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내가 바로 warrior다 (5)
“백기완 의원이요?”
남 총장은 구 의원의 제안이 예상 밖이었는지 의아해하며 물었다.
백기완 의원
청렴결백을 신념으로 뇌물 하나 안 받는 인물이다.
바른정치당 내에서 영향력이 있다고는 하나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어서 견제할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말입니까?”
“그 자식 요즘 행보가 많이 수상해서 그렇습니다.”
구 의원은 언짢은지 콧숨을 세게 내쉬었다.
“제가 최근에 첩보 하나를 입수했거든요.”
“첩보라면 무슨?”
“아무래도 그 녀석이 우리 쪽에서 부동산 투기를 주도했다는 것을 눈치챘나 봐요.”
“아…….”
여당 의원들은 한국주택공사 간부들에게 정보를 받아 부동산 사업에 투자한 상태였다.
남 총장 또한 그 대열에 끼워져 있었다.
“그 녀석이 그것을 빌미로 우리를 몰아내려고 당 사람들을 선동해서 warrior 특별법을 추진하려 한답니다.”
“네?!!!!”
남 총장은 기막혀하며 물었다.
“아니. 미친 거 아닙니까? 어떻게든 막아야 할 법을 본인들이 나서서 추진하려 하다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다들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사는 지 모르겠다니까요. warrior 특별법이 본인들에게도 족쇄가 될 거라는 것을 모르나? 이 바닥에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어딨다고.”
“백 의원 본인은 괜찮을 수 있겠죠.”
남 총장은 비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의원님 말 대로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 없습니다. 아무리 그 백 의원이라 해도 말이죠. 제가 철저히 무너뜨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
구 의원은 남 총장의 말에 호쾌하게 웃어댔다.
“역시 총장님은 저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통하니까 대화하다 보면 속이 뻥 뚫린다니까요.”
구 의원은 볼일이 다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warrior를 포섭하면 warrior 특별법인가 뭔가는 나가리 되는 겁니다. 그리고 총장님 일도 쉽게 덮을 수 있겠죠. 그동안 그 건방진 백 의원 좀 처리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의원님. 맡겨주십시오.”
“그럼 저는 즐기러 가야 해서 이만.”
“저기……의원님.”
남 총장은 방을 나가려는 구 의원을 갑자기 불러세웠다.
그는 뭔가 민망해하는 듯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푸하하하하하하.”
구 의원의 호탕한 웃음으로 그 정적이 깨졌다.
“총장님.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리셨나 봅니다. 하하하하하. 좋습니다. 같이 즐기러 갑시다.”
그들은 그렇게 추잡한 짓을 하러 떠났다.
***
“아니. 검찰총장 이 자식은 폭로를 했는데도 사퇴 발표는커녕 아무런 해명도 안 하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국민들은 검찰총장의 사퇴를 외치며 난리인데 정작 남기주 쪽은 평온한 듯했다.
“디오! 그 새끼 요즘 뭐 하고 있어?”
[백 의원을 공격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백 의원을?”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백 의원처럼 청렴한 사람을 공격할 게 어딨다고 지랄이야? 아니 그 전에 지가 그럴 처지나 돼? 완전 어이가 없네.”
남기주 그 뻔뻔한 자식을 생각하니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백 의원을 왜 공격하는데?”
[바른정치당 쪽에 내부 폭로자가 있어 백 의원이 자신들을 몰아낼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래찬란당 측에서 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당이 남기주 총장을 꼬드겨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허. 나 참!”
내부 폭로자라…….
아무튼 이놈의 정치판은 같은 당내에서도 단합이 안 된다.
[이 일과 관련해 조만간 라일 님께 손님이 올 예정인 것 같습니다.]
디오는 또 재밌는 소식을 일러주었다.
“손님? 또 무슨 손님?”
[구기춘 의원입니다.]
“구기춘? 여당 대표 구기춘?”
[네.]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간이다.
이전에 협업자를 찾으려고 정치인들을 하나하나 조사할 때 알아본 결과 가장 뒤가 구린 놈이었다.
이놈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은 완전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아.”
