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깊은 원한 (2)
지금으로부터 5년 전
2017년 6월 17일
장수진은 군용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달받은 문서를 읽으면서 타겟들을 다시 숙지하고 있었다.
“장수진. 이럴 때 좀 쉬어. 그러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지치겠다.”
장수진의 선배 요원인 김진현은 아까부터 계속 문서를 보고 있던 그녀를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장수진은 집중하느라 그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장수진!”
김진현은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장수진은 김진현을 쳐다보았다.
“네. 선배.”
장수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넌 정말 매사에 열심이구나? 안 지치냐?”
“전혀요. 타겟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해야 나중에 실수하지 않는다고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내가 보기엔 넌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도 남은 것 같은데?”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장수진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서라.”
김진현은 어차피 말을 안 들을 게 뻔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김진현은 예전부터 국정원 내에서 알아주는 현장 요원이었다.
그는 인품도 뛰어나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장수진 또한 김진현을 많이 존경하고 따랐다.
김진현은 장수진의 싹을 알아보고 그녀를 키웠으며, 장수진은 또 김진현의 교육을 잘 따라왔다.
둘은 같이 주요 임무들을 수행해나갔고 국정원 내에서 최고의 콤비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만큼 둘의 합은 잘 맞았다.
그들은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 멕시코 마약 카르텔 인질 구출 작전에 투입되었다.
사실, 김진현은 국정원장에게 이번 일에서 장수진을 빼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마약 카르텔 관련 일은 너무 위험했기에 아끼는 후배인 장수진을 차마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장의 뜻은 완고했다.
“장수진도 이제 자네 덕에 많이 성장했어. 언제까지 애 취급을 할 것인가? 너무 그러면 오히려 애를 망치는 거야.”
국정원장은 김진현을 구슬리며 말했다.
“난 자네 둘이 훌륭하게 임무를 잘 완수할 수 있을 거라 믿네. 그러니까 장수진을 데리고 가서 그걸 멋지게 증명하게 오게.”
김진현은 결국 국정원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장수진을 언제까지나 애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진현 역시도 장수진이 이번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마약 카르텔은 멕시코 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로드리고 카르텔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마약왕 로드리고는 자신에게 덤비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없애버린다고 한다.
게다가 먼저 인질을 구출하려고 갔던 요원도 이미 녀석들에게 당해버린 상태였다.
그 요원은 꽤 실력도 있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번에 그들을 포함해 요원 15명이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선배.”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장수진이 그를 불렀다.
“어……. 왜?”
“마약 카르텔 놈들. 정말 마음 같아선 전부 다 쓸어버리고 싶네요.”
“…….”
김진현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누군 안 그러고 싶겠냐마는……. 너도 네 말이 실현 불가능한 거 알고 있지?”
“…….”
장수진은 말없이 입술을 비죽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표는 한국인 인질 구출이야.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은 어떤 것도 할 생각하지 마.”
김진현은 단호하게 장수진에게 말했다.
그는 장수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로드리고 카르텔이 붙잡고 있는 인질은 한국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여러 사람들도 같이 붙잡혀 있었고, 그들은 심한 고문을 받고 있었다.
김진현도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다 구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카르텔과 전면전을 해야 하고 그러기엔 15명의 요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한국인 인질만 재빨리 구출한 다음 탈출할 계획이었다.
애초에 그것도 제대로 될지 미지수인데 다른 사람들까지 구출할 여유는 없었다.
“그 녀석들 진짜 나쁜 놈들이네요……. 자신들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하거나 폭로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다니.”
“나쁜 놈들이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놈들은 너무 강해. 우리의 힘으로는 녀석들을 처리하기는 무리야. 미국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다고.”
“정말 이런 현실에 화가 나네요.”
정의감이 투철한 장수진은 분한지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그녀와 몇 번 같이 임무를 하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성향을 파악한 김진현이었다.
그는 장수진이 혹시나 임무 이외의 일에도 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현은 장수진에게 확실하게 숙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정색하면서 말했다.
“이거는 선임으로서 명령이야. 절대 다른 일에 관여하지 마. 우리는 한국인 인질만 빼 온다. 알겠어?”
“…….”
“대답해야지?”
“……알겠습니다.”
장수진은 힘없이 대답했다.
“목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곧 착륙합니다.”
그때 안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준비해. 내리자마자 곧바로 임무에 돌입할 테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네!”
팀원들은 김진현의 말에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표정이 어두운 장수진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목표지점에 착륙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멕시코 정규군이 그들을 맞이했다.
