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새 시대 (2) (45/201)

44화. 새 시대 (2)

“조만간 각하께서 찾아올 예정입니다.”

장수진은 주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대통령께서?”

“네.”

이거 또 재밌어지는군.

이제는 하다 하다 대통령까지 나를 보자고 하네.

“그래서 너는 파티에 참여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비둘기 역할 하려고 왔다?”

“아닙니다. 축하하려고도 왔습니다. 케이크 들고 온 거 보면 모릅니까?”

내가 놀리자 장수진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황급히 변명했다.

“그래. 뭐 알았다. 각하께서는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하시던?”

“저도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적의를 품고 만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장수진은 이것만큼은 확신하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뭐 그건 직접 만나면서 알아보도록 하지.”

“각하께는 언제 오시라고 전달할까요?”

“난 언제든 괜찮아. 근데 아무래도 내가 찾아가는 게 나을 거 같다. 대통령께서는 나랏일 보시느라 바쁘시잖아. 또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도 모양 빠지고. 내가 친히 가 드려야지.”

“아…….”

장수진은 의외라는 듯이 반응했다.

아무래도 얘는 내가 대통령이 이곳으로 오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줄 알았나 보다.

수진아…….

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야.

“대신 이호영 원장보고 나 데리러 오라고 해. 내가 혼자 그냥 가면 이번에는 내 쪽에서 모양 빠지잖아. 서로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

장수진의 희미한 콧소리가 들렸다.

마치 ‘역시나’라고 말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

내가 국정원장한테까지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

“오케이?”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약속 날짜 잡고 내게 알려줘.”

“네.”

“둘이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해요?”

어느새 우리 쪽으로 다가온 박이나가 물었다.

“아. 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요.”

“개인적인 일이요? 혹시 둘이 사귀는…….”

“저, 절대 아닙니다!”

장수진은 박이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기겁하며 칼같이 대답했다.

수진이는 뭔가 민망한지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어이없어하며 쳐다봤다.

“야! 뭘 그렇게 오버하면서 대답해?”

“아닌 걸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해는 뭔 놈의 오해. 네 붉어진 얼굴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키겠다.”

“이, 이건 갑자기 당황해서…….”

그렇게 말하는 장수진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사귀는 게 아니었구나~ 그럼 대화 나누셔요~”

갑자기 박이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한 다음 흥얼거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뭔데 쟤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수진은 갑자기 급 인사를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테이블 쪽을 보니 일수랑 백 의원도 짐을 챙기며 슬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

검은색 세단이 내 저택으로 다가왔다.

거기서 장수진과 한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이호영 국정원장이다.

그동안 장수진을 통해 내 의사를 통보하기만 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은색 양복에 청색 넥타이를 한 그는 깔끔한 이미지였다.

나이가 있음에도 몸매가 호리호리해 꽤 세련돼 보였다.

아무래도 꾸준히 체력관리를 하는 듯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국정원장 이호영입니다.”

그는 나를 마주하며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이라일입니다.”

나도 그의 악수를 공손히 받아주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뭔가 그 웃고 있는 모습 뒤편에는 경계심이 잔뜩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려나?

장수진을 통해 전했던 말들이 거의 협박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실 이번에 나 데리러 오라고 한 것도 거의 명령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체면이 살겠군요.”

“아닙니다. 당연한 거죠. 대통령 각하께서는 청와대로 직접 오시겠다는 라일 님의 호의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셨습니다.”

하하.

아저씨.

표현들이 너무 과한데?

솔직히 저런 말투 난 오그라들어서 못 들어주겠다.

“뭘요.”

그렇다고 그걸 굳이 티낼 필요는 없지.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계시겠네요. 어서 가시죠.”

“네. 수진아 안내해드려.”

이호영의 명령에 장수진은 세단의 문을 열며 차에 타라고 나를 안내했다.

얘 뭔가 떨떠름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훈육이 필요한 것 같다.

장수진은 조수석에 탔고 나랑 이호영 원장은 뒷좌석에 같이 탔다.

“이전의 흑객연맹 일은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원장은 나에게 최대한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안 이래도 되는데…….

솔직히 나는 이런 그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적당히 선을 그었다.

“제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한 일입니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도 내가 선을 그으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 뒤로 우리는 말 없이 그대로 갔다.

이윽고 우리는 청와대에 도착했다.

장수진은 얼른 내려 내 쪽에 있는 문을 열어줬다.

“크큭. 고맙다. 수진아.”

