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화
76. 겨울의 끝 (2).
“이……!! 개 같은 자가……!!”
“화내지 마십시오. 아버지.”
수의를 집어 던지려는 윌카스트 백작을 말린 요한은 야스진을 불렀 다.
“예? 왜 그러십니까?”
“이거 내 방에 가져다 놔.”
“어…… 예.”
의아해하며 야스진이 나가자 윌카스트 백작은 씩씩거렸다.
“이런 모욕을 그냥 넘어갈 생각 이냐?”
“그래도 저 옷이 뭔 죄입니까? 저거 비싸 보이는데.”
“그래서!? 저걸 소중히 간직하기 라도 할거냐!?”
"소중히 간직해야지요.”
씩 웃은 요한은 윌카스트 백작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중에 로만 후작에게 입혀주려 면.”
그의 평온한 반응에 윌카스트 백 작은 한숨을 쉬었다.
모욕을 받은 요한이 침착하니 되 려 화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걸 누가 가져왔지?”
요한이 묻자 겁에 질려 있던 하 인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 키가 굉장히 크고,왼쪽 팔이 없는 남자였습니다.”
키가 크고 왼쪽 팔이 없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른쪽 눈에 상처는 없었고? 왼 쪽 눈은 적색이지. 머리는 보라색 이고. 키는 한…… 이 미터 정도 되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만……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요 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하인을 꽉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
“그 자식 어딨"•… 아니,내가 나가보지.”
파티가 시작되었지만 요한은 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잽싸게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저 택 밖에는 귀족들의 마차들만이 있 을 뿐이었다.
‘이 자식이 어디 갔지!?’
“하인스!!!”
“예!”
요한의 외침에 달려온 하인스는 그를 보며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외팔이에 오른쪽 눈에 상처 있 는 남자. 바로 수배령……외치던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됐다. 괜히 잡으려고 해봤자 피만 보겠지.”
“그게 누군데 그러십니까?”
“뭐야. 몰라?”
당황하는 그를 보지도 않은 채 요한은 눈이 내리고 있는 어둠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천왕. 천왕 카일로 크라덴 자 작.”
바그너 저택에 수의를 전해 준 자는 다름 아닌 로만 후작의 최측 근.
천하십강 중 천왕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카일로 자작이었다.
천왕의 이름을 들은 하인스는 당 황했다.
천왕이 누군가.
로만 후작의 기사에서 시작해 삼 십 대 초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로만 후작에 의해 자작이 되었고.
그 이후 작위에도,영지를 받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검 으로 살아간 최강의 기사 아닌가.
지금 바그너 백작가는 로만 후작 과 적대 관계였다.
그런데도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 을 하인스는 믿을 수 없었다.
“천왕이라니…… 그가 왜!?”
“도발이라도 하고 싶었나보지.”
‘도발 치고는 웃기지도 않지만.’
회귀 전에는 이런 일 따위는 없 었다.
로만 후작은 천왕으로 철저히 자 신을 보호했었다.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일 때 꽤나 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요한의 활동에 의해 미래 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로만 후작이 요한을 경계하며 천 왕을 생각 없이 움직여 준다면.
요한에게는 오히려 나쁠 것이 없 었다.
‘이런 식으로 그가 날 도발하기 위해 천왕을 바깥으로 돌린다면?’
그 틈을 노린 로만 후작의 다른 적이 그를 제거할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요한은 피식 웃었 다.
‘잘하면 손 안 대고 코 풀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다.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에 감사하 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별개의 이야 기였다.
“너희 경비 제대로 안 서냐?”
저번에는 검은 삭월이 오더니 이 번에는 천왕까지 들어왔다.
요한은 하인스의 멱살을 강하게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객객. 하,하지만 그,그런 자는 들어 온 적이 없습니다. 거…… 거 기에 마법의 흔적도 없었고.”
명색이 천하십강이다.
마음먹고 들어오고자 한다면 경 비를 피해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 지는 않을 것이다.
