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전투 채비 (4)
일요일.
모처럼 한가로운 날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이 여유로운 날 뭐 하고 있냐고?
박이나를 만나 차 한잔하고 있다.
전에 여유로워지면 같이 놀러 가자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약속을 오늘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일의 발단은 이렇다.
띠리리리-!
박이나에게 온 전화였다.
“네. 이나 씨.”
“라일 씨.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게 멕시코 지사 관련된 일인 줄 알았다.
“예. 당연히 가능하죠. 말씀하시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요즘 저희 통 못 만났는데 이렇게 전화로만 말하기는 서운한데요.”
“네?”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좋죠.”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서 적극적으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게 별로 안 내켜 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싫으세요?”
“아뇨! 그럴 리가요. 너무 좋습니다.”
“진짜죠?”
“네. 정말입니다.”
“후훗.”
박이나는 수줍게 웃었다.
“혹시 주말에 뭐 하세요?”
“박이나 씨 만날 생각인데요.”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럼 일요일에 봬요.”
좋은 멘트였다고 생각했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싱거웠다.
“네. 혹시 가고 싶으신 곳 있으세요?”
“라일 씨가 소개해주는 곳이요.”
이번에는 박이나가 선수를 쳤다.
솔직히 좀 웃겼지만 나도 별 반응을 안 보이기로 했다.
“그럼 일요일 여유롭게 오전 11시에 집 앞에서 뵙기로 하죠.”
“좋아요.”
나는 박이나를 데리고 백기완 대통령과 처음 만났었던 한정식집에 갔다.
내가 그렇게 미식가는 아니지만, 괜찮다고 생각한 곳은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했다.
여기는 자신 있게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박이나를 데리고 온 것을 나는 후회했다.
가게에 대문짝만하게 이런 간판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백기완 대통령과 warrior가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인 장소]
거기에 덧붙여 백기완 대통령과 내 사진도 찍혀 있었다.
“…….”
진짜 할 말을 잃었다.
아…….
머리야.
조용히 고개를 푹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하하하하하하.”
박이나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댔다.
“라일 씨. 어느새 유명인이 다 되었네요.”
“민망하네요.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저 이런 줄 전혀 모르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말에 박이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다른 곳에 갈까요?”
“왜요? 좋아 보이는데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들어가요.”
박이나가 신나 하면서 말하길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
우리는 안내하러 온 직원은 내 얼굴을 보고 그만 경악했다.
“어머! 어머! 세상에!!!”
직원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하게 반응했다.
“warrior 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우와! 영광입니다. 바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의 과한 반응에 민망해하고 있는데 박이나는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진짜 창피해 죽겠다…….
직원을 따라가는데 어떤 곳에 눈길이 쏠렸다.
“이 방…….”
나와 백기완 대통령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었다.
그 문 앞에는 팻말이 하나 붙어 있었다.
[이곳은 백기완 대통령과 warrior가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던 방입니다.]
어느새 그곳은 명소가 되어버렸다.
“이 방은 몇 달 전부터 예약해도 오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에 이용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어서요.”
“예…….”
아주머니.
생각도 없었습니다.
“라일 씨. 인기 많으시네요? 이거 제가 같이 다녀도 되나 싶어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말 말아주세요. 진짜 부끄럽네요. 이런 관심은 부담된다고요.”
“그러기엔 라일 씨가 이미 우리나라에서 슈퍼스타이긴 하죠.”
내가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주로 집과 청와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별로 그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현장에서 직접 느끼니 내가 유명인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는 안내 받은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조용히 있을 수 있겠네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집 사장님이 들어와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warrior 님. 이곳을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이제 그만 합시다.
이러면 부담돼서 앞으로 다시는 안 온다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이제 좀 조용히 있고 싶네요.”
“예.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사장님은 더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나가주었다.
다행히 말귀는 통했다.
“진짜 힘드네요.”
“후후. 유명인이라는 것은 피곤한 거죠?”
박이나는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갑자기 예전에 발표회 끝나고 저 놀렸던 게 생각나네요. 이제는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네요. 정말 사람 인생을 알다가도 모른다니까요?”
일수랑 나랑 ‘이나좌’, ‘대표좌’ 하면서 놀렸던 일을 말하나 보다.
박이나는 고소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업보 청산인가요?”
자고로 인생은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이다.
“저도 처음에는 되게 어색하더라고요. 근데 지금은 익숙해졌어요. 라일 씨도 곧 익숙해질 거예요.”
박이나 또한 많이 유명해진 상태였다.
프렌드쉽 발표회를 통해 이미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여신으로 불리고 있었고, 이제는 프렌드쉽의 성공으로 유능하고 젊은 CEO로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SNS에서도 심심치 않게 박이나와 관련된 게시물이 올라왔다.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많았으니 그녀는 어느새 그런 것이 일상이 되었나 보다.
