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거침없는 보복 (4)
류헤이카이.
전체 조직원이 1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규모가 큰 메이저 야쿠자 집단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 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류헤이카이가 한국에서 마약 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팀을 구성해 그들을 쫓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경찰보다 한 발짝씩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제일 최근에는 극비 정보를 입수해 미리부터 마약 거래 장소가 예상되는 곳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거래 도중에 모두 일제히 도망쳐 버렸다.
부리나케 쫓았지만 이미 다 놓쳐버린 후였다.
한지완 대장은 진전이 나가지 않는 수사에 지쳐있었다.
그러던 와중 폴넷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떡하니 류헤이카이에 대한 정보가 떠버렸다.
심지어 작성자는 최근에 포털사이트를 정복해서 디씨소프트의 비리를 공개한 warrior였다.
warrior는 류헤이카이의 명단, 아지트, 활동 기록 등을 상세하게 올려놨다.
이 괴물 같은 놈은 폴넷도 뚫어 메인 화면에 떡하니 이것을 올려놨다.
그리고 더 당황스러운 것은 warrior가 계속해서 류헤이카이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장님. 이거 대체······”
“나도 모르겠어.”
한지완은 warrior가 올린 정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쩌면 이게 거짓 정보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warrior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로 CCTV를 통해 검은색 스타렉스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아예 생중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화면은 아예 노골적으로 확대까지 해가면서 검은색 스타렉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장님! 저 차량 말입니다.”
부하 경찰관은 CCTV에 찍히고 있는 검은색 스타렉스의 번호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번에 놓쳤던 차량 번호랑 일치합니다.”
“뭐?!!!”
번호를 확인해보니 진짜였다.
그러면 이제 망설이고 뭐고 없다.
일단 출동해야 한다.
“야! 당장 다 집합시켜!!!!”
“네!!”
한지완 대장의 부름으로 순식간에 모두 모였다.
“일단 강 팀장. 1팀 애들 데리고 검은색 스타렉스 쫓아.”
“네!”
“나머지는 전부 용평(龍平) 건설회사로 간다. 어서 이동해!”
광역수사대 일원들은 서둘러 류헤이카이를 잡으러 나갔다.
***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왔네.
“가연 씨.”
“네.”
“혹시 위험할 수 있으니까 방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가연은 걱정되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전 걱정 마요. 저 녀석들은 저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가연 씨가 그냥 방으로 들어가 있는 게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예······”
지가연은 나를 믿고 내 지시에 따라주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덩치가 우람한 사람들이 3명 서 있었다.
“누구시죠?”
“사람을 찾는데요······여기 지가연 씨 있습니까?”
지가연을 찾는 걸로 봐서 이 녀석들 강철파다.
이전부터 계속 지가연을 쫓던 놈들이다.
“안에 있긴 한데 당신들이랑은 볼일 없는데요.”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는 게 좋을 건데.”
“여긴 내 집이야. 뭔데 비키라 마라야?”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 떡대는 다짜고짜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휙!
물론 그의 주먹은 가볍게 내 몸을 통과했다.
“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그렇게 놀란 반응이 아니었다.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올래? 매너가 없네.”
“흥! 너가 그 이라일인가 뭔가 하는 놈인가 보구나? 몸에 전혀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던데 직접 보니까 신기하긴 하네.”
“나에 대해서 설명 좀 들었어? 그런데 제대로 들은 건 아닌가 보네. 그랬으면 이렇게 나한테 개길 리가 없잖아.”
“하! 어차피 공격은 전혀 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겁쟁이 녀석이라 들었다. 그러면 굳이 너를 상대할 필요 없이 지가연만 잡으면 되겠지.”
녀석은 나를 통과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경고하건데 집안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순간 후회한다.”
“개 소리······”
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떡대는 결국 집안에 발을 딛었고 그 순간 전기에 감전되면서 비명을 질렀다.
덩치에 맞게 비명 또한 요란했다.
“귀청 떨어질 뻔했네. 뭐 이렇게 시끄러워?”