“쯧. 어쩔 수 없지.”
카일로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계속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벌써 떠났을 것이라 생각한 요한은 획 몸을 돌렸다.
"너희는 각오해라. 내일부터 내 가 제대로 굴려 줄 테니까. 요새 풀어주니까 아주 군기가 빠졌지?”
“아,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지킬 것만 지키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 데 경계근무에서 실패해?”
“으 ”
“겨울이라 할 일도 없을 테니 나랑 훈련 같이하자. 알았냐?”
코어와 검도 만들었으니 앞으로 는 남은 일정은 훈련밖에 없다.
요한의 훈련량이 어떤지 아는 하 인스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제 죽었구나.’
“모두에게 전해둬.”
하인스에게 한마디 해 준 요한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자 윌카스트 백작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나간 거 니?”
“수의 가져다준 놈. 천왕입니다.”
“……뭐 r윌카스트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 심했다.
그 천왕 카일로가 고작해야 물건 가져다주러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그걸 떠나서 그가 이곳까 지 찾아왔다는 것조차도 믿기 어려 웠다.
“그자가 왜?”
“행여나 걸릴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 천왕이라면 어떻게든 탈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겠죠.”
윌카스트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 다.
“경비대는 좀 제대로 훈련을 해 야겠구나. 저번 일도 그렇고……“경비체계에 허점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전체적으로 제가 단련시켜 볼까 합니다.”
“그래. 믿고 맡기마.”
윌카스트 백작의 허락이 난 순간 경비대의 겨울 일정은 확정되었다.
그렇게 요한과 윌카스트 백작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헤위안 자작이 다가왔다.
“하하.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심 각하십니까? 프란츠는 꽤나 밝은 데.”
이 파티는 요한을 위한 파티이기 도 했고,꽤 많은 영애들은 요한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요한 만이 아니었다.
프란츠 역시 영애들의 목적이기 도 했다.
내년에 아카데미에 가기도 하고, 차후 바그너 영지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능력도 있으니 그를 노리는 이들도 꽤 있었다.
헤위안 자작의 말에 요한과 윌카 스트 백작은 그가 있는 쪽을 보았 다.
“하하하! 그렇지요!”
“우후후. 재밌으시군요. 프란츠 공자님.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속 편히 떠드는 프란츠를 보니 맥이 풀린다.
요한은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 렸다.
“저건 진짜 편해 보이네.”
“자네도 좀 편하게 있게나. 자네 를 위한 파티인데 뭐가 그리 바쁜 가? 아. 월카스트 백작님. 잠깐“알겠네. 그럼 요한. 너도 적당히 즐기고 있거라.”
윌카스트 백작이 다른 귀족들에 게 가자 요한은 덩그러니 혼자 남 았다.
‘혼자 뭐 하지.’
회귀 전이었다면 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별짓을 다 했을 것 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요한이 뭔가 할 필요는 없었다.
“요한 공자.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가만히만 있어도 알아서 다가와 줬으니 말이다.
그에게 다가온 귀족들은 웃으며 차분히 이야기를 건넸다.
“듣자 하니 게론 영지에서 몬스 터 토벌을 하며 꽤나 힘을 냈다고 하는데. 내년에는 우리 영지도 부 탁하고 싶구만.”
“마스터가 맡아준다면 두려울 것 이 없겠지. 내 보상은 충분히 해주 겠네.”
“감사합니다. 시간이 나면 지원 하러 가지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중앙 기사단에 있는 친 척이 있는데……”
“그렇습니까?”
“그쪽에서 좀 문제가 있다나 봐. 괜찮으면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있 을까? 내 보답은 제대로 하지.”
요한의 무력과 마고 후작의 후 원.
거기에 이번에 요한의 대부가 되 어 준 하이마스는 로드만 왕국의 주교가 될 예정이다.
그의 힘이 강해지다 보니 요한을 통해 막혀 있던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귀족들은 많았다.