짜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딴 놈이랑 안 만나고 싶은데. 왜 오는 지 뻔하다. warrior 특별법 관련해서 나랑 딜하려고 하겠지.”
[맞습니다. 녀석들의 통화, 문자 내역을 분석한 결과 아마 라일 님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준다는 조건으로 딜할 예정인 것 같습니다.]
“…….”
뭔 개소리야……….
그 자식 나를 무슨 호구로 보는 게 분명하다.
“야! 당장 구기춘 의원에게 전화 걸어!”
[알겠습니다.]
띠리리리~!
“여보세요.”
구기춘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야. 구기춘.”
“제가 바빠서 장난 전화랑 놀아줄 시간이 없습니다. 이만 끊겠……”
“나 warrior 이라일이다.”
“…….”
잠시 적막이 흘렀다.
“어이구!”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갑자기 구기춘은 부담스럽게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
“제가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먼저 전활 걸어주시는군요.”
“오지 마. 새끼야.”
“……네?”
구기춘은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니 만나기 싫으니까 오지 마라고.”
“하하하. 듣던 대로 패기가 넘치는 분이시군요.”
이 자식은 무색하게 만들었는데도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멘탈이 좀 상당한가 보다.
“남 총장이 뭣도 모르고 라일 씨께 강하게 밀어붙였다가 된통 당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반대로 저는 라일 씨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려고 하거든요. 아마 제 제안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분명 마음에 들 거라고?”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놈이 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렇게 말하는 건지…….
이 자식은 짜증 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당연하죠. 패기 넘치고 야망 넘치는 라일 씨께 딱 알맞은 제안일 겁니다.”
“설마 국회의원 자리를 준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
정곡을 찔렀는지 말이 없다.
“하하하. 맞습니다. 역시 똑똑하시군요.”
구기춘은 멋쩍게 웃어댔다.
“어떠십니까? 제가 그래도 이 나라에서 힘이 좀 있는 사람이라 라일 씨를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곧 총선이 가까워지고 있는데요…….”
“ㅈ까.”
“네?”
“아까부터 자꾸 되묻네? 니가 들은 게 맞아. ㅈ까라고.”
“아니. 그 무슨…….”
구기춘은 내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지 당황한 듯 보였다.
“국회의원? 너는 내가 고작 그딴 거에 만족할 거라 생각하냐?”
“이거 생각보다 더 야망이 있는 분이셨군요. 그럼 어떤 것을 바라시는지요? 한번 말씀해 주시면 제가 되도록 해 드리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바라는 거?”
나는 코웃음을 대차게 쳤다.
“바라는 거 있지.”
“뭡니까?”
“너희의 몰락.”
“…….”
이제야 구기춘은 화가 좀 나기 시작했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리신 것 같은데 어른을 상대로 이렇게 장난치면 안 됩니다. 라일 씨는 지금 누굴 상대로 통화하고 있는지 모르는 겁니까? 저 여당 대표 구기춘입니다!”
녀석은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을 어필했다.
“알아. 거기에 더 보태서 비리 덩어리 국회의원이지.”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결국 구기춘은 참지 못하고 나에게 성을 냈다.
“이 내가 친히 국회의원 자리를 주겠다는데 고맙다고 하면서 쳐 받기나 할 것이지 건방지게 무슨 말이 많아?!!!”
이전까지의 공손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녀석 입장에서는 많이 애썼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꾹 참았는데 수확이 없으니 많이 빡치겠지.
“아까 남 총장과는 다른 태도로 나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지금 완전히 똑같은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근본도 없는 새끼가 좀 대우해주니까 너가 뭐나 된 것 같아? 일개 해커 주제에 말이야. 주제 파악 좀 해라.”
구기춘은 이제 나와 거래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일 정도로 격하게 나왔다.
역시 믿을 놈이 아니다.
더 대화해봤자 입만 아프니 슬슬 마무리 짓자.
“어이. 구기춘 의원.”