“허억······허억······”
전기에 감전됐던 떡대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기절하지 않는 것도 용하다.
“혹시 너희 다른 지시사항 같은 거 안 들었어? 왜 그렇게 당하고도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나오는가 모르겠네.”
“크윽!”
다른 동료들은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알짱댈 뿐이었다.
하긴 저렇게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들어온다면 미친놈들이지.
“너희들은 안 들어오려고?”
“크윽······”
내 도발에도 녀석들은 넘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기 충격이 많이 무섭긴 한가보다.
“야! 뭐해?!!! 그놈 하나 처리 못 하고 뭐 하는 거야?”
아파트 복도 끝에서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동료들이 더 있었다.
“형님. 이 자식 집 문 앞에 이상한 게 설치되어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녀석들은 억울해하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냥 밀어붙이면 되잖아. 정신력으로 버텨. 다 정신력이 약하니까 그런 거야!”
대빵처럼 보이는 놈은 부하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몰아붙였다.
“너네가 이해해. 쟤가 안 당해봐서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주는 척했다.
녀석들은 그런 나를 인상을 쓰며 쳐다봤다.
“하! 새끼들. 기껏 생각해주니까 표정 봐라.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네.”
“까불지 마. 문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녀석은 나를 깔보듯 말했다.
“아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문밖으로 나와 녀석의 몸에 손을 댔다.
“무슨······”
지지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악!!”
나를 무시했던 녀석도 전기에 감전되며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그동안 너무 소극적으로 나온 것 같아. 그러니까 다들 이렇게 기어오르지.”
나는 벌벌 떨고 있는 남은 두 녀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우선 전기 방화벽은 집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으아아아악!”
이미 한 번 전기에 감전된 적 있는 녀석은 또 감전돼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번에는 완전히 기절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방어만 하고 겁쟁이라고 했는데 사실 내 주 포지션은 탱커가 아니라 딜러야. ”
나는 남아있는 한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리 가!!”
놈은 질색하며 나를 거부했다.
지지지지직!!
“꾸에에에엑!!!”
녀석은 완전 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도 아니고······
“이 자식은 희한한 소리를 내네.”
그렇게 나에게 까불었던 3명의 떡대는 정리됐다.
나는 이번에는 복도 끝에 서 있는 녀석들을 쳐다봤다.
놈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나를 바라봤다.
“어이 강철파들. 뭐해? 지가연 씨 안 잡을 거야?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해? 빨리 들어와.”
“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냐?!!!”
무리의 대빵처럼 보이는 놈이 질겁하며 물었다.
“그럼. 잘 알지. 양기택 따가리들 아니야. 그동안 지가연 씨를 귀찮게 쫓아다니라 애쓰던데 사내 자식들이 연약한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니들은 자존심도 없냐?”
“이 새끼가 뒤질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네?”
그 대빵 녀석은 욱해서 나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정곡을 찌르니까 빡쳐? 니들도 너희가 뭐 하는가 싶지?”
“아가리 다물어라.”
대빵 녀석은 사납게 째려보며 이를 갈았다.
“싫은데 어떡하지?”
“야! 뭐해?!!! 당장 저 새끼 입 찢어버려!!!!!”
결국 녀석은 흥분하며 부하들에게 나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원하는 바다.
모두 일제히 나에게 덤벼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모든 층 세대가 한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 복도가 좁다고 여겼던 적은 없었는데 저렇게 등치가 큰 사람들이 몰려있으니 미어터졌다.
녀석들의 숫자가 많음에도 공간이 협소해 결국 일대일로 붙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몰려와봤자 뭐 하냐? 여기에서는 그게 의미가 없는데. 뭐 어차피 공터에서 싸웠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 상관없을라나? 아무튼 차례로 지져줄 테니까 줄 잘 서.”
“뭐?······끄아아아아악!!!!”
맨 앞에 있는 녀석부터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나갔다.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끄어어어!!!!!!!!”
“우갸갸갸갸!!!!!”