반면 밖을 잘 돌아다니지 않던 나는 이런 게 굉장히 어색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세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능력을 공개하고 드러내놓은 이상 조용히 살기는 글렀다.
박이나 말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게 마음 편하다.
“배고프네요. 바로 음식 시키죠?”
“네~.”
박이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음식은 코스로 해서 금방 나왔다.
“우와-! 맛있어요.”
박이나는 음식들을 맛보고 감탄하며 외쳤다.
“저번에 레스토랑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라일 씨는 맛집을 많이 알고 계시네요.”
하하…….
가격을 이렇게 비싸게 받는데 맛없으면 사기지.
속으로만 말하고 가볍게 그녀를 향해서 웃었다.
“이 음식점에서 제가 백기완 대통령께 warrior 특별법을 제안했었습니다.”
“그래요? 여기 정말 역사적인 장소가 맞네요. 이런 곳에 데려와 주시다니 정말 영광인데요?”
예전에도 느꼈던 건데 박이나의 리액션은 정말 너무 좋아서 상대방이 말할 맛이 나게 해준다.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그녀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리액션을 해준다.
“또 방문했다고 여기 또 난리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정말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이제 못 오겠네요.”
“맛있는 곳인데 아쉽네요.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겠어요.”
나도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라 생각하고 음식을 음미하며 즐겼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우리는 카페로 갔다.
카페는 박이나가 추천해줬던 곳으로 왔다.
같이 밥 먹고 나서 가려다가 갑작스러운 중국의 방해로 가지 못했었던 그곳이다.
다행히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박이나가 이 카페의 커피 맛이 좋다고 자신 있게 장담을 했었는데 정말이었다.
듣자 하니 여기 바리스타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나는 기분 좋게 커피를 음미했다.
“마음에 드나 보네요?”
박이나는 그런 나를 흐뭇해하면서 쳐다봤다.
“이나 씨가 추천해주신 곳이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완전 좋은 곳이네요.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요.”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박이나도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했다.
박이나는 정말 우아하다.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움에 취해 넋 놓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박이나는 그런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당황해서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뭔가 찔리는 기분인 건 왜일까?
나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박이나는 그런 나의 모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뭐요?
옥상에서 일수와 나눴던 대화 때문에 괜히 박이나를 의식하게 된다.
“라일 씨. 조만간 멕시코로 떠날 예정이시죠?”
“네. 그렇죠.”
“또 한동안 못 보겠네요…….”
박이나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죠. 제게 있어서 이 일은 숙명 같은 거라 꼭 해야 하거든요.”
“그렇죠. 부모님을 죽인 원수들인데요. 저 같았어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거예요.”
박이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어요…….”
갑자기 훅 들어온 그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의 말대로 부모님 없이 살아온 그 시절들이 내게는 너무나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무너질 거 같아서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기로 했다.
“일수가 있어서 괜찮았어요. 녀석이 계속 제 옆을 지켜줬으니까요. 이제는 박이나 씨도 계시고요. 정말 제게 큰 힘이 되어주십니다.”
“후후. 그렇게 말해주시니 좋네요.”
“빈말로 하는 거 아니에요. 멕시코 지사 세우는 일로 많은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데 기꺼이 해 주셨잖아요.”
“솔직히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대의를 위한 것이잖아요. 거기에 일조할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릴 수 있어요.”
박이나는 내게 밝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이번 일은 저 말고도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마약 카르텔들을 사라지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겁니다.”
“라일 씨는 정말 대단해요. 저도 라일 씨 덕에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들 중 한 명이잖아요. 덕분에 저는 새 삶을 살고 있어요. 그리고 라일 씨는 이 대한민국을 완전히 청정한 지역으로 만들었죠. 이제껏 그 누구도 못 한 일을 라일 씨는 해내고 계세요.”
박이나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도 분명 잘 해내실 거예요. 저는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꼭 잘 해결하시고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빌게요.”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격려해주는 그녀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무래도 지금이 선물을 줄 타이밍인 거 같았다.
“이나 씨를 위해 제가 준비한 게 있어요.”
“네? 뭔데요?”
“그냥 조그마한 선물입니다.”
나는 품에서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바로 확인해도 돼요?”
“네. 그러시죠.”
거기에는 데이터 쉴드 2차 버전이 들어있었다.
박이나는 궁금해하며 그걸 쳐다봤다.
“이게 뭔가요?”
“그걸 차고 있으면 어떤 공격이든 막아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다니셔도 돼요.”
“우와-! 이거 설마 계속 개발하고 계신 거 그거 맞죠?”
“네. 맞습니다.”
박이나는 매우 기뻐하며 데이터 쉴드를 찼다.
“제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예?”
박이나는 내 말에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