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4화
54. 찾았다 (2).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요한은 야스진과 함께 로미단 영주 관저를 찾았다.
화려한 저택 앞에 도착하자 기다 리고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노년 신사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로미단 영지를 방문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로미단 영지 의 집사 마노루라고 합니다.”
“환대에 감사를 표하지. 백작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만나 뵈어야겠군.”
“알겠습니다.”
마노루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 으로 들어가자 몇몇 사용인들이 요 한을 보고 힐끔거렸다.
바그너 영지에서야 그가 두려우 니 이런 짓을 하지 못하지만 이곳 은 로미단 영지다.
신성이라는 이명을 지녔고 마스 터이기까지 한 젊은 공자이니 관심 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힐끔거리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목적지에 도착하자 요한은 마노루에게 말했다.
“사용인들 관리 좀 하지?”
“……죄송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마노루도 눈치채 고 있었다.
차마 손님이 있는 곳에서 화를 낼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을 뿐.
그가 돌아가는 대로 바로 재교육 을 할 생각이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진 그의 어깨를 툭 친 요한은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게나!”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중년의 남 자는 웃으며 요한을 반겼다.
“요한 바그너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딱히 영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요한은 예를 갖췄다.
마스터인 요한이 자신에게 숙이 자 남자는 싱글벙글 웃었다.
“헤오만 로미단이라고 하네. 이 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
“그렇습니다.”
“자자. 앉게나. 식사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할 때이 니…… 식사를 하고 얘기나 좀 하 다가 밤에 연회를 즐기세.”
“죄송합니다. 복귀 때문에 연회 는 무리입니다.”
요한이 뜻을 밝히자 그는 꽤나 아쉬워했다.
소문의 그 요한이 찾아왔는데, 그냥 보내야 하게 생겼다.
“이런…… 내 딸이 자네를 꼭 만 나고 싶어 했는데.”
“다음에 바그너 영지에서 파티를 열 생각입니다. 그때 초청장을 보 내 영애를 모시겠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좋지! 하하. 이거 참. 소문이 다 거짓부렁이구만.”
지금까지 요한은 개망나니에 성 격이 더럽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요한을 보면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나.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고,또 겸 손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던 헤오만 백 작은 껄껄 웃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니까. 분명 요한을 질투한 놈들이 낸 것 이겠지.’
“그럼 바로 식사부터 할까?”
잠시 후 식탁에 요리들이 깔리자 요한은 능숙하게 나이프를 잡았다.
“그런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것인가?”
“몇 가지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 입니다. 어제 늦게 도착하여 백작 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신경 쓰지 말게나. 마스터씩이 나 되는데 많이 바쁘겠지.”
이후로도 간단한 환담이 지속되 었다.
이야기가 얼추 끝나고,식사도 마무리가 되자 헤오만 백작은 무척 이나 아쉬워했다.
그리고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넌 지시 제안을 건넸다.
“우리 기사단에도 인재가 필요한 데 말야.”
“좋은 인재가 들어오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바그너 기사단 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면 어떤가? 우리 기사단은……“죄송합니다.”
“껍. 그런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 헤오만 백 작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가 거절했다고 타박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마스터다.
어지간한 일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럼 바쁠 텐데 이만 가보 는…… 아. 그리고 가는 김에 이것 을 가져가겠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벽에 걸려 있는 한 자루 검을 가져왔다.
청강으로 만들어진 좋은 검이었 다.
“월카스트 백작님께 전해드리게.”
“이 검은……검을 반쯤 뽑아 본 요한은 눈에 이채를 담았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한 헤오만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 다.
“앞으로 로미단 영지와 친목을 도모하자는 의미로 말이야.”
“친목이요.”
“그래도 이웃인데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지만 참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회귀 전에 바그너 영지가 힘들 때 로미단 영지에서는 지원조차 하 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잘나가니 친하게 지내자며 이런 짓까지 한다.
능글맞게 웃는 헤오만 백작을 빤 히 보던 요한은 피식 웃었다.
‘나쁠 건 없지.’
휘둘리지만 않으면 된다.
헤오만 백작도 윌카스트 백작과 요한의 이름을 이용하고 싶을 뿐이 다.
그렇다면 요한 역시 이용하면 된 다.
‘어차피 로만 후작과 싸우려면 적당히 세를 유지해야 하니까……이웃한 영지의,그것도 백작이라 면 친분을 유지하는 것도 큰 도움 이 된다.
거기에 당분간 쓸만한 검이 필요 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요한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본 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구만. 우리 사이 에 그런 말 하는 것 아니야.”
‘우리 사이가 뭔 사인지는 모르 겠지만.’
은근히 친한 척을 하는 그에게 웃어 보이며 요한은 몇 마디 이야 기를 더 나눴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떨어지자 헤오만 백작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 어 났다.
“그럼 나가세. 저택 앞까지는 배 응해주지.”
영주가.
그것도 백작이.
일개 공자가 떠나는 것을 배웅해 주겠다는 것은 최대의 친밀의 표시 였다.
어떻게든 친해져서 콩고물이라도 더 받고 싶다.
속셈이 뻔히 보이지만 요한은 순 순히 그의 배려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백작님께서 직접 안내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요.”
“하하. 별 소리를. 그럼 잘 가게나. 아,그리고 다음 파티때 내 딸 과 춤도 한번 같이 춰주고 말이야! 으하하하!!”
이번의 만남으로 요한의 호감을 샀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요한의 등을 토닥이며 크게 웃었다.
그런 헤오만 백작에게 요한 역시 여유롭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택 밖까지 나와 인사를 하는 그에게 허리를 숙인 요한은 말에 올라타고 바로 떠났다.