비명은 끊임없이 릴레이로 계속 들렸다.
간혹 특이한 비명들도 있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뒤에 있던 깡패들은 동료들이 쓰러져나가고 점점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새하얗게 질렀다.
동료들이 저렇게 무력하게 당하는 것을 보니 도망치고 싶을 거다.
“혀, 형님! 어쩝니까?”
“어쩌긴 뭘 어째?!! 어서 공격해?!!! 도망치면 너가 나한테 죽는다!!”
“크윽!”
부하들이 쓰러져나가고 두려움에 떨어도 대빵 녀석은 매정하게 나왔다.
참 질 나쁜 녀석이다.
“에휴. 저런 놈이 리더로 두고 있는 니들이 불쌍하다.”
“끄아아아아악!”
“아 물론 불쌍하기만 하다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어.”
결국 부하들은 모두 다 전기 충격으로 쓰러졌고 이제 대빵 혼자만 남은 상황이었다.
“너 이 새끼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대빵 녀석은 나를 보며 질색했다.
“너를 전기 통구이로 만들어 줄 사람이지. 이리와. 이제 너 혼자 남았으니까. 너도 부하들 따라서 기절해야지.”
“이익!”
녀석은 많이 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덤빌 생각은 없는지 몸은 가만히 있었다.
“뭐해? 들어오라니까.”
“네 놈 나중에 두고 보자!”
녀석은 갑자기 뒤돌아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
진짜 쓰레기 녀석이다.
부하들은 다 공격하게 해놓고서는 정작 지는 이렇게 꽁무니를 내빼다니.
난 전기 방화벽으로 녀석의 발을 공격했다.
“끄아아아악!”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어딜 도망가? 넌 양심도 없냐? 부하들은 도망 못 치게 했으면서 너는 어디를 가는 거야?”
“시이발!!!!”
녀석은 고통스러운지 발을 매만지며 괴성을 질렀다.
“너는 좀 악질이라 내가 천천히 가지고 놀아줘야겠다.”
“저리 꺼져!!!!”
녀석은 내가 점점 다가오자 손까지 휘저으며 강렬하게 거부했다.
“야. 누가 보면 내가 괴물인 줄 알겠다. 생긴 것은 너가 더 무섭게 생겼어 짜샤.”
“제, 제발! 꺼지란 말이야!!!!”
“너가 그렇게 발악할수록 난 더 괴롭히고 싶어져.”
“씨이바!!! 끄아아아아악!!!!”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출력을 약하게 한 상태라 기절은 못 한다.
“너는 특별 대우로 약하게 여러 번 지져줄게.”
“살려줘!! 제발 살려줘!!!”
녀석은 나에게 무릎을 꿇고 살살 빌었다.
진짜 다 큰 어른이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추했다.
“걱정 마. 안 죽어. 좀 고통스러울 뿐이야.”
“제, 젠장!! 끄아아아아악!!!!”
그렇게 녀석을 열 번 정도 지졌다.
녀석은 결국 기절하며 뻗었다.
지가연 씨를 잡으러 온 강철파는 이렇게 정리됐다.
이제 다음은 나를 잡으러 온 류헤이카이 놈들인데······
부웅! 끼익!
복도 창밖으로 밑을 내려다보니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이 요란하게 와서 멈춰 섰다.
“왔네.”
115화. 업그레이드 (5)
“디오.”
[네.]
“방금 든 기가 막힌 생각인데,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처럼 내 몸을 데이터화해서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 기억의 자아가 데이터로 변환되어 다른 차원으로 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 현실 안에서의 이동도 충분히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론상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내 의견을 부정하는 답변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속 시원한 대답도 아니었다.
“가능하다고 딱 말하지 않는 것이 뭔가 장애 요소가 있나 보지?”
[일단 전자기기 같은 매개체가 있지 않은 이상 아무 곳이나 바로 이동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전자기기를 통한 이동이 가능하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거다.
“일단 한번 해볼까?”
[아직 확