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전투 채비 (5)
“소중한…… 사람이요?”
“예.”
“…….”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거 뭔가 말하고 나니까 굉장히 낯부끄러운 소리다.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건물은 잘 인수했나요?”
“네? 건물이요?”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박이나는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멕시코 지사 건물이요.”
“아……. 네.”
새로 건물을 짓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일단은 기존에 있는 적당한 건물을 매수하고 나중에 정식으로 새 건물을 짓는 것으로 했다.
어차피 명목상으로 필요한 건물이었지 정말로 회사 건물로 사용할 것은 아니었기에 멕시코시티에 있는 적당한 건물을 구입해달라고 박이나에게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마침 멕시코 시티에 부도난 10층짜리 건물이 있더라고요. 거기를 구입했습니다.”
“좋습니다. 박이나 씨가 구입했으니 괜찮은 곳이겠죠.”
실제로 디오를 통해서 확인해봤는데 정말로 잘 구입했다.
역시 박이나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수다를 떨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했고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그러게요.”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갔다.
“내일 또 일하시려면 가서 쉬셔야죠.”
“……네.”
박이나는 많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였다.
“라일 씨.”
“네.”
“멕시코 다녀와서 다음에도 또 이렇게 만나요.”
“……좋습니다.”
우리를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차로 박이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띠리리리-!
일수였다.
“어. 무슨 일이야?”
“간만에 받은 휴가인데 내 소중한 친구랑도 같이 놀려고 전화했지.”
데이터 쉴드 2차 개발도 끝났고 생산도 문제없이 들어가고 있어서 연구진들은 지금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일수는 드디어 해방됐다고 아주 기뻐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일수와 술 한잔하려고 했었다.
“바쁘냐?”
“아니. 집에 가는 중이었어.”
“그래? 그러면 오랜만에 같이 술 한잔하자.”
“좋지. 근데 좀 한적한 곳에서 만나면 안 될까?”
“한적한 곳에서?”
일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제껏 잘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내가 유명인이 되었더라고. 괜히 눈에 띄어봤자 좋을 거 없잖아.”
“하하하하하. 넌 그걸 이제야 느꼈냐?”
일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알았다. 그러면 그냥 네 집에서 먹는 거 어때? 장은 내가 봐서 갈 테니까.”
“오케이. 맛있는 걸로 사와.”
“알겠습니다.”
집에 와서 간단하게 씻고 일수를 기다렸는데…….
이 녀석 혼자만 오는 게 아니었다.
수진이도 같이 여기로 왔다.
“얘도 여기에 올 줄을 몰랐는데?”
나는 황당해하며 일수에게 따졌다.
“아까까지 같이 놀고 있었어. 바로 헤어지기는 아쉬워서 말이야.”
일수는 가볍게 내 옆구리를 치며 말했다.
“왜? 싫어?”
일수는 애처롭게 날 바라보며 물었다.
니가 무슨 ‘장화 신은 고양이’냐?
그렇게 딱하게 쳐다보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옆에 있는 수진이로 시선을 돌렸다.
딱 보니 녀석도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겠어.
“아니. 좋아.”
생각해보니 수진이랑은 같이 술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오케이!”
일수는 펄쩍 뛰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집주인은 쉬고 계세요. 저희가 다 준비할 테니까요.”
둘은 자연스럽게 장은 봐온 것을 부엌으로 들고 가서 술자리를 준비했다.
일수와 수진이는 그새 같이 좀 일했다고 요리하는 것조차 호흡이 잘 맞았다.
내 친구와 나를 스토킹(?)하던 녀석이 이렇게 가까워지다니…….
새삼 그 둘이 친한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아까 박이나가 했던 말이 여기에 딱 어울리는 것 같다.
그냥 즐기자.
잠시 후 둘은 요리를 내왔다.
간단한 조리 음식일 줄 알았는데 감바스, 파스타, 필라프 등 다양한 요리가 나왔다.
“……뭐냐 이거?”
“수진이가 만들어 준 거야. 애 요리 잘하더라고.”
나는 놀란 얼굴로 수진이를 바라봤다.
그에 녀석은 옅게 코웃음을 치며 피식했다.
야…….
그 반응은 대체 뭔데?
“흥. 뭔가 기분 나쁘게 우쭐대는데 과연 맛도 그럴까?”
“한번 먹어보시죠.”
수진이는 자신 있게 나왔다.
오냐.
내가 먹고 신랄하게 평가해주지.
나는 얼른 녀석이 만들어온 파스타를 맛보았다.
!!!!!!!
“미쳤네. 미쳤어…….”
깜짝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수진이는 ‘거봐요’라고 말하는 듯이 뻐기며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재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우리 수진이 진짜 요리 잘 하지 않냐?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일수는 자기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
이제는 우리 수진이냐?
“장수진이 인재는 인재네. 국정원 최고의 현장 요원에다가 이렇게 요리까지 잘하고. 넌 대체 못 하는 게 뭐냐?”
“라일 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거요?”
쟤 진짜 요새 많이 기어오른다.
일단 맛있는 요리 해줬으니까 이번은 봐준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다 같이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출출할 시간이어서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건배!!!!”
우리는 힘차게 맥주잔을 부딪친 다음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아! 좋구먼~.”
“하하하하. 뭔 아재같이 말하냐?”
간만에 녀석과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너무 재밌고 행복했다.
“근데 라일아.”
