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2화
87. 도움의 대가 (4).
요한이 히죽 웃자 헤르듀크는 설 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재야에 있기를 바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따 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요.”
“뭔가?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 고 싶은데.”
자신의 일에 끼어들려는 헤르듀 크를 요한은 무심히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은 헤르듀크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뭔 눈이……헤르듀크도 일국의 왕자로서 수 많은 사람을 만났다.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감정 정도 는 가볍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요한같은 시선은 그도 많 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바 로 ‘무(無)’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길가의 돌멩이 정도로 생 각하고 있군.’
마스터들 중에는 귀족의 자리를 제안 받아도 거절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이들은 자신만의 주관을 가 지고 있다.
상대가 왕족이든 귀족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이 인정한 것 만관심을 둔다.
아직 익스퍼트이며,국왕조차도 아닌 헤르듀크다.
그가 아무리 여기저기서 뛰어난 사람이라 칭찬받는다고 하더라도.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 다.
‘마스터라 이거지?’
요한 역시 그런 부류일까?
헤르듀크는 요한의 눈을 마주하 며 살짝 주먹을 쥐었다.
‘이거 자존심 상하는군.’
요한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반드시 국왕의 자리에 올라가주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요한이 자신 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이다.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을 보는 것 이 아닌.
모실 대상은 아니더라도 자신 자 체를 제대로 봐줄 것이다.
헤르듀크는 쥐고 있던 주먹을 살 짝 펼쳤다.
"그런데 내게 부탁할 일은 뭐 지?”
“제 동생이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왕자님의 파벌에 넣어 주십시오.”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예상하지 못한 요청에 헤르듀크 는 의아해했다.
“혹시 윌카스트 백작이 내 밑으 로 들어오려 하나?”
“그럴 리가요.”
“자네도 내 사람이 될 생각이 없 다면서?”
"예.”
"그런데 동생을?”
"예. 그리고 거기서 좀 맡아주십 시오.”
“맡아달라는 게……“게으름 피우지 못하게 하고 수 업 제대로 듣게 하고. 또 애먼 짓 거리 못 하게 하며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을 시 곤장 열 대를 쳐주십 시오.”
내용만 들어보면 어린애를 부탁 하는 것과 같았다.
당황한 헤르듀크는 떨떠름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었다.
“분명…… 프란츠 바그너였지? 내가 알기로 꽤 괜찮은 기사라고 들었는데.”
"그저 소문입니다. 제대로 할 줄아는 게 없는 애송이이니 많은 지 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알려진바에 의하면 프 란츠는 충분히 훌륭한 기사에 속했 다.
그런데도 요한의 평가는 신랄하 기 그지없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프란츠가 자신의 파벌에 들어온 다면 그에게도 나쁜 것은 없었다.
프란츠 자체도 인정할만 하니 괜 찮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이었 다.
요한은 로드만 왕국에서 현재 최 고의 이슈거리였다.
그 요한의 동생이 파벌에 들어온 다면?
당연히 헤르듀크의 파벌이 커진 다.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그래도 되나? 프 란츠가 내 파벌에 들어오면 난 그 걸 이용할 텐데.”
“마음대로 하시죠.”
“그만큼 동생이 걱정되는 건가?”
“예. 진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아서…… 형으로서 정말 걱정만 되는군요.”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말하니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헤르듀크는 복잡해 하다가 고개 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럼 바로 프란츠를 소개해드리 겠습니다.”
요한이 나가자 헤르듀크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걸 보고 동방 쪽에서는 여 우에게 홀린 기분이라고 했었지?’
이번 거래로 둘 다 원하는 것을 이뤘다.
아니,어찌보면 헤르듀크에게 더 이득인 거래였다.
하지만 그는 어째 요한에게 꽤나 말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째 왠지 내가 손해를 본 것 같은데.’
파티장으로 복귀하면서도 헤르듀 크는 땡감을 씹은 듯한 떨떠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 나올 때보다 더욱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파티장에 울리고 있 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짝을 찾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요한은 손가락 을 겨눴다.
“저 녀석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 은 파티장 중앙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프란츠였다.
순식간에 그를 찾아낸 헤르듀크 는 히죽 웃었다.
“오호…… 춤 실력이 제법이군.”
“아직 멀었습니다.”
잠시 후 연주가 멈추고 댄스가 끝났다.
사람들이 흩어지며 잠시 휴식의 시간이 진행되자 요한은 프란츠를 불렀다.
“프란츠.”
“아. 예! 부르셨습니까. 형님.”
요한의 부름에 프란츠는 바로 달 려왔다.
벌써 인맥을 다졌는지 그가 있던 자리에 모인 공자들과 영애들은 프 란츠를 향해 상냥히 웃고 있었다.
그들을 힐끔 본 요한은 프란츠를헤르듀크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인사부터 드려라. 헤르듀크 왕 자님이 시다.”
“헉? 왕자님? 아,안녕하십니까. 프란츠 바그너입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예…… 예? 잘 부탁이라니요?”
“앞으로 일 년간은 헤르듀크 왕 자님께서 보살펴주실 거다.”
요한의 설명에 프란츠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던 프란츠는 흠칫 놀랐다.
“저더러 헤르듀크 왕자님 파벌에 들어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니. 형님. 아무리 그래도어떤 파벌에 들어갈지 정도는 자 신이 선택하고 싶었다.
아니,그걸 떠나서 파벌에는 들 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는 고독한 늑대처럼 홀로 성 장하고 싶습니다.”