나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내 말 잘 듣기 바란다. 난 너를 포함해 비리 공직자들은 모두 박살 낼 생각이야. warrior 특별법 제정은 차질 없이 그대로 진행될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지켜보기가 하셔. 그리고 난 너희가 백기완 의원을 공격하려는 것과 왜 그런지도 다 알고 있어. 하지만 백 의원은 내가 뒤를 봐주고 있는 상태야. 그리까 괜한 헛짓거리 하지 마라.”
“이라일……기어코 나를 적으로 돌릴 셈이냐?”
구기춘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미안한데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워. 너랑 별로 상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이만 대화 끊자.”
“이라일! 이라일!!!!”
녀석이 악을 지르며 나를 불러댔지만 무시하고 그냥 통화를 종료했다.
“디오야. 곧 총선이라 눈치 좀 보면서 일 좀 진행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 건방진 놈들이 너무 많아. 당장 일 진행 시키자.”
[알겠습니다.]
***
여당에서는 본격적으로 warrior 특별법안 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백기완 의원은 적극적으로 이 법안을 어필하며 발의했다.
거기에 같은 당 사람들도 합세했다.
“당장 warrior 특별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나라의 정치판은 싹 다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썩어 있습니다. 모든 비리를 밝혀내기 위해서 warrior 특별법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옳소! 당장 warrior 특별법을 만들어서 당장 비리 공직자들을 처벌해야 하오!”
이에 여당 쪽에서는 엄청나게 거세게 항의했다.
“백 의원! 당신 미쳤어?!!! 제정신으로 그 말 하는 거야?”
“어디 근본도 없는 놈에게 기득권을 줘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려는 거야?”
“이 나라에는 엄연히 사법기관이 있어! 대체 그놈이 뭔데 사법부의 일을 대신하겠다는 건데?”
국회의 분위기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각종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너희들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이러는 거 아냐!!! 켕기는 게 없으면 왜 이 법안을 통과 못 시켜?!!!”
“뭐가 어째?!!! 말 다했어?!!!”
“떳떳하다면 어서 통과시키십시오! warrior 특별법은 이 나라의 비리를 뿌리째 뽑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법안입니다!”
“warrior 특별법? 이런 정신병자들이 국회의원 한다고 앉아 있으니 원. 나라 꼴이 아주 말이 아니야.”
“추진합시다!!”
“절대로 안 돼!!!!”
국회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회의는 온갖 비난과 욕설이 오갈 뿐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warrior 특별법안이 통과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어서 하루빨리 warrior 특별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렸지만 일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warrior 특별법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여당 쪽 의석수가 과반수를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던 중 아이튜브의 warrior 채널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18시 30분 거대 비리 폭로 예정.’
136화. 핵전쟁 (7)
[라일 님…….]
디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보아하니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거야. 맞지?”
난 미국의 모든 핵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고장 내 놓았다.
따라서 잭슨이 조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굉장히 적었기 때문에, 녀석이 뭔가 극단적인 수를 꺼냈음을 알 수 있었다.
[잭슨이 핵미사일에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설마 날아가고 있는 미사일로 순간 이동했단 소리야?”
[네.]
“…….”
진짜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녀석도 비물질화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미사일의 속도가 너무 빨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비물질화하면 미사일이 그대로 통과해버리니까 잡기 힘들겠지. 그렇다고 비물질화를 안 하자니 굉장히 위험하고.”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쨌든 녀석은 계속 순간 이동하면서 미사일에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확실히 원격보다는 직접 접촉하는 게 데이터를 다루기가 더 쉽다.
녀석도 원격으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미친 짓이다.
빠르게 날아가는 미사일에 계속 순간이동 하면서 접근해 해체한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못 해봤다.
녀석도 만만치는 않은지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성공해버린다면…….
그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알아서 뻘짓거리 하면서 힘 빼라고 내버려 두고 싶지만, 혹시나 성공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방해 좀 해야겠어. 그렇다고 나도 녀석처럼 계속 순간이동 하면서 그 미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떡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녀석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전처럼 데이터 통로를 싹 다 태워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디오는 상당히 거친 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이전에는 녀석이 어디로 갈지 예측이 안 돼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그렇게 못 했지만, 지금은 녀석이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곳으로 미리 전기 데이터를 보내면 녀석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디오! 미사일 이동 경로 계산해서 녀석이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 가능하지?”