“그것을 지금 말씀드리기는 애매 하군요. 일단 수도에 가서 왕가에 마스터임을 알리기도 해야 하고.”
“그런가? 이거 아쉽구만.”
“거기에 요새 정국이 조금…… 마고 후작님께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능숙하게 그들의 제안을 넘겨나갔다.
능글맞은 정치 계열의 관료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요한을 향해 귀족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웃었다.
“이거 참. 검술 실력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심계와 입담도 보통이 아니구만.”
“과찬이십니다.”
"나 고도 로가드 백작은 자네가 마음에 드네.”
“어여삐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암. 어여삐 봐야지. 언제든지 로 가드 영지에 와주게나.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으니까. 우리 영지 는 준마가 대단하지.”
“그렇습니까? 꼭 한번 가보고 싶 습니다. 하하.”
“우리 영지에는 호박이……“호박 수프 맛있지요.”
모여든 귀족들이 웃으며 자기 영 지의 특산품을 말해주었다.
그들에게 웃으며 대응하던 요한 은 슬쩍 다른 귀족들을 보았다.
너무 한쪽과만 있어도 오히려 문 제가 된다.
요한은 옆에 있는 와인잔을 들었 다.
“잠시 자리를 좀 비우고 싶습니 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너무 오래 자네들 을 잡아두었군. 미안하네.”
귀족들이 길을 내어주자 요한은 다른 귀족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온 것을 기쁘게 환대한 귀 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요한이 잠시 쉬려고 할 때.
푸른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영애 가 그의 근처를 지나가다가 몸을 비틀거렸다.
“어 맛!”
쓰러지는 그녀를 빠르게 잡아챔 요한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어머…… 가,감사합니다. 요한 공자님.”
‘일부러 넘어졌구만.’
요한의 관심을 끌고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한 그녀는 다소곳이 미소 짓고 살짝 치마를 들어 인사했다.
“어머. 실례를 저질렀군요. 로가드 백작가의 라니 로가드라고 합니 다.”
“별 말씀을. 요한입니다.”
라니는 최대한 예쁜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 넌지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공자님. 지금 연주. 좋지 않나요?”
“그렇군요. 이런 음악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그의 말에 라니의 얼굴이 밝아졌 다.
은근히 운을 띄운 것인데 요한이 받아 준 것이 기뻤다.
“레이디의 아름다운 손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을 저에게 하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머!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걸요!”
기뻐하던 그녀는 모여 있는 다른 영애들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 다.
그런 그녀와 함께 홀로 나간 요 한은 능숙하게 리드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리드에 맞춰 춤을 추던 라 니는 요한의 가슴에 살짝 고개를 기댔다.
“공자님. 오늘은 저와 함께 만…… 춤을 추실 수 있으신가요?”
기대감을 듬뿍 담은 그녀가 요청 하자 요한은 당당히 대꾸했다.
“다른 레이디와 부인들도 계시는 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하지만 공자님께서도 힘드 실 테고……“괜찮습니다. 체력이야……씩 웃은 요한은 크게 턴을 하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넘쳐나니까요.”
‘오늘 못한 훈련은 춤으로 대신 해야겠네.’
소드 댄싱은 춤을 추며 리듬감을 익힌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검로를 만들기도 한다.
이 또한 훈련이라 할 수 있으니 요한으로서는 굳이 한 번만 춤을 출 이유가 없었다.
‘이 자리는 로만 후작을 상대하 기 위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자리. 그렇다면……누군가가 아쉬움을 느끼게 할 필 요는 없었다.
그것이 귀족이든,영애들이든 말 이다.
라니를 에스코트해 영애들이 있 는 곳까지 데려간 요한은 곧바로 다른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한 바그너가 귀인께 음악의 선율을 즐길 기회를 청합니다. 부 디 그 청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라니는 떨떠름해 했고,영애들은 그의 대사에 기뻐했다.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