그의 옆에서 말을 몰던 야스진은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연락도 없던 분인데 참 뻔뻔합니다. 그리 생각지 않으 십니까?”
“사람들이 아침 시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침 시장에 살 것이 많기 때문이지. 그걸 나무랄 필요는 없 어.”
이해한다는 투로 요한이 말하자 야스진은 흥미로워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상아탑 지부. 물건 찾아 놓으라 고 했으니까 그거 받아서 바로 갈거야.”
“알겠습니다. 바로 모시지요.”
야스진의 안내를 받아 상아탑 지 부에 도착하자 요한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처럼 카운터에 서 있던 청년 은 요한이 들어오지 흠칫 놀랬다.
“오,오셨습니까.”
“물건은?”
“그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뭐?”
요한이 인상을 쓰자 그는 더더욱당황했다.
“그,그게 지금 블러디 만드라고 라의 씨앗이 부족해서……“얼마나 걸리는데.”
“사,상아탑에 의뢰하면 한 나흘 정도……?”
“나흘?”
“예에……“토바돈 유적의 게이트를 이용하 는 건가?”
로미단 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에 이미 탐사가 완료된 유적이 있 었다.
황금시대의 유적들 중에는 특정 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이트가 있었 다.
토바돈 유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토바돈 유적의 게이트를 이용해 서 헤고미단 영지의 상아탑 지부와 연계하면…… 그,금방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흐음…… 하지만 난 바그너 영 지에 살고 있는 걸?”
“원하신다면 저희가 바그너 백작 령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수료는?”
요한의 질문에 청년은 식은땀을 흘렸다.
“당연히 수수료도 저희가 내 고……수수료까지 자기들이 지불하겠다 면 뭐라고 하겠나.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닦달해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해.”
“휴우……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암왕과 거래 를 하는 사람이다.
어제 요한이 떠난 후 암왕에게 요한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라는 연 락까지 왔다.
만약 요한이 수틀려서 거래고 나 발이고 다 엎어버린다면?
그리고 마법서와 연구일지를 필 로틴 제국의 경매장에 팔아버린다 면?
암왕으로써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아탑이 요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청년은 최대한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건이 늦어진 것에 대한 보상은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준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 겠지. 기대하고 있겠다.”
“하하. 예. 안녕히 가십시오.”
물품을 제대로 구비해 놓지 못한 것은 상아탑 지부의 잘못이다.
그러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 요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이 자식은 어디 갔어?”
밖에서 기다려야 할 야스진이 없 다.
요한이 잠시 기다린 사이 멀리서 헐레벌떡 야스진이 뛰어왔다.
“헉헉…… 고,공자님. 오래 기다 리셨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어디 갔다 온 거냐?”
“새벽에 말씀드렸던 제 동기 있 잖습니까. 그 녀석을 잠깐 만나 서……“어? 순례자들이 복귀하는 건가? 원래 오후에 가기로 한 거 아닌 가?”
“그런데 좀 일이 생겨서 일찍 간 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잠깐 이야 기를 좀 하고 왔습니다.”
“일? 무슨 일?”
“저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습니 다. 다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더 군요.”
행여나 요한이 불쾌해할까 봐 야 스진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공자님께서는 볼일 다 보셨습니까?”
“그런 셈이지.”
“아무것도 안 사오셨잖습니까.”
“물건 없다더라. 바그너 영지까 지 배송해준다네.”
“그렇군요.
“아무튼 볼일은 끝났으니까…… 온 김에 타고다 상회에 들러서 식 량만 사 가지고 복귀하자.”
그의 말에 야스진의 표정이 밝아 졌다.
타고다 상회는 로드만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거래를 하 는 상가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물건을 팔았고 그중에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도 많았다.
“헤나 가져다주려는 거냐?”
요한이 정곡을 찌르자 야스진은 머쓱하니 웃음 지었다.
“안됩니까?”
“안 될 건 없는데…… 돈은 있 고? 타고다 상회 물건들 꽤 비싸.”
“그래도. 싼 거 하나는 살 수 있 지 않겠습니까?”
“어제 내가 준 돈은? 다 썼나?”
“남았습니다. 드려야겠군요.”
야스진이 품을 뒤적거리자 요한 은 손을 휘저었다.
“됐어. 그걸로 사다줘.”
남은 돈은 꽤 된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준다고 하니 야스진은 기뻐했다.
“정말이십니까?”
“네가 어제 잘해줘서 주는거야. 앞으로도 잘해.”
“알겠습니다!”
감격에 몸을 떨던 그는 최대한 친밀감을 담아 웃으며 물었다.
“요한 공자님께서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식량.”
“아뇨. 그거 말고. 검이라든 가……요한은 아까 받았던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것을 본 야스진은 당황하며 더 듬거 렸다.
“어,어,그…… 그럼 선물이라든 가? 백작님이라거나,프란츠 님이 라거나…… 아니면 빌헬미나 님 께……하지만 요한은 시큰둥할 뿐이었 다.
“타고다 상회에서 파는 것들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야.”
“예?”
타고다 상회는 귀족들도 거래할 정도로 좋은 물건들을 파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의 물건이 좋지 않다니.
당황하는 그의 어깨를 툭 친 요 한은 곧장 타고다 상회로 향했다.
그의 뒤를 쫓으며 야스진은 의아 해했다.
‘뭐 얼마나 좋은 걸 바라시는 거 지? 타고다 상회 물건이면 다른 귀 족들도 잘 쓰는데.’
환생한 공자님께서 회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