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예상치 못한 전개 (1)
나는 일수를 힐끔 쳐다봤다.
일수는 다 들었음에도 관심 없다는 듯이 연기를 했다.
하지만 난 녀석이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하고 있는 척하느라 애쓴다…….
“…그래.”
수진이는 나를 빈방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은밀한 곳으로 온 거야? 뭐 선물 주려고?”
수진이가 너무 진지하길래 나는 약간 농담조로 말했다.
“…….”
녀석은 반응 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가벼운 농담 받아줄 여유가 없나 보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심각한 거야?”
“그게 말이죠…….”
수진이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냉정함만큼은 최고라고 인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흔들리다니…….
솔직히 별 관심 없었으나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설아 언니가 사실 살아 있어요.”
“……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이설아는 거기에서 즉사했고, 시신은 한국으로 와서 묻혔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록을 뒤져도 그렇게만 나왔으니까요.”
수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근데 설아 언니가 어제 저에게 찾아왔었어요.”
“…….”
말도 안 된다.
나와 수진이가 처음 만났을 때.
애를 협박하려고 기록을 뒤지면서 나는 이설아의 기록도 확인했었다.
분명 임무 중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만약 기록을 조작했다면 그 이전에 했었어야 가능하다.
잠깐만…….
순간 머리에서 그게 그렇게 불가능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도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능력을 얻었다.
이설아 또한 그 극한의 상황에서 순간 능력을 얻어 빠져나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 사람 능력자였어?”
“네…….”
“…….”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진짜일 줄이야…….
“허허…….”
어이가 없어서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래서, 이제야 나타나서 뭐라고 하디?”
수진이는 잠시 입술을 꽉 물더니 어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후! 후!”
장수진은 한창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라일을 제외하면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항상 꾸준히 체력 단련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했던가.
그녀는 하루라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본인이 견딜 수가 없었다.
“후!”
세트를 마친 그녀는 차분히 역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땀을 닦아내며 물을 마시러 갔다.
띵동-!
그때 그녀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
자신의 집에 초인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소리는 그녀에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시간은 저녁 열 시.
이 시간에 누가 그녀의 집을 방문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밖에 누가 있는지 데이터 자아를 통해 확인해봤다.
“뭐야……?”
하지만 확인이 불가능했다.
“라일 님이……. 장난하고 있는 건가?”
장수진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럴 리는 없었다.
이라일의 성격상 이런 시답잖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갑자기 나타나 놀래키는 게 더 성격에 맞을 것이다.
장수진은 긴장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켰다.
“후우. 아예 대놓고 도발하는 건가?”
밖에 있는 상대를 누군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상대가 상당한 능력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밖에 택배기사가 있는 것처럼 정보를 조작하면 장수진이 더 방심할 것을, 상대는 굳이 정보를 가리는 선택을 했다.
장수진을 향한 도발이 분명했다.
“꽤 자신감이 있나 보네?”
장수진은 최악의 상황으로 밖에 있는 상대가 그 사예드라는 아이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했다.
그녀는 조심히 현관으로 나섰다.
끼익-!
문을 열었지만, 밖에 아무도 없었다.
“…….”
장수진은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빼내려고 했다.
상대는 지금 숨어있는 게 분명했다.
장수진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뭐해? 난 여기 있는데.”
“!!!!!”
그녀의 집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이미 그녀의 뒤에 있었다.
슈욱-!
장수진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상대에게 단검을 날렸다.
휘익-!
상대는 장수진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 한 번의 몸놀림으로 장수진은 상대가 상당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단번에 파악했다.
상대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체형을 통해 상대가 여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적은 딱 달라붙는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매가 모델 뺨치는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일단 사예드는 아니었다.
“하압-!”
장수진은 상대에게 강한 주먹을 날렸다.
퍼억-!
상대는 장수진의 주먹을 가볍게 잡아버렸다.
“어쭈! 꽤 한다 이거지?”
장수진은 곧바로 높이 뛰어올라 왼쪽 발로 상대에게 킥을 날렸다.
슈욱-!
상대는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며 장수진의 킥을 피했다.
장수진은 곧바로 다른 단검을 빼내 들었다.
“애매한 주먹질보다는 이게 난 더 좋아서.”
장수진은 상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다음 다시 달려들었다.
슈욱-!
장수진은 정면으로 적을 찔렀다.
하지만 적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돌리며 장수진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장수진은 상대의 몸놀림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탑클래스 요원이라 해도 무방했다.
