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비극의 땅 몬테레이 (1)
산체스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오싹함을 처음 느껴봤다.
카를로스에 이어 페르난도.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선전포고가 왔다.
그가 예전에 한국인 사업가를 죽이면서 생긴 원한이 이제 그의 목덜미를 조여오고 있는 것이었다.
산체스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한 이름을 찾았다.
[로드리고]
몬테레이 카르텔을 산체스에게 넘겨준 사람이자 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사람.
그는 이문호 암살 사건의 최종 배후이기도 했다.
산체스는 얼른 그의 옛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산체스. 무슨 일이야?”
로드리고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반면 산체스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뭐가?”
“warrior가 이번에는 저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
이미 산체스는 로드리고에게 모든 것을 말해준 상황이라 그는 warrior가 이문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드리고 또한 warrior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그가 자기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산체스. 한번 그와 협상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로드리고는 warrior의 힘을 인정하며 한발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나은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산체스 또한 거기에 동감하고 있었다.
“예. 보스.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이후에 결과 좀 알려주게.”
“예.”
로드리고와 통화를 마친 산체스는 곧바로 warrior와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고 확인해보니 발신자가 warrior였다.
산체스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다. 산체스.”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까?”
산체스는 괜히 warrior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공손하게 나왔다.
“흐흐흐. 되지도 않는 예의 차리지 마라. 역겨우니까.”
오히려 그게 더 warrior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보다.
“네 더러운 인성은 이미 다 알고 있어. 어디서 연기질이야?”
“……그렇게 적의만 가지고 있지 마시고, 마음을 터놓고 우리 한번 대화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산체스는 warrior의 도발에도 꾹 참으며 여전히 굽힌 태도를 유지했다.
“응. 대화하려고 전화했어. 네가 나와 협상하고 싶은 거 같아서 말이야.”
산체스는 warrior가 자신과 로드리고의 통화를 다 엿듣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어설프게 접근하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나오기로 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당신과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 궁금하니까.”
“그만 여기서 멈춰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대로 저희가 다 해드릴 테니까 말이죠.”
“흐흐흐. 그래? 정말 원하는 대로 다 해줄 거야?”
“……예.”
산체스는 이미 각오하며 이 말을 했긴 했지만, 상대가 무엇을 요구할지 몰라 사실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좋아. 이것만 들어주면 내가 다 그만두고 여기서 그만 물러가는 것으로 할게. 어때?”
“예.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로드리고를 죽이고 그다음에 너도 자결해.”
warrior의 이 말은 산체스의 귀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절대 못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warrior의 말은 단호하면서 깔끔했다.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은 어떠십니까? 이를테면 돈이나 아니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다량의 마약 같은…….”
“개수작 부리지 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거야. 다른 것은 필요 없어.”
warrior는 완고하게 나왔다.
산체스는 거기에 어떤 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녕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산체스는 그만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그의 평정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warrior는 놓치지 않았다.
“모두 몰살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낫지 않겠어? 부하들을 위해 죽는다니 얼마나 명예로워. 어차피 죽을 거 내가 이렇게 명예라도 챙길 수 있게 해주는 데 별로 내키지가 않나 봐?”
“지금…… 저랑 장난하십니까?”
“너는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
산체스는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warrior…….”
그는 결국 그동안 쌓였던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너에 대한 대비는 다 되어 있다. 오히려 방금의 제안이 너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였다. 굳이 파국을 원하면 그렇게 하자. 최선을 다해 너를 맞서주지.”
“하하하하하하하.”
warrior는 재밌다는 듯이 크게 웃어댔다.
“역시나 다들 이렇게 나온다니까. 난 이렇게 숨겨왔던 민낯을 드러낼 때가 제일 통쾌한 것 같아.”
warrior도 본래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너와 협상할 생각은 없었다. 네가 내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극악의 확률로 네가 정말 그대로 해줬다면 난 정말 여기서 그만두고 넘어갈 생각이 있었지만, 역시는 역시네.”
“까불지 마라. 난 너가 그렇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다.”
“하! 미치겠네. 네가 뭐든 간에 나에게 넌 그냥 부모님의 원수일 뿐이야. 그리고 그걸 떠나 네가 뭐가 잘난 건지도 난 모르겠다.”
“계속 시답잖은 소리나 할 거면 이만하지. 불만 있으면 직접 찾아와서 덤벼라. 내 친히 전력으로 너를 상대해줄 테니까 말이야.”
“오케이. 목 딱 씻고 기다리고 있어. 조만간 거기로 갈 테니까.”
“무운을 빈다.”
산체스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warrior와 통화를 끊었다.
이제 그는 warrior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warrior. 이 산체스를 아주 개무시하고 있나 본데 사람 잘못 건드렸다.”