[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오케이! 그러면 알아서 삽질하고 있으니까 한번 빅엿을 먹여볼까?”
디오는 곧바로 내게 잭슨이 이동할 데이터 통로들을 알려주었다.
“땡큐 디오! 그러면 이제 전기 데이터를 보낸다!!!”
나는 디오가 알려준 통로로 전기 데이터를 엄청나게 흘려보냈다.
꽤 강하게 지져버렸기 때문에 통로가 다 아작 날 정도였다.
“아무래도 잡은 거 같은데?”
잭슨은 내 공격에 제대로 당한 것처럼 보였다.
녀석이 이제껏 막아 놓았던 것들이 다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모든 것이 다 풀리기 시작하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좋아! 이제 다 보이기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잭슨은 아직 살아있었다.
대단한 녀석이다.
치명상을 입은 와중에도 급히 경로를 이동해 화를 면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꼬리를 잡혀버렸다.
나는 곧바로 녀석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지잉-!
그곳은 어떤 무덤가였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잭슨은 어떤 무덤 옆에 누워 있었다.
녀석은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발로 가볍게 툭 쳤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혀버리다니 시시한걸. 좀 더 극적으로 잡힐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하하하하. 망할…….”
잭슨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잭슨이 누워있는 묘의 비를 힐끗 쳐다봤다.
거기에는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진짜 일편단심이네. 그 여자애가 그렇게 좋냐? 네가 미친놈만 아니었으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다.”
“개……. 자식아. 크리스틴을……. 모욕하지……. 마라.”
녀석은 몸이 성하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주제에 내게 욕을 해댔다.
진짜 집요한 놈이다.
“크리스틴은 모욕하지 않았어. 난 너를 욕한 거지. 괜히 혼자 발끈하지 마.”
“…….”
녀석은 말없이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그렇게 있어도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아. 왜냐면 네가 한 짓거리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네가 크리스틴을 잃어서 슬프다고 해도 그건 세계를 멸망시킬 이유가 되지 못해.”
“하하하하. 시발……. 최악이네. 네 녀석……. 훈계까지 들어야 하냐?”
녀석은 혼자 실성했다.
“warrior……. 강하긴 강하네. 솔직히 좀 어이없게 당해버리긴……. 했지만 말이야. 인정은 할게.”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녀석은 뭔가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너……. 뭔가 작업을 해 놓은 거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녀석은 피를 토하면서까지 경박스럽게 웃어댔다.
진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똑똑하네. 아니 뭐……. 당연한 건가? 그래. 맞아……. 다 작업을 해 놨지.”
녀석은 충혈된 눈으로 나를 꿋꿋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살리는 게 좋을 거야. 크흐흐흐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미쳐도 그런 짓은 안 해.”
“그래? 크흐흐흐흐. 내가 죽으면 한국은 그냥 끝장날 텐데?”
“……뭔 소리지?”
나도 모르게 절로 인상이 써졌다.
녀석은 그런 내 표정 변화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내 신체 신호가 끊기는 순간 전 세계의 핵이 대한민국을 향해 떨어질 거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작업해놨지. 너에게 당할 것을 대비해서 말이야.”
녀석은 다 죽어가는 주제에 이 말만은 똑바로 했다.
정신력 하나는 엄청난 놈이다.
“그런 거야 내가 쉽게 막을 수 있을 텐데?”
“크흐흐흐흐흐. 그렇게 안 될 거니까 내가 이렇게 여유가 있는 것이겠지?”
녀석의 말이 허세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너는 그동안 나를 이기기 위해서 계속해서 데이터 자아를 업그레이드 시켜왔겠지. 하지만 나는 데이터 암호를 만드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데이터…… 암호?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은 피식 웃었다.
“핵미사일이 대한민국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너는 그 암호를 다 풀어야 해. 암호를 풀지 않으면 절대 해체되지 않는다. 물론 너가 시간을 계속 투자한다면 그 암호는 풀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핵미사일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런 거였군.
