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마무리 지어야 할 악연 (5)
“여유 부리지 마!!! 너 지금 초조하잖아!!!!!!”
이설아는 독기 가득한 목소리로 악을 버럭버럭 질러댔다.
“안 초조해.”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를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 수 있을지가 내게는 중요해.”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연기했다.
“미친놈…….”
저년은 자기가 다 일을 벌여놓은 주제에 나한테 미쳤다고 한다.
“나한테 미친놈이라 하지 마. 잭슨이라고 진짜 미침의 끝판왕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 녀석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너도 미친년이긴 한데 그 녀석보다는 약한 것 같아.”
“하!”
죽느냐 마느냐의 상황에서 한다는 말이 이런 소리란 게 황당했는지, 이설아는 실소했다.
“개소리는 이만하고 죽여. 어차피 죽일 거잖아.”
이설아는 체념했다는 듯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말했다.
더 이상의 데이터 저항도 없었다.
“싫어.”
“뭐?”
이설아는 내 말에 어이없어했다.
“기대는 하지 마. 널 살려준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럼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내가 계속 간을 보자 이설아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널 농락하고 있는 거지. 보면 모르냐?”
“진짜 이 시발 새끼가…….”
이설아는 다시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가만히 있어라. 너를 죽이는 건 내가 아냐.”
나는 뒤쪽에서 이리로 걸어오는 장수진을 가리켰다.
“바로 얘지.”
“…….”
이설아는 말없이 장수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수진이는 어느새 몸이 다 회복되어 있었다.
녀석은 무표정으로 차분하게 걸어왔다.
“네가 마무리해. 그게 더 나은 것 같아.”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수진이는 단검을 꺼냈다.
이설아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장수진. 보기 좋네? 이라일의 충실한 따까리가 된 모습 말이야. 아주 하라면 다 하는구나. 나중에는 몸도 줄 거니?”
이설아는 장수진을 한껏 비아냥댔다.
“언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는 언니 편하게 죽일 수 있어요. 이미 언니한테 있던 정은 다 사라졌으니까요.”
“그래? 그거 잘됐네. 난 애초에 너 같은 년한테 정이라곤 없었는데 말이야.”
짜악-!!!
장수진은 이설아의 뺨을 세게 갈겼다.
“하!”
이설아는 헛웃음을 냈다.
“손이 좀 맵네?”
“말 가려 하시죠. 갈 땐 가더라도 곱게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장수진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했고 냉정했다.
눈보라가 부는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였다.
“언니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응.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네놈들은 이 와중에 여기서 나랑 희희낙락거리면서 놀고 있고.”
짜악-!!!
수진이는 이설아의 뺨을 한 번 더 갈겼다.
“…진짜 이 년이나 저놈이나, 뺨 때리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해?”
“언니. 제가 방금 말 가려 하라고 했을 텐데요?”
“야. 수진아.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협박을 하고 있어? 나는 지금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내가 네 말을 듣겠냐? 이 병신 같은 년아.”
이설아는 계속해서 수진이를 자극했다.
“그렇네요. 언니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네요. 참 딱하네.”
수진이는 정말로 이설아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 개년아!!!!!”
아무래도 그게 이설아의 발작 버튼이었나 보다.
평온하게 수진이를 놀려대던 이설아가 역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뭔데 나를 불쌍하게 여겨!!!!!”
“불쌍하죠. 가족도 친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으아아아아아!!!!!”
이설아는 날카로운 괴성을 질러댔다.
녀석은 내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분노하고 있었다.
“너는 행복했니? 국정원에서 알아주고 또 이제는 좋은 동료가 생겨서 좋나 보구나!!!! 근데 그런 너와는 달리 내 인생은 굉장히 불행했어!!!!!! 그런 너가 내 심정을 알아?!!!! 이럴 수밖에 없었던 내 심정을 아냐고?!!!!”
“몰라요. 저는 언니처럼 막장으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언니 말을 틀렸어요.”
흥분한 이설아와는 달리 수진이는 너무나도 침착하게 말했다.
“뭐가 틀려?!!!”
“저도 불행했어요. 하지만 전 언니와 달리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죠. 언니는 과거의 아픔에 머물러 미래를 망치려고 했던 반면, 저는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고요.”
“…….”
이설아는 말없이 수진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수진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언니도 저처럼 상처를 극복하고 잘 살았으면…….”
“그만!!!!!!”
이설아는 더 이상 듣기 싫었는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질색했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죽일 거면 그냥 죽여!!!!”
“……알았어요.”
수진이는 이설아에게로 가까이 갔다.
“이번에는 상상도 아니고 꿈도 아니에요. 진짜로 죽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제게 할 말 있어요?”
“엿이나 먹어. 쌍년아.”
“좋네요.”
푸슉-!
수진이는 이설아에게 칼을 꽂았다.
망설임 없이 한 번에 꽂아 바로 즉사시켰다.
이설아의 몸은 내가 굳이 조종하지 않아도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수진이는 죽은 이설아의 시체를 털썩 놓은 다음 일어났다.
“너……. 괜찮냐?”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괜찮아요…….”
수진이는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뚜욱-!
그때 수진이의 눈에서 눈물이 닭똥 같이 흘러내렸다.
“크흑…….”
결국 수진이는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나는 말없이 수진이가 그대로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음 잘 추스르고 있어. 나는 이설아가 싼 똥 좀 치우고 있을 테니까.”
