이었다.
마왕 등장의 두 번째 전조인 백 색병.
마왕의 힘을 줄이기 위해 요한도 백색병의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했 으니 말이다.
‘방법이야 알고 있으니 플로란스 가 오면 열심히 굴려야겠군.’
회귀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이번에는 플로란스를 써먹을 수 있다.
‘광약에 플로란스라……. 천하십 강 중 둘을 써먹을 수 있으니 어렵 지 않겠네.’
마왕이야 혼자 잡는다 치더라도.
그 전조를 막는 것까지 혼자 할 필요는 없었다.
할 일도 많은데 떠넘길 수 있는 것은 좀 떠넘기는 게 낫다.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으 며 중얼거렸다.
"일이 좀 쉬워지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통신마법이 끊어진 수정구를 들 고 나온 요한을 향해 마법사는 의 아해했다.
그를 향해 웃으며 요한은 수정구 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통신 끝났으니까 계산하자. 얼마냐?”
“기밀 통신에…… 시간이 이정도 니. 천 골드 되겠습니다.”
“많이도 받네.”
“어,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정 해진 가격이라서.”
송구스러워하는 그에게 요한은 손사래를 쳤다.
딱히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아니 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마고 후작님의 저택으로 받으러 오도록.”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에 대충 답해 준 후 요 한은 기다리고 있는 헤이로나를 툭 쳤다.
“가자.”
“끝나셨어요? 무슨 얘기를 하셨 어요?”
“나중에 플로란스가 너한테 연락 할 거다.”
“스승님이요!?”
“그래. 그때 답변을 주겠지. 뭐, 내 생각에는 만나자고 할 것 같다 만.”
진짜로 플로란스를 설득할 줄이 야.
헤이로나가 알기로 플로란스의 고집은 쇠심줄을 넘어섰다.
그런 고집을 꺾어버린 요한이다.
그녀는 요한을 새삼스럽다는 눈 으로 바라보았다.
‘프란츠가 항상 요한 공자님이 괴물이라고는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내가 오래된 자의 자료를 가지 고 있다고 했지.”
헤이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요 한을 응시했다.
“뭐. 왜. 뭐,“진짜 갖고 계세요?”
“설마 없는데 오라고 했겠냐.”
케리만을 잡으며 얻은 불의 흡혈 귀의 석상이 있었다.
요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헤 이로나는 깜짝 놀랐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별 것 아니야. 그럼 우리 만남 은 여기까지로 해야겠군.”
어느새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대로 마고 후작의 저택으로 돌 아갈 생각인 요한 앞에 서며 헤이 로나는 방긋 웃었다.
“그런데 공자님. 오늘 파티에 참 석하시죠?”
“그래야겠지.”
마고 후작이 신신당부를 했으니 얼굴 정도는 비쳐야 할 거다.
요한이 대답하자 헤이로나는 특 유의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너 이상하게 나한테 친근하게군다? 무슨 속셈이냐?”
“소,속셈은요.”
헤이로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 다.
하지만 요한이 그것을 놓치겠는 가.
그는 시큰둥한 눈으로 헤이로나 를 보며 말했다.
“프란츠랑 연애질을 하든 뭘 하 든 난 말리지는 않으마. 그렇다고 도움까지 청하지는 마라.”
“아,아이참. 그런 거 아닌데.”
충분히 그런 것으로 보인다.
헤이로나의 얼굴에는 홍조와 함 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한 어색 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럼 난 간다.”
혼자 신음하고 부정하는 헤이로 나를 남겨 둔 채 요한은 마고 후작 의 저택을 향해 걸었다.
‘밥도 잘 먹었으니 오늘도 열심 히 훈련을 해야겠군.’
파티는 달이 뜬 후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훈련에 집 중할 수 있다.
요한은 콧노래를 훙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통신마법을 끝내고 플로란스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에는 수많은 도안들과 그 림,석상이 놓여 있었다.