“공지가 이미 됐을 거로 생각하지만, 한 번 더 확인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출 작전에 저희가 직접 참여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질을 구출해서 안내한 장소까지 데리고 오시면 그다음부터는 저희가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김진현은 멕시코군 지휘관에게 미소를 보낸 다음 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지금부터 임무에 돌입한다. 우리와 인질의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적들을 사살해라. 그리고 카르텔과의 전면전이 일어나면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으므로 신속하게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알겠나?”
“예!”
팀원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곧장 시작하자고.”
김진현 팀은 멕시코 정규군이 마련해준 차를 타고 정글 안으로 들어갔다.
인질들은 정글 한복판에 있는 오두막에 갇혀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놓아져 있기는 했지만, 포장도로가 아니었기에 굉장히 거칠었다.
멕시코군은 어느 정도 가다가 갑자기 차를 멈추어 세웠다.
“이곳부터는 걸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더 들어갔다가는 들키고 마니까요.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인질을 구출해서 여기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멕시코군은 선을 철저하게 그었다.
남의 나라 인질을 구출하는데 당연히 그들이 목숨 걸고 마약 카르텔과 싸울 이유는 없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이 정도 해주는 것도 사실 감지덕지였다.
김진현은 부하들을 이끌고 정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수진은 정글에서의 임무는 익숙지 않아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들은 숨죽이며 인질이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멈춰.”
앞서가던 김진현이 주먹을 쥐며 대기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보니 오두막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이 보였다.
새벽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지는 않았다.
세 명 정도의 경비만 나와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잘 처리하면 문제없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진현은 신속하게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기조는 이곳에 남아서 우리를 엄호해줘. 구출팀은 나를 따라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다.”
김진현은 조용히 부하들을 향해 알렸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김진현 팀은 조심스럽게 타겟들을 향해 걸어갔다.
경비들은 당장에 일어날 일은 꿈에도 모른 채 하품만 해대고 있었다.
김진현의 부하들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각자 맡은 타겟의 머리를 조준했다.
그들은 김진현이 지시하자 동시에 총을 발사했다.
피슝-!
소음기로 인해 작아진 총소리가 옅게 지나갔다.
털썩-!
경비들은 일제히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빨리 이동해.”
김진현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려 얼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경비들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난 소리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오두막 안에 있던 카르텔 일원들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안에 있는 경비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요원들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터벅-! 터벅-!
그들이 오두막의 대문에 도착했을 때, 누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진현은 다시 부하들을 대기시켰다.
끼익-!
대문이 열리면서 카르텔 일원 한 명이 나왔다.
김진현은 얼른 녀석의 입을 막았고, 그 옆에 있는 수진이는 칼로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카르텔 일원은 몇 번 바둥바둥하다가 축 늘어졌다.
김진현은 곧바로 대문 옆에 시체를 두었다.
그는 수신호를 보내 요원들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요원들은 신속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코 고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아직 다들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요원들은 숨죽이며 얼른 인질을 찾아 나섰다.
장수진은 왠지 음침해 보이는 방문을 발견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거기에 귀를 대보니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장수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방 안에는 피 냄새와 썩은 내가 진동해 장수진은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한국인 인질을 찾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에 피가 묻어 있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장수진은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인질을 찾았다.
그녀는 결국 동양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이봐요. 당신을 구출하러 왔어요. 정신 차리세요.”
“으윽.”
그는 신음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구원의 손길이 오자 그는 너무나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장수진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인질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 하나가 고문으로 인해 많이 다친 상황이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까 같이 가요.”
장수진은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부축해서 나갔다.
그녀가 낑낑대자 동료가 나서서 말했다.
“나에게 넘겨. 너는 나를 엄호해줘.”
“예.”
동료에게 인질을 인계한 다음 장수진은 다시 방문을 닫고 그곳을 나가려고 했다.
“도와…… 줘…….”
다른 인질들이 그녀를 향해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들의 힘겨운 목소리는 장수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정신 차려 장수진. 어서 나가야 해.”
장수진이 다른 인질들에게 한눈 팔려있자 김진현이 재빨리 와서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선배. 그냥 녀석들 다 쓸어버리고 저 사람들 다 구출하면 안 돼요? 지금 다 자고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네 맘은 알겠지만 그건 불가능해. 마약 카르텔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처 다른 오두막에서도 대기하고 있어. 그들까지 합류하면 우린 그냥 끝장이야.”
김진현은 날카로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장수진은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여전히 망설였다.
“장수진 정신 차려. 얼른 여기를 나가야 해. 네가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우리 팀원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어!”
그 말이 장수진에게 비수처럼 다가왔다.
김진현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기에 장수진은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접고 오두막을 나가기로 했다.
김진현 팀은 인질을 구했기 때문에 이제 재빨리 그곳을 나가려고 했다.
탕-!
“크윽!”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면서 인질을 부축하며 가고 있던 동료가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