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카람레시의 아이 (1)
“근데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 디오에게 말을 걸었다.
“그 녀석……. 2017년에 아이였으면 지금도 여전히 꼬마잖아.”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현재 만 13세입니다.]
“…….”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이번 빌런은 미성년자다.
그것도 한참 미성년자…….
내가 이제는 살다 살다 미성년자하고 싸워야 한다니…….
“…하아. 어쩌자고 미성년자가 능력을 얻어 가지고…….”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커피 맛은 또 더럽게 좋네.”
나는 감탄하며 커피잔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라일 님이 이제껏 상대했던 상대들 대부분이 라일 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았었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야……. 그거랑 이거랑 같냐? 일단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라고. 근데 녀석은 그냥 코흘리개잖아.”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그 상대가 강하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이죠.]
“……이럴 때만 AI 같네. 평소에는 사람 같더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디오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상대는 미성년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봐준다고, 해서 녀석이 나까지 봐줄 리는 없다.
“잭슨처럼 미친놈은 아니어야 할 텐데…….”
[지금껏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특이할 점도 발견되지 않았구요.]
“잭슨도 그랬어. 숨어있으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갑자기 등장했지. 녀석이라고 그렇지 않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긴 합니다…….]
“하아…….”
조금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일단 수진이와의 약속은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이 싸움은 나와 수진이만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수진이의 의견이 궁금하긴 했다.
수진이는 과연 녀석과 싸우려고 할 것인지…….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단 수진이와 대화 좀 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수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얼떨결에 나는 수진이의 집에 오게 되었다.
“커피 마실래요?”
“아까 마셨어. 괜찮아. 안 줘도 돼.”
“네…….”
수진이는 자신이 마실 차만 가지고 왔다.
“…그런다고 진짜로 네 것만 가져오냐?”
“대체 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죠……?”
수진이는 어이없어하며 나를 쳐다봤다.
약간 짜증이 섞인 것 같기도 하다.
“풋!”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뿜어버렸다.
이 녀석은 놀리는 맛이 있다.
이렇게 반응이 찰진데 어떻게 안 놀릴 수가 있겠어.
“하아……. 제 흑역사를 지운 대가는 너무 크군요. 어쩌다가 저는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이 녀석…….
알아서 그 이야기를 꺼내네…….
“내 밑에서 일하면서 솔직히 좋은 점이 더 많잖아. 안 그래?”
“뭐, 그건 사실이긴 하죠. 이 정도 놀리는 거야 맞춰드리겠습니다.”
수진이는 이미 체념했다는 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에는 순간이동 하기 전에 메시지까지 다 보내시고.”
“난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괜찮은 상황인지 미리 물어본 거지. 만약 네가 샤워라도 하고 있어 봐. 내가 거기에 순간이동 하면 되겠냐? .”
“하지 그랬어요.”
“뭐……?”
내가 놀라자 수진이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녀석이 날 놀린 것이다.
하하…….
이 자식이.
“농담이에요. 이전에는 항상 갑자기 나타나셨으면서 오늘은 미리 물어보니까 낯설어서 그래요.”
장수진 말이 많다.
솔직히 이제껏 순간이동 사용하면서 상대의 의사를 물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거야 네가 이제껏 공공장소에만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집에 있었잖아.”
“그러긴 하네요.”
“그나저나 집 좋다.”
나는 한번 수진이의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60평 정도의 집인데 뭔가 아기자기하다.
이 녀석의 취향은 멕시코에서부터 알아보긴 했다.
자기가 살 곳만 잘 꾸며놨었지…….
“야. 이제 돈도 많은데 집이 돈에 비해서 너무 작은 거 아니냐?”
“전 양보다는 질이어서요. 그리고 쓸데없이 넓으면 관리만 힘들어요.”
그래.
내 집은 쓸데없이 넓어서 미안하다…….
“근데 집 이야기하러 여기 온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왠지 내가 혼자 있는 것을 반겨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장수진 이 녀석.
역시 요원 짬밥은 무시 못 한다.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맞아. 집 이야기하러 온 것은 아니지…….”
나는 이제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길 바란다.”
“…….”
갑자기 내 분위기가 달라지자 수진이는 흠칫했다.
하지만 마음은 단단히 먹은 것처럼 보였다.
“2017년 이라크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내 말에 장수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역시나 그 일은 수진이게 여전히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실이기에 나는 녀석에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폭발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한 명 있어.”
“네?!!!!”
수진이는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런데요?!”
녀석은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 앉아봐. 이야기 끝까지 다 들어.”
“……네.”
수진이는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그 아이가 우리와 같이 능력을 얻었고, 너에게 복수를 하려고 해.”
“…….”
수진이는 말은 없었지만, 숨소리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난 너의 흑역사를 지워주기로 약속했었지.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 너한테만 해주는 거야.”
“…….”