산체스는 warrior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곧바로 카르텔 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전기 절연복을 입은 채로 그들의 전 재산이 모여 있는 창고를 집중적으로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몬테레이 카르텔은 다가올 폭풍에 긴장하며 본인들 나름대로 철저한 대비를 해나갔다.
***
페르난도 일당과 전투를 치른 뒤 우리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본부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드미트리 패밀리 녀석들과 류헤이카이 놈들은 이제 같이 좀 지냈다고 많이 친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드미트리랑 류헤이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당부해서 그런가, 이제까지 한 번도 이 두 집단이 싸운 경우는 없었다.
데이터 쉴드에 내장되어 있는 번역기 기능을 통해 서로 대화도 잘 통했다.
다들 마약 카르텔들을 잡으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풀렸는지 오히려 해맑은 느낌이었다.
장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구소에 박혀 있을 때와 달리 표정이 밝았고 가끔 콧노래도 불러대기도 했다.
“어이. 장수진.”
괜히 그 모습을 보자 건들고 싶어졌다.
“왜요?”
수진이는 의아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재밌나 봐? 얼굴이 좋네?”
“뭐 솔직히 재밌기는 하네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라일 님은 어떠세요?”
“뭐가?”
“사람 그렇게 죽여보는 거. 솔직히 익숙하지 않잖아요. 아까 표정도 어두우시던데요.”
“…….”
수진이 말대로 솔직히 페르난도를 죽였던 경험이 나에게 그렇게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
“점점 익숙해지겠지.”
“그러겠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수진이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는지 씁쓸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거기에 의문 사항은 없어. 마약 카르텔들이 없어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거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맞아요. 저도 그런 생각으로 임무에 임하기 시작했죠. 저 나쁜 놈들이 없어져야 이 세상의 정의가 실현된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까 속 편해지더라고요. 그게 팩트이기도 했고요.”
“하하하하. 나름 팁이라고 알려주는 거냐?”
“그냥 아까 라일 님을 보니 예전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요.”
날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특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건방지기도 했다.
“수진아. 고맙긴 한데 그런 말은 보통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한테 하는 거 아닌가?”
“뭐 꼭 그래야 합니까? 그냥 먼저 경험한 사람이 나중에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주면 되는 거죠.”
“이게 한 마디를 안 지네?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그냥 넘어간다.”
“헤헤헤.”
내 말에 수진이는 실없이 웃었다.
“이제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몬테레이에 갈 거야. 거기가 바로 비극의 장소지. 내 아버지가 세웠던 공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니 갑자기 화가 확 올라오고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역시 하루빨리 그곳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다.
“내일 바로 그 비극을 바로잡도록 할 거야. 그러니까 푹 쉬고 낼 싸울 준비 잘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수진이는 나에게 가볍게 경례한 다음 자기 방으로 쉬러 갔다.
나도 적당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 수진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녀석의 말이 맞다.
그 나쁜 놈들이 없어져야 세상이 이득이다.
***
한밤중의 멕시코 몬테레이
몬테레이 카르텔들이 운영하는 각 시설들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은 언제 warrior 일당이 쳐들어올지 몰라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전 재산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 경계는 특별히 더 엄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암…….”
계속된 경계로 피로가 쌓인 경비 하나가 하품을 내쉬었다.
그러자 동료 하나가 그를 매섭게 쏘아봤다.
“야. 정신 차려! 너 그러다 순찰 나온 보스에게 혼난다.”
“알겠어. 근데 솔직히 계속 이렇게 서 있으니까 피곤하다고.”
“어쩔 수 없어. warrior가 곧 여기를 쳐들어오겠다고 선전포고한 상황이잖아. 그러니까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알았다.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야.”
동료의 잔소리에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경계에 임했다.
지지직!
그때 갑자기 그들의 무전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들리지 않았다.
“……뭔데?”
그들은 이상해하며 무전에 대고 물었다.
“야. 눌렀으면 말을 해라. 뭔데?”
“…….”
무전에는 응답이 없었다.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
한 명이라도 대답해야 정상인 상황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지직!
그때 또 무전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갑자기 목소리가 확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도망쳐!!!!! 공격이 시작됐어!!!!! 끄아아아아악!!!!”
다급한 외침은 비명 소리와 함께 그만 끊겨버렸다.
투두두두두두두-!!!
퍼엉-! 펑-!
갑자기 주변에서 총격전이 시작됐고 폭발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온 거 같은데?”
“망할!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놈들이 이곳에도 분명 올 거야.”
창고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은 온 신경을 집중하며 경계를 섰다.
“저, 저기!”
갑자기 경비 한 명이 어디를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모두 그곳을 바라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 두 명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오자 점점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동양인 남녀가 그들을 비웃으며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남자는 창고 경비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