얼른 순간이동 해서 이설아가 설치해 놓은 데이터 자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죽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데이터 자아에게 세뇌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이 끊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댔다.
“진짜……. 지옥이 따로 없네.”
차마 못 볼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저 짓거리를 그만두게 만들어야 했다.
“디오! 당장 데이터 자아가 있는 좌표 찾아.”
[네.]
원리는 이설아가 만든 데이터 감옥의 자아를 박살 내는 것과 비슷했다.
살짝 파괴한 다음 회복 데이터를 보낸 곳을 추적해 핵의 위치를 알아낸다.
그다음 바로 잠식이다.
[다 됐습니다.]
이설아가 급하게 만들었는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쉬웠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세상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벌여놓은 끔찍한 상황들을 보며 경악했다.
이들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억이 있는 것이 충격이 덜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조종당해서 이런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들이니 본인들이 알 필요가 있었다.
“으아아아아!!!!”
자신들이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이설아 그 미친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게 생겼다.
“하아……. 어찌 보면 잭슨보다 더한 또라이었을지도.”
나는 서둘러 다른 스팟으로도 이동해 정신 조작 데이터를 보내는 데이터 자아들을 하나둘 파괴해 나갔다.
“마지막 남은 하나인가?”
나는 63빌딩에 위에 있는 데이터 자아를 보며 말했다.
그 데이터 자아는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조작하고 있었다.
“아주 재밌는 짓을 해놨네…….”
서울에 있는 데이터 자아는 다른 데이터 자아와 결이 달랐다.
이것만큼은 이설아가 제대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서울의 사람들은 서로 싸우거나 죽이지 않았고, 모두 일심동체인 상황이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청와대를 박살 내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탱크와 헬기까지 와서 청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백기완 대통령은 혼자서 그것들을 막느라 애먹고 있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데이터 자아가 보내는 정신 조작 데이터를 막느라 정신없는데, 서울 사람들의 공격까지 막아야 하니 미칠 노릇이었을 거다.
“라일 씨…!”
백기완 대통령이 내게 무전을 보냈다.
“네. 대통령님.”
“드디어 제 연락을 받으시는군요!”
계속해서 백기완 대통령은 내게 무전을 보냈지만, 이설아와 싸우느라 정신없어서 응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좀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지금 많이 곤란한데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이제 힘에 부쳐서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백기완 대통령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미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정신 조작을 보내는 데이터 자아를 파괴하려고 와 있습니다. 좀만 버텨 주십시오. 제가 금방 해결할 테니까요.”
“그것참 반가운 소식인데 말이죠. 빨리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많이 힘들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금방 하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백기완 대통령이 정말로 힘겨워 보였기에 그를 빨리 도와줘야 했다.
나는 63빌딩에 있는 데이터 자아에 손을 댔다.
[라일 님. 조심하십시오!]
그때 디오가 황급히 나를 막아 세웠다.
“왜 그래?”
[저 녀석 전기 데이터를 두르고 있습니다. 데이터 통로를 다 태워버릴 정도로 강한 데이터입니다. 아무래도 이설아가 라일 님께 당한 이후로 복수하려고 설계해 놓은 것 같습니다.]
“하하…….”
디오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된통 당할 뻔했다.
이설아.
마지막까지 진짜 징그럽다.
“데이터 추적했으면 역으로 당했겠네……. 네 덕분에 살았다.”
[역시 라일 님은 저 없이는 못 살죠.]
“그래. 인정한다. 잘했어.”
요즘 나한테 통 칭찬을 못 들어서 그런지 칭찬을 갈구하는 것 같은 디오다.
알았다 해주니 바로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그나저나 어쩐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상당히 정교하게 작업을 해놔서 고민이 많았다.
[미끼를 던질까요?]
“어떻게?”
[더미 데이터 자아를 만들어서 트랩이 터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트랩은 일회용으로 설치한 것 같고, 정교한 데이터 자아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알았어. 한번 해보지.”
나는 디오 말대로 간단한 데이터 자아를 하나 만들었다.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예전 같으면 만드는 데 한 달이 걸릴만한 수준의 데이터 자아였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많이 강해졌다는 거다.
자화자찬은 그만하고,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한다.
백기완 대통령한테는 1분 1초가 급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데이터 자아를 시켜 이설아가 만든 데이터 자아를 자극하도록 만들었다.
지지지지직-!!!!
디오의 예상대로 전격 데이터가 그 급조한 데이터 자아를 아예 태워버렸다.
“살벌하네…….”
데이터 자아는 아예 박살이 나 있었다.
급조한 데이터 자아긴 했지만 이렇게 박살 나 버리니 짠하기는 했다.
나는 다시 데이터 자아를 만들어서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이설아의 데이터 자아를 자극하게 만들었다.
“…….”
아무 일도 없었다.
디오의 말대로 그 트랩은 일회용이었다.
역시 디오는 최고다.
“디오야. 고맙다. 네 말이 맞았네.”
[그럼요. 저 디오입니다. 사상 최고의 데이터 자아지요.]
“하하. 그래. 맞아. 사상 최고의 데이터 자아지.”
나는 가볍게 손을 풀고 이설아의 데이터 자아에 손을 댔다.
“그러면 이제 역으로 이걸 박살 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