이 세상의 생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생물들의 그림.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일으 키는 도안.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그저 눈길을 살짝 주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기괴한 석상들도 있었다.
또 몇몇은 플로란스조차도 감당 하기 힘들어 천으로 가려 놓은 것 들도 있었다.
모두 암흑시대에 있었던 오래된 자의 자료들이었다.
그것들을 훑어보던 플로란스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대기근 이후 꾸준히 자료를 찾고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소금이 되는 병 에 대해서는 발견된 것이 없었다.
“혹시 요한도…… 오래된 자를 이용해 절맥을 치료한 것일까?”
요한의 절맥은 꽤나 유명한 것이 었다.
천하십강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 제들도 도전을 했지만 그의 벽은 누구도 부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요한이 절맥을 치료했다.
거기에 마스터까지 올라갔다.
황금시대에도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었던 절맥이다.
그런 절맥을 갑자기 치유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플로란스는 그 이유가 요한이 가 지고 있다는 오래된 자의 자료 덕 분이라고 판단했다.
“……시간은 없지만.”
그래도 가봐야 한다.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다면 찾아 야 한다.
플로란스는 천천히 하얀색 후드 를 벗었다.
그 순간 찰랑이는 긴 백발과 함 께 미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 다.
그 백발 사이에는 용인의 특징인 커다란 두 개의 뿔이 존재감을 드 러내고 있었다.
후드를 벗은 플로란스는 벽면에 걸려 있는 위험한 도안들을 서랍에 넣었다.
용인인 플로란스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석상들은 신성력이 담긴 상자 에 봉인해야 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시작하며 플 로란스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결연한 의지를 담아 중얼거렸다.
“헤이로나. 너만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주마.”
천하십강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자에 관한 연구를 하기위 해 위험한 던전과 유적을 탐사했 다.
그것은 용인의 강한 체력과 힘으 로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 다.
하지만 대기근 이상의 위험을 막 기 위해서.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플로란스는 쉬지 않았다.
그렇게 쌓인 피로와 상처는 플로 란스의 몸을 병들게 만들었고.
결국 그녀는 검은 숲에서 쓰러졌 었다.
그때 플로란스를 살려줬던 것이 헤이 로나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어떤 자인지도 모르는 자를 구해 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니 너만은 반드시 구한다.’
플로란스는 자신이 봤던 계시를 떠을렸다.
수많은 소금 시체들 사이에서 유 일하게 살아남은 자신의 품 안에.
슬픈 미소를 띠며 하얀 가루가 되어가는 헤이로나를.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자신을 구원해줬던 소녀를.
자신의 희망이었던 제자를.
자신의 절망이었던 그녀를.
플로란스는 주먹에서 피가 나오 는 것도 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만은 반드시……꽤 많은 사람들이 왕궁의 앞뜰에 있는 파티장에 모였다.
그들 사이에 서 있던 요한은 잔 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요한 공자. 술은 드시지 않는 것이오?”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귀족이 다 가와 말을 걸었다.
그가 내민 술잔을 잠시 응시하던 요한은 빙긋 웃으며 사양했다.
“술은 즐기지 않아서……"그래? 아쉽게 됐군.”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누구지?’
요한이라고 해서 모든 귀족들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방 귀족들의 얼굴 정도는 익혀두었다.
하지만 이 파티장에는 중앙귀족 들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요한이 모르는 얼굴 들도 꽤 있었다.
그저 중앙귀족 중 하나라고 생각 한 요한은 그가 떠나가자 음료를 한모금 마셨다.
“어이. 요한. 혼자 뭐 하고 있나?”
요한이 구석에서 음료만 홀짝거 리자 보다 못한 헤르듀크가 다가왔 다.
"이번 환영파티의 주역 중 하나 인데 왜 구석에 있는 건가?”
“정략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파티라고는 하지만 사교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귀족들의 눈치 싸움뿐.