수진이는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나는 녀석이 결단을 빨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흑역사를 지워주기로 약속했고 또 네가 충실히 내 말을 잘 들어주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내가 그 녀석을 없애줄 수도 있어.”
“그, 그게…….”
수진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려왔다.
“일단……. 녀석과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딱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냥 나보고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텐데 녀석은 굳이 이런 선택을 했다.
“시도는 해볼게. 하지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녀석은 이제 고작 만 13세인 애송이야. 그냥 어쩌다 강한 힘만 얻은 어린아이라고.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복수심만 가득한 거 같아 대화가 안 통할 수도 있어. 그래도 만나고 싶어?”
“이, 일단……. 만나게 해 주십시오.”
“……알았어. 한번 추진해볼게.”
“저기…….”
수진이는 엄청 망설이며 나를 불렀다.
“응……. 왜?”
“라일 님은 그 애의 존재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저는 라일 님이 주신 힘을 얻은 이후로 계속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일 님께서 기록을 깔끔하게 없애주신 덕인지 그에 대한 자료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생존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어.”
“예?”
“단지 청와대로 쪽지가 하나 왔었지.”
나는 수진이에게 녀석이 보내온 편지를 건네주었다.
“…….”
수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편지를 읽었다.
“조만간 공격이 시작될 거래. 과거의 원한을 되갚아주기 위해서.”
“……네.”
“솔직히 이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단서는 희박해. 단지 아랍어로만 적혀 있기 때문에 중동에서 보냈을 거라고만 추정할 뿐이지.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디오랑 계속해서 조사해봤는데 알 수가 없어. 이걸 보낸 녀석이 데이터 흔적을 완전 깔끔하게 지웠거든.”
“이라크에서 그때의 생존자가 보낸 게 맞습니다.”
수진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유는?”
“레몬으로 글이 쓰여 있어요.”
빙고!
이 녀석은 무슨 초등학교 과학 실험처럼 편지의 빈 공간에다가 레몬으로 글을 썼다.
원래는 불로 그을리게 해야 글씨가 보이는데 디오가 분석해주었다.
“카람레시라고요.”
“맞어. 너는 역시 바로 아는구나.”
카람레시.
그때의 그 사변이 일어난 마을의 이름이다.
나는 카람레시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역시나 장수진은 바로 파악했다.
“이 녀석도 웃기는 녀석이야. 그 모든 원흉은 공관장 녀석과 테러리스트 놈들인데 왜 엄한 너에게 화풀이야?”
“저로 인해 그 기폭장치가 눌러졌으니까요.”
수진이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 그럼 그때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
“그건 아니지만……. 공관장 놈을 저지하고 기폭장치가 안 터지게 했었어야 했죠.”
“그때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 같아? 그게 성공할 확률은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희박했다고.”
“그랬다고는 해도……. 저는 성공했어야 했습니다.”
“…….”
이 이야기를 꺼낼수록 점점 자기 비하만 늘어놓고 있다.
“야!”
“네.”
“위대한 warrior의 부하가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어도 되는 거야?”
“……네?”
수진이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식으로 나를 쳐다봤다.
세상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 말을 계속했다.
“그깟 실패 좀 했다고 지금 기운 빠져서 죽을상을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안 차려? 네가 죽인 거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언제는 제 흑역사라고……. 제 실수로 그랬다면서요?”
수진이는 원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 자식이…….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이거지?
“그건 너 이용해 먹으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어. 이번에 봐서 알았지.”
“그걸……. 다 봤어요?”
“그래. 무튼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너 잘못 아니라고 인마! 그렇게 기죽고 살지 마.”
“…….”
“그리고 적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사정 딱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어? 아픈 경험을 했다고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거야? 그러면 나는 부모님이 카르텔에게 죽었으니까 막 세상 멸망시켜도 되겠네?”
말하는데 순간 좀 막무가내로 산 것 같아서 찔리긴 했다.
어쨌거나 말을 이어가겠다.
“그렇게 따지면 잭슨 녀석도 측은하게 바라봐야 하고, 봐줘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아니잖아. 그 미친놈을 어떻게 봐줘? 이 녀석도 마찬가지야. 지금 상황 파악 못 하고 덤비고 있잖아. 과거의 원한은 개뿔? 그냥 화풀이 대상 찾고 있는 거잖아!”
나는 수진이에게 다가가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여기서 망설이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 녀석이 잭슨처럼 미쳐서 세상을 작살낼 수도 있는 거란 말이야. 과거의 일이 어쨌든 지금 우리를 공격하겠다니까 막아야 한다고!”
“…….”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맞서 싸우겠습니다.”
목소리에 힘은 없어 보였지만 결심은 제대로 한 것처럼 보였다.
“좋아. 진작에 그렇게 나왔어야지.”
나는 가볍게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럼. 우리에게 덤비는 그 애송이를 작살낼 준비를 한번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