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오늘부터 우리는 (1)
“이거나 먹어!”
나는 데이터 자아에게 바이러스 데이터를 보냈다.
[잠식 완료했습니다.]
이설아가 신경 썼던 것은 바로 이 트랩이었지, 나머지는 아니었나 보다.
디오는 쉽게 데이터 자아를 정복했다.
“잘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 끝났다.
무방비 상태가 된 데이터 자아를 손쉽게 처리한 후 나는 백기완 대통령한테 갔다.
“라일 씨!”
백기완 대통령은 매우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대통령님. 애쓰셨습니다. 다 해결됐습니다.”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진짜 못 버티겠다 싶었는데 때마침 그때 끝나는군요…!”
백기완 대통령은 내게 활짝 웃어 보였다.
“하하. 역시 저는 타이밍의 귀재이죠.”
“그건 맞는 것 같은데요. 딱 맞추기보다는 먼저 해결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거든요.”
백기완 대통령은 내 어깨를 툭 때렸다.
뭔가 원망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짓거리를 했던 거야.”
“세상에…….”
청와대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짓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웬 미친년 하나 때문에 전 국민이 미쳐버렸었네요…….”
저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이렇게 끝난 게 다행이지 않겠어요.”
“그러긴 하죠. 어쨌든 제 쪽에서 잃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일단 박이나, 장수진, 백기완 대통령은 괜찮은 상황이다.
문제는 일수인데…….
[일수 님도 전부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
솔직히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설아의 방해가 없는 상황에서 일수를 회복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데이터 변환에 도가 튼 이상 생체 데이터를 원래대로 복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아……. 그래도 수습하려면 좀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휴우…….”
백기완 대통령은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일단은 좀 쉽시다.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뒤처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이제 좀 쉬세요.”
“네. 그러면 일단 좀 기절해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기완 대통령의 눈이 감겼다.
“쿠우…. 쿠우…….”
곧바로 백기완 대통령의 옅은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로 안 가고 여기서 잔다는 것도 웃기지만, 저렇게 바로 잘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이겠지…….
나는 백기완 대통령을 본인의 침실로 이동시켜주었다.
“그럼. 뒷정리를 해볼까?”
나는 일수가 있는 곳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러 이동했다.
***
대한민국은 한동안 멘붕에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디오가 말해주길 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었다고 한다.
전국 곳곳에서 곡소리가 났다.
유가족들 중에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에게 보복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자신들이 한 짓을 혐오하며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회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내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이설아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피해자 여러분과 가해자 여러분은 진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여기서 그만두지 않으면… 그 누구라고 해도 제가 처벌할 것입니다.]
나는 전국에 이 메시지를 보냈다.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이들이 겪은 아픔은 쓰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회가 진정되려면 가끔은 이런 강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계속해서 살육이 일어날 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손을 쓸 수 없지만, 다친 사람들은 내가 전부 다 치료해주었다.
오히려 내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건강해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거의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치료해준 것 같다.
생각보다 부상자는 많았지만, 그에 비해 사망자가 수가 적은 것은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내 통제에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없었으면 정말 대한민국은 전멸하고 말았을 거라는 생각에 이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부상자들을 싹 다 치료해주었으니 나를 영웅으로 추대할 수밖에.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더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정말 나를 추종하는 종교까지 생겨날 판이었다.
만약 생기면 내 손으로 그 교파는 없앨 거다.
사이비 신은 별로 되고 싶지가 않아.
내가 개입한 덕에 사회는 점점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역시 라일 씨라니까요.”
백기완 대통령은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정말 이 사람은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애틋하게 생각한다.
“그럼요. 우리 라일이가 짱이죠.”
일수도 백기완 대통령의 말에 거들며 말했다.
“근데 조금만 더 빨리 움직여준다면 정말 바랄 것도 없을 텐데요.”
일수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왠지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듯했다.
“야. 근데 그렇게 다치고 나서 내가 치료해주니까 오히려 더 이득 아니냐? 지금 네 몸은 거의 스무 살 때와 맞먹어.”
나는 일수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일수는 호쾌하게 웃어댔다.
“사실 그렇긴 해. 진짜 생체 데이터를 조작하고 변환하는 것은 사기 아니냐? 이러다가 평생 살 수도 있겠는데?”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계속해서 장기를 새로 갈아준다면 말이야.”
나는 가볍게 앞에 있는 잔을 들어 마셨다.
“그걸 그렇게 와인이나 마시면서 태평하게 말할 일이냐?”
일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뭐가?”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고! 대단한 거 아니야?”
“응.”
사실 나에게는 별로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이미 생체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내 반응이 너무 무미건조했는지 일수는 황당해했다.
“와. 얘 이러니까 진짜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 같네.”