상대도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아까까지 소극적으로 피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생각인 거 같았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상대는 장수진에게 달려들어 단검을 휘둘렀다.
휘익-!
장수진 또한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녀는 간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피한 장수진은 앞으로 돌진하며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압-!”
슈욱-!
장수진은 그대로 상대의 목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챙-!
상대는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버렸다.
“하, 하핫.”
이제껏 목소리 한번 안 낸 상대였는데, 갑자기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장수진은 그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뭔가 모를 그리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누구냐?”
“이 언니를 아직도 몰라보냐? 우리 수진이. 아직 멀었네?”
“!!!!!”
장수진은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그 목소리는 이설아의 목소리였다.
“마, 말도 안 돼…….”
장수진은 경악하며 그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냐. 이 언니가 살아있으면 안 되냐?”
상대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정말로 이설아였다.
“지, 진짜라고?”
이설아는 이라크 때의 얼굴 그대로였다.
계속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수진의 꼴이 우스웠는지 이설아는 웃기 시작했다.
“여전히 바보 같네. 우리 수진이는.”
이설아는 단검을 내려놓으며 친근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번 시험해봤는데 이제는 꽤 하네?”
이설아는 만족스러운 듯이 장수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장수진은 여전히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설아가 살아있다.
게다가 그녀는 능력자인 상태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게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서 있으면서 말하기는 그런데. 차라도 한 잔 주지 않으련?”
“…….”
장수진은 엄청 심각한 반면, 이설아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경계 좀 풀래?”
장수진은 고민이 많았다.
아무리 이설아지만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허허. 수진아. 이 언니가 너를 없애려면 진작에 없앴다. 오늘은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러 왔으니까 경계 좀 풀어줄래?”
이설아가 계속해서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기 때문에 장수진은 일단 그녀와 대화하기로 했다.
장수진은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이동했다.
“거기에 앉아 계세요.”
“그래. 진작에 그렇게 나와야지.”
이설아는 활짝 웃으며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차는 아무거나 줘. 커피면 더 좋고.”
“네.”
장수진은 이 상황이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데 이설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대충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내왔다.
이설아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한 다음 씨익 웃었다.
“대충 만든 거치곤 맛이 좋은데?”
“언니. 저 지금 그렇게 밝게 말할 기분 아니에요.”
장수진은 이설아에게 불편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언니가 지금까지 죽어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황에서 살아있다는 게 말이 안 됐고 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언니는 사망 처리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랬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놨으니까요.”
“대체 어떻게 된 건데요?”
이설아는 재밌다는 듯이 장수진을 바라봤다.
“너 지금 대장이 죽기 전에 능력을 얻은 것처럼 나도 갑자기 능력을 얻은 거야.”
이설아는 이미 이라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그동안 숨어서 지내셨던 거죠?”
장수진은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이설아에게 물었다.
“요원 생활이 지겨웠거든.”
“…….”
이설아의 말에 장수진은 그녀를 찌릿 노려봤다.
“야! 크큭. 뭘 그렇게 노려보냐? 진짜 장수진답다.”
“언니. 저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요원 생활이 지겨웠다는 것은 정말로 한 말이야. 너는 이 말을 공감해줄 줄 알았는데 민감해하다니 의외인데?”
“그 말이 아니잖아요. 언니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말이라도 해줬으면 그동안 그렇게 가슴 아프게 살지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너는 지금 내가 살아 돌아와서 기쁜 게 아니라 그동안 아파했던 세월에 화를 내는 거구나? 오히려 너에게 실망인데?”
이설아의 목소리에서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복권 당첨된 것처럼 의도치 않게 엄청난 능력이 생겼는데 옛날과 똑같이 살기는 싫더라고. 결국 우리도 남들에게 이용당하다가 그런 상황에 빠진 거였잖아.”
“…….”
장수진은 이설아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사예드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지.”
“네?”
장수진은 이설아의 입에서 의문의 이름이 나와 깜짝 놀랐다.
“방금 사예드라고 하셨어요?”
“응. 그 폭발 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아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 아이를 키우다니.”
“불쌍하잖아. 안 그래도 부모도 없는 아이인데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거두기로 했어.”
“그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장수진은 너무나 놀랐다.
“크큭! 야! 입 좀 닫아라. 뭘 그렇게 놀라? 진짜 여전히 바보 같다니까.”
이설아는 다시 장난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네가 어느 정도 예상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네가 거기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겠어? 다 이 내가 조치를 취해 놨었기 때문이었지.”
장수진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수진아.”
“……네.”
“너에게 제안할 게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