나는 기분 나쁘게 히죽대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선택해라. 나를 살릴 건지 죽일 건지. 근데 내가 죽으면 대한민국도 망하는 거야. 이대로 대한민국이 망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야?”
녀석은 내게 시답잖은 압박을 해대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든 다음 녀석을 겨눴다.
“……뭐야?”
탕-!
난 녀석의 몸에 그대로 총을 쐈다.
“끄아아아아악!”
녀석은 피가 섞인 치아를 드러내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이 미친 새끼!!! 내가 죽으면 대한민국도 멸망해!!! 정녕 그것을 바라는 거냐?”
“어디서 되지도 않는 협상질이야?”
나는 녀석에게 썩소를 날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데 대한민국이 망하기는 왜 망해?”
“…….”
잭슨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하! 진짜 돌겠군. 넌 지금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는 거야!!”
“너를 살리는 게 제일 최악이야.”
나는 녀석의 머리를 조준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크흐흐흐흐.”
녀석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놨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잘 막아 봐라 미친놈아.”
“……좀 더 멋있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 말이라니 아쉽네. 크리스틴 곁으로 잘 가라.”
“조까. 병신아.”
탕-!
잭슨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지긋지긋한 놈이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인간이다.
[라일 님…….]
더러운 기분을 정리할 새도 없이 디오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잭슨 말이 사실입니다. 방금, 전 세계의 핵 발사 시스템이 가동되어 현재 대한민국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허세는 아니었나 보다.
이제껏 이딴 작업을 하느라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니, 정말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다.
“아까 저 녀석이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암호를 해체해야 한다고 그러던데…….”
[예. 잭슨 말대로 엄청나게 복잡한 암호 시스템이 막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로서도 이걸 풀려면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사일은 그 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겠지…….”
잭슨 이 새끼 어지간히 칼을 갈았나 보다.
철저하게 준비했네.
“아무래도 해체는 무리인 것 같네.”
[예…….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킬 생각이십니까?]
“아니. 5,000만 명을 언제 다 이동시키겠어?”
[그렇다면……?]
“막아야지.”
[…….]
괜히 불길하게 디오는 대답이 없었다.
“뭐라고 말 좀 해줄래? 그렇게 나오니까 괜히 불안해지잖아.”
[……진심이십니까?]
“응. 다른 수가 없잖아.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잭슨을 처리했던 거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라일 님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내 기억의 자아 덕분에 정신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데 말이야.”
[……방금 빠르게 계산한 결과 성공 확률은 7.4%입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7.3%면 할 만한 거지. 나는 더 낮을 줄 알았어.”
잭슨 그 자식은 핵미사일 하나도 제대로 못 막았는데 나는 지금 몇백 발을 상대해야 한다.
아! 그놈은 내가 방해해서 그런 건가?
어찌 됐든 무모한 것은 맞다.
“일단 시작해보자고. 진짜 대한민국으로 핵미사일이 이렇게 떨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나는 가볍게 몸을 풀어댔다.
“좋아! 가장 가까운 핵미사일부터 처리하자. 어디야?”
[북한과 중국입니다.]
“……그러시겠지. 역시나 도움이 안 되는 이웃이야. 미사일 좌표 보내줘. 아, 미국으로 날아오는 것도 말이야.”
[네.]
디오는 나에게 현재 대한민국으로 날아오고 있는 미사일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디오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미사일들을 데이터 장벽으로 감쌌다.
한 번에 다 터트리고 싶었지만 처음 해보는 거라 간 보기로 열 개 정도만 데이터 장벽으로 감쌌다.
“디오. 다 터트려버려!”
[열 개를 동시에 말입니까?]
나는 열 개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디오 생각에는 많은가 보다.
“응.”
[위험할 것 같은데요…….]
“괜찮아.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일단 해봐.”
[……알겠습니다.]
디오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이 열 개 말고도 앞으로 막아야 할 것이 수백 개다.
지금 한 개씩 막을 여유는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하는 게 잭슨을 살리는 것보다는 낫다.
[그럼. 터트리겠습니다. 저도 도울 테니 부디 잘 버텨주시기를 바랍니다.]
“알았어.”
[그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