“…….”

녀석이 그러는 게 뭔가 재밌어서 머리를 톡톡 건들어줬다.

그러자 녀석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훗.

억울하면 더 강해지시던가.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방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는지 수진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 굵게 들렸다.

나는 거기에 피식했다.

“큭. 그래.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녀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줬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호영 원장은 나를 청와대 인도했다.

TV에서만 보던 청와대를 이렇게 직접 와서 보게 되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새삼 내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라일.

출세했네.

이호영 원장은 나를 어떤 한옥집으로 데리고 갔다.

[齋春常]

그 한옥의 간판에는 이런 한자가 쓰여 있었다.

‘디오야. 저건 뭐라 읽냐?’

[상춘재입니다.]

‘그렇구나.’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 도착하니 대통령께서 친히 밖으로 나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김태하 대통령

TV에서만 보던 그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라일입니다.”

나는 그에게 정중히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하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시죠.”

대통령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상춘재 안으로 데리고 갔다.

“저기에 앉으시죠.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때마침 좋은 게 들어왔거든요.”

그는 자신의 수행원에게 커피를 내오라고 시켰다.

“멋있는 곳이군요.”

나는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허전하지도 않은 깔끔한 곳이었다.

“네. 저도 이곳을 좋아합니다. 주로 외빈을 모실 때 이용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저를 초대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뭘요. 저야말로 이렇게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대통령은 뭔가 굉장히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국정원장의 친절은 뭔가 좀 부담스러웠지만 대통령의 접근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역시 대통령이라 격이 다르다 이건가?

그가 나를 경계하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내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새삼 이런 게 정치적 짬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적당히 가벼운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수행원은 커피를 내왔다.

“아! 주문했던 커피가 왔군요. 한번 드셔보시죠.”

“예.”

나는 가볍게 한 모금했다.

!!!!!

이야~!

기가 막힌다.

향이 장난 아닌데?

“와! 진짜 맛이 좋네요.”

“하하하.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대통령은 맛있어하는 나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뭔가 상대방의 경계를 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근데 나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럼 대통령님. 저를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건 없고 그냥 라일 씨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대통령은 커피잔을 내려논 다음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두 눈은 뭔가 강한 의지가 깃들인 듯했다.

“이번 부동산 스캔들과 총선. 다 라일 씨가 전부터 계획하신 거죠?”

그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인 화법으로 내게 다가왔다.

“네. 이 나라의 비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죠.”

“비리 청산이라…….”

그는 뭔가 씁쓸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라일 씨 앞에서는 숨겨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씀드리지만 저 또한 비리가 있습니다.”

“…….”

그는 나에게 솔직하게 나왔다.

김태하 대통령

그의 말대로 그 또한 비리 기록이 있었다.

그는 대선 당시 경쟁 후보 측을 불법으로 도청했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다른 미래찬란당 의원들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맞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왜 다른 미래찬란당 의원들의 비리는 밝혀냈으면서 제 것은 밝혀내지 않은 것입니까?”

이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다른 의원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원인 제공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한국은 법조계와 미래찬란당 쪽의 스캔들로 이미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대통령님까지 스캔들이 터져버리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하하하. 그런 것까지 걱정하셨다니 좀 의외네요.”

“…….”

대통령은 그러면서 커피를 한 모금 더 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방금 비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비꼬는 것과는 결이 아예 달랐다.

그보다는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일 씨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제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키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만.”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

대통령이 무슨 의도로 이런 것을 묻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기에 나쁜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내 계획을 막는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다 말해주기로 했다.

“warrior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후 다음 대선 때 백기완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는 꽤 담담하게 말했다.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우선 공직자 중에 그처럼 청렴결백하고 올곧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죠. 경쟁 당의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우직함에 감탄해 개인적으로 존경해왔던 사람입니다.”

대통령은 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청렴결백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그런 것만 믿고 나라를 맡길 수는 없죠. 그는 리더쉽도 있고 능력도 출중합니다.”

“그것 또한 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내 말을 납득했다는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원하는 답은 제가 다 들었습니다.”

“원하는 답이라뇨? 무슨 의미죠?”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대통령이었다.

“제가 라일 씨를 왜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하셨죠? 그건 바로 라일 씨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를 돕는다고요?”

대통령은 갑자기 확 치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으면 망설였겠지만 백기완 의원이 제 후임이라니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겠습니다.”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굳이 내년 대선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당장 사퇴하도록 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