“호오?”
“그것이 바그너 가문의 의지이 고. 형님의 동생으로서 해야 할 일 같습니다.”
프란츠가 진지하게 말하자 요한 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움찔한 프란츠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요한은 고개를 되돌린 후 빙긋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어?”
그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 지 프란츠는 안도했다.
하지만 그 안도는 너무나도 일렀 다.
요한은 프란츠의 어깨를 상냥히 잡았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 다. 미안하다. 동생아.”
그의 따뜻한 말에 프란츠는 기쁘 기보다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했다.
어깨가 마치 바이스에 잡힌 것처 럼 움직이지 않는다.
프란츠는 식은땀을 흘리며 요한 을 보았다.
“혀,형님? 아니 형님께서 미안 해하실 필요는……“동생이 고난과 역경을 원한다면 형으로서 돕지 않을 수야 없지.”
“예? 그게 왜 고난과 역경……“아카데미에서 파벌 없이 살아남 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감안하고……“어찌 형으로서 동생이 험한 길을 간다는데 그냥 보내겠냐.”
요한은 프란츠를 똑바로 마주하 며 이를 드러냈다.
“지금 당장 아카데미 입학 취소 하고 내 밑에서 이년,아니 삼년만 더 배우자.”
그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린가.
프란츠는 순간 지난겨울의 일이 빠르게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 았다.
‘이것이 주마등인가.’
검술과 더불어 댄스,체술,그 외 에 다른 교육까지.
요한에게 배울 때 겪었던 고통을 떠올린 프란츠는 황급히 고개를 가 로저었다.
“아,안돼……“고독한 늑대? 늑대가지고 되겠 냐? 호랑이는 되어야지.”
‘‘ —O 으—I ......•”
“이 형이 만들어주마.”
“아,아니 형님께서 그러실 필요 까지야……“넌 나만 믿으면 된다. 내가 진 짜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쳐주마. 최소한 익스퍼트까진 내가 끌어올려주지.”
진심을 담아 요한이 말하자 프란 츠는 황급히 헤르듀크 왕자에게 시 선을 보냈다.
“왕자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 습니다.”
“나 같으면 그냥 자네 형의 밑에 서 배우겠다만.”
마스터에게 일대일로 강습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아카데미에서도 쉽게 얻을 수 없 는 기회이고,영광이며,축복이다.
오히려 자신이 배우고 싶었던 헤 르듀크는 프란츠에게 웃어 보였다.
겨우 요한의 손에서 풀려난 프란 츠는 헤르듀크의 손을 꽉 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살려주세요……그의 간절한 말에 헤르듀크는 식 은땀을 홀렸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길래?’
* *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파티는 무사히 끝났다.
손님들은 만족했고 마고 후작도 뿌듯해했다.
그렇게 모든 손님이 돌아가고, 마고 후작 역시 침소에 들자 요한 은 저택 앞으로 나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해봐.”
어둠이 내리깔린 저택 앞에는 양 유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요 한에게 공손히 넘겼다.
요한이 차분히 자료를 읽자 양유 위는 설명을 시작했다.
"말씀하신 둘을 찾기 위해서 각 국의 길드에 지원 요청을 했습니 다.”
“그렇군. 그리고?”
“게로드 후작령에 있는 길드원에 게도 지시를 내렸습니다.”
“얼마나 걸리지?”
“한 달 안에 로만 후작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마고 후작에게 첩보원을 보낸 것은 로만 후작의 의뢰였습니다.”
“그래. 훌륭하군.”
요한이 칭찬하자 양유위는 허리 를 숙여 공손히 답했다.
지금 당장은 얻은 것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보가 들 어을 것이다.
요한은 자료를 양유위에게 돌려 주었다.
“저. 공자님.”
“뭐냐.”
“로만 후작과 싸우실 생각이십니 까?”
“나 죽이겠다고 수의까지 보낸사람을 그냥 두리?”
“아. 그랬습니까?”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겠지만. 다 의미 없는 얘기니 하 지 마라.”
요한이 고개를 젓자 그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패배의 가능성이 크니 다른 방 법을 찾으라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테인이 가 지고 있는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로만 후작은……“타로트 왕제를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
“타로트…… 헉. 알고 계셨습니 까?”
“그래.”
설마 이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양유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정말 저희가 필요하신 겁니까?”
“음?”
“차라리 요한 공자님의 의중을 말씀해주십시오. 그 뜻을 따르고 공자님의 수족이 되어 평생 함께하 겠습니다.”
도둑 길드의 정보에 의하면 요한 은 절맥에 걸렸고 그동안 제대로 운신도 못 했다.
그런 요한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안단 말인가.
어쩌면 요한이 뭔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양유위는 요한에게 공 손히 청했다.
“제가 공자님의 참모가 된다면.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 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 있어 하는 그를 빤히 응시 하던 요한은 피식 웃었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내가 너희들 살려뒀을 것 같냐? 그리고 경고하 는데.”
그에게 다가간 요한은 손가락을 들어 복부를 툭 쳤다.
아까 낮에 정확히 구멍이 뚫렸던 자리다.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양유위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 손가락이 상처를 꾹 누른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이 치솟았다.
양유위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찌 푸리자 요한은 천천히 손가락을 올 렸다.
그 손이 가슴에 닿자 양유위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손가락이 닿아 있는 곳은 심장 부근이 었다.
“내 머리 위에 을라가려고 하지 마라. 다음은 경고 없이 여기니까.”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