“어쩌면 맞을 수도 있어요. 이제 곧 종교도 생겨날 것 같던데요?”
장수진은 재밌다는 듯이 일수의 말을 받아쳤다.
“야. 조용히 해라. 만약 생겨나면 당장 나에게 말해. 바로 그 순간부터 해체니까.”
“그러면 말 못 하죠.”
“이게 또 정신 못 차리고 기어오르네. 네가 말 안 하면 내가 뭐 모르냐?”
“하하하하. 진정해. 좋은 자리 와서 왜 싸우고 있어.”
일수는 황급히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친구 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사랑 찾아 떠난다.
“그래. 니들끼리 놀아라. 난 혼자 놀란다.”
짜증 나서 와인이나 한 잔 더 들이켜려 했다.
“저랑 같이 놀아요.”
박이나는 잔을 들어 내게 건배했다.
거기에 더불어 상큼한 미소도 잊지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박이나 씨밖에 없네요.”
“하하. 그래요?”
박이나는 왠지 신나 보였다.
“제가 라일 씨에게 필요한 존재라니 너무 좋네요.”
“당연히 필요한 존재요. 이나 씨는 제게 너무나 소중합니다.”
“…….”
내 말에 박이나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좋네요. 그런 말 들으니까요.”
“정말이에요.”
“네…….”
박이나는 수줍은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다.
일수는 뭔가 재밌다는 식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얄미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좀 나기 시작했다.
“뭐?”
“아니야.”
일수는 혼자 콧노래를 불렀다.
장수진과 백기완 대통령도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식도 다 먹은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볼까요?”
갑자기 백기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가야겠네요. 갈 시간이 다 된 거 같아요.”
“저도요.”
일수와 수진이도 백기완 대통령을 따라서 일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다들 왜 이래? 아직 음식 좀 남았어. 왜 벌써 가?”
“라일아.”
내가 따지려 들자 갑자기 일수가 개인 무전을 보냈다.
“왜?”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지금 분위기 딱 좋으니까 이나 씨랑 잘해보라고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는 거잖아.”
“……그게 무슨…….”
“라일아.”
내가 또 따지려 들자 일수는 말을 막았다.
“이런 기회 흔치 않다. 왔을 때 쟁취해라. 오케이?”
그렇게 무전을 보낸 후 일수는 완전히 짐까지 챙겼다.
“그럼 이만 가보죠.”
일수는 싱긋 웃고는 그대로 순간이동해서 사라져버렸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저도요. 다음에 봬요.”
백기완 대통령과 수진이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
얼떨결에 자리에는 나와 박이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간만에 다 같이 즐기자고 마련한 파티 자리였는데 얼렁뚱땅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다 가버렸네요…….”
“그렇네요.”
박이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나는 박이나에게도 이제 그만 가보라고 말하려고 했다.
“라일 씨.”
갑자기 박이나는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이나 씨.”
박이나는 뭔가 단단한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라일 씨. 저 있잖아요…….”
“네.”
박이나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하하. 이거 되게 부끄럽네요.”
박이나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 갔다.
그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는 했다.
“라일 씨.”
박이나는 다시 마음을 잡았는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네.”
“좋아해요.”
“……저도요.”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요.”
내가 너무 쉽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박이나는 한 번 더 설명을 했다.
“저도 그런 뜻으로 말한 거예요.”
그에 나도 대답을 확실하게 했다.
“그럼 저랑 사귀실래요?”
“좋죠.”
“…….”
박이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그거…….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네. 왜요?”
“아니…….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같아서요. 저는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쉽게 말하지 않았어요. 저도 진심으로 대답하는 겁니다. 이나 씨가 제 연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겉으로는 쉽게 말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고자 이렇게 하는 거다.
나도 솔직히 박이나에게 호감이 있었다.
일단 박이나가 진짜 예쁘기는 하다.
그리고 도움도 많이 되고…….
또 그 이상의 다른 매력들도 있다.
어찌 됐든 나도 박이나를 좋아한다.
이렇게 판이 다 만들어졌고 수저로 밥만 떠서 먹으면 되는 상황인데 그걸 내가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연인 해요. 오늘부터.”
박이나는 내게 화사한 미소를 보냈다.
“네. 좋아요.”
나도 같이 미소를 보내주었다.
“라일 씨가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래요?”
내가 통 안 웃고 산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웃으시니까 너무 보기 좋네요. 라일 씨의 웃음.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런 말 들으니까 좋긴 하네요.”
나는 박이나의 손을 잡았다.
“이나 씨가 제 연인이 되어서 너무 행복해서 그래요.”
“하하. 정말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하시네요…….”
박이나는 정말 많이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제 연인 사이인데.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있나요?”
“없죠.”
박이나는 다시 씩씩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그렇게 박이나와 나는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