특히나 이 파티는 국왕이 연 파 티다.
그렇기에 중앙 귀족들뿐만 아니 라 수도에 와 있던 지방 귀족들도 대부분 참가했다.
견원지간인 둘이 함께하는데 좋 은 분위기가 생기겠나.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요한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파티를 즐기는 사람이 있 기는 합니까?”
“음?”
“제가 보기엔 줄타기를 하는 사 람들밖에 없어 보입니다만.”
“한 명 있지 않은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쾌활한 웃음을 터트리는 소녀가 있었다.
헤이로나 엘도란.
토도 백작의 앞에 선 채 그녀는 중앙,지방 가리지 않고 귀족들에 게 웃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주 신났네. 다른 나라라 이건 가?”
“엘도란 상단을 알릴 수 있는 좋 은 기회니까. 그녀로선 중앙 귀족 이든 지방 귀족이든 상관없겠지.”
아카데미가 방학인데도 그녀가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이런 것들 때문이다.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들에 참여 하며 로드만 왕국에 엘도란 상가의 지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쾌활하고 붙임성 많은 성격 덕분 인지 영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것을 본 헤르듀크는 쓰게 웃었 다.
“누가보면 이번 파티의 목적이 엘도란 상단의 설명회인 줄 알겠습 니다.”
“하하…… 그래도 명목은 축하파 티지.”
“그럼 축하할 것 빨리하고 끝냈으면 좋겠군요.”
이렇게 시간을 때울 바에는 가서 훈련이나 하는 게 낫겠다.
요한이 투덜거리자 헤르듀크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심심한가?”
단순한 축하파티라면 즐기기라도 하지.
대놓고 중앙귀족과 지방귀족 사 이의 견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할 일이 없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날리는 것이 요 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그를 헤르듀크는 웃으며 달 랬다.
“이거 내버려뒀다간 사고만 치겠 군. 적당히 상황 봐서 돌아가도록 하게. 뒤는 내가 맡을 테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언제 나오십니까?”
“슬슬 나오실 때가 되었는데…… 아. 이제 나오시는군.”
굳게 닫혀 있던 왕궁의 문이 열 린다.
저곳으로 국왕이 나오면 그때부 터 축하식이 시작된다.
요한은 잔을 놓고 윌카스트 백작 의 옆으로 향했다.
"타이로돈 국왕 폐하께서 납십니 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에밀리의 호위를 받으며 국왕이 걸어 나왔다.
파티장에 나온 그는 차분한 어조 로 말했다.
“북방에 다녀온 이들을 위한 환 영파티일세. 다들 즐겨주게나.”
그의 선언이 시작되었다.
이후 긴 건배사가 이어지고,짧 은 건배식이 끝났다.
국왕은 북방에 다녀온 귀족들을 모아 그들에게 직접 술과 음료를 따라주었다.
그에게 음료를 받아 마시고 돌아 온 요한은 기다리고 있던 헤르듀크 에게 작게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게나.”
그가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겼을 때.
국왕의 앞으로 한 중년인이 걸어 갔다.
“폐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파티장이 술렁거린다.
요한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인간은……아까 요한에게 다가왔던 남자였 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그는 국왕의 앞에 부복했다.
“말해보게. 외무대신 차이로 백 작.”
‘외무대신이라…… 중앙 귀족이 었군.’
허락이 떨어지자 차이로 백작은 단호히 말했다.
“이번 북방 원정에서 필로틴 제 국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들었 습니다!”
“그 보고는 들었다만.”
“이번 일로 필로틴 제국과의 관 계가 악화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철없이 필로틴 제국과의 관계를 악 화시킨 저 요한에게!!”
“ ”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그의 외침은 한순간에 정적을 만 들어냈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가 떨어져 도 들릴 것 같은 불길한 정적을.
“지랄한다.”
요한은 비웃음으로 단번에 깨버 렸다.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