“어.”
“아까는 어디 갔다 온 거야?”
“이나 씨 만나고 왔어.”
“!!!!!”
내 말에 수진이와 일수가 화들짝 놀랐다.
“뭐?!!”
“정말요?”
둘은 갑자기 엄청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수는 그런다 치는데 장수진 너는 왜 난린데?
“왜 그래?”
“설마 둘이 데이트한 거야?”
“……그게 데이트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둘이 같이 밥 먹었어?”
“응.”
“그리고 카페 갔고?”
“응.”
“그럼 데이트 맞아.”
“…….”
대체 그런 정의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건데?
“둘이 이제 사귀시는 건가요?”
갑자기 수진이가 확 치고 들어오며 일수를 거들었다.
“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왜요? 사귈 수도 있는 거죠.”
“넌 대체 왜 거기에 관심 가지는 건데?”
“그냥 우리 보스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궁금하잖아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는지.”
“너……. 자꾸 까불면 혼난다?”
이번에는 정색하고 말했다.
바로 깨갱한다.
“야! 근데 저녁은 왜 같이 안 먹었어? 둘이 술이라도 한잔했으면 좋았잖아. 이나 씨가 바쁘대?”
“아니. 그냥 자연스럽게 헤어졌는데.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저녁까지 붙잡기는 좀 그렇잖아.”
“…….”
일수랑 수진이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야! 이 바보야.”
일수는 답답한지 언성을 높였다.
“왜 그래?”
“진짜 답답하다. 그 좋은 기회를 놓쳐? 적당히 밤까지 놀다가 들어가면 되지 왜 이렇게 빨리 들어간 거야? 박이나도 네가 별말 안 하니까 그냥 들어간 거 아니야!”
“야……. 너 불필요하게 흥분하고 있어.”
“에잉!”
일수는 속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간 많잖아. 멕시코 다녀와서 보면 되는 거고. 그냥 데이터 쉴드 2차 버전 선물로 주고 헤어졌어.”
내 말에 일수는 뭔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듯한 눈치였다.
“너 그거 줄 때 뭐라고 하면서 줬어?”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거라고 했어.”
“나이스!”
일수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녀석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확실하게 해주는구나. 이 친구는 만족한다.”
일수는 새로운 맥주캔을 깠다.
“건배하자!”
“짠!”
우리 셋은 맥주캔을 부딪치며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제 곧 멕시코에 갈 예정이야.”
“저도 당연히 가야 하는 거죠?”
수진이의 말에 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아닌데?”
“…….”
수진이 또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왜요?”
“넌 여기서 일수랑 쉬고 있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껏 부려 먹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원래는 수진이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일수 때문이었다.
수진이가 간다면 분명 이번에도 또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일수가 너무 완고해서 북한에는 보내긴 했었지만, 녀석에게 그런 세계를 더 이상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 설마 나 때문이냐?”
일수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내가 이러는 이유를 바로 파악했다.
“……아니야.”
“야. 내가 너랑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이 정도도 파악 못 하겠냐? 이게 누굴 속이려고.”
일수는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 안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너 원래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에 나는 놀라며 녀석을 쳐다봤고 수진이는 잘 나가다가 굳이 왜 그러냐는 듯한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사실 수진이가 있으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아 필요하기는 했었다.
“진짜?”
“응. 진짜로.”
“저기요……. 제 의사는 없는 겁니까?”
수진아.
넌 좀 빠져 있어 줄래?
“어차피 라일이가 다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다녀와.”
“하아…….”
수진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죠. 어차피 이미 저도 거기에 가겠거니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까요. 같이 가죠. 보스. 또 몸 좀 풀어야죠. 사실 예전에 임무 수행 중에 마약 카르텔 녀석들로 인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 놈들에게 갚아야 할 것도 있어요.”
“좋네! 그러면 수진이와 라일이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무사 귀환을 위해 건배를 할까나? 둘 다 캔 들어.”
갑자기 또 건배 판이 벌어졌다.
“그러면 우리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또 맥주를 시원하게 벌컥 들이켰다.
***
몬레테이 카르텔 본부
“산체스 님!”
페르난도는 사색이 되어 급하게 자신의 보스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페르난도. 왜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
산체스는 의아해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 그게…….”
페르난도는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도 찼고 또 두려움도 앞섰기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차분하게 말해. 무슨 일인데?”
“warrior 그 녀석이 부하들을 이끌고 이미 여기 멕시코에 들어왔답니다.”
“뭐?!!!!”
산체스는 아연실색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말인가? 분명 입국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잖아. 어떤 낌새도 없다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보니 가르시아 대통령과 미리 작업을 해 놓은 것 같습니다. warrior의 회사인 디씨소프트의 멕시코 지사가 멕시코시티에 갑자기 생겼고, 거기로 녀석의 부하인 드미트리 패밀리와 류헤이카이 놈들이 위장 취직해서 들어온 걸로 파악했습니다.”
“하! 나! 이런!”
산체스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냈다.
“그 출입국 관리 놈들은 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데.”
“저도 화가 나서 놈들에게 따졌는데……. 녀석들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다고 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산체스는 화를 버럭 내며 책상을 쾅 하고 내려찍었다.
“아무래도 그것 또한 warrior 녀석이 작업을 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망할!!!”
산체스는 분노로 인해 이마에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망할 자식들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와? 페르난도!”
“네.”
“당장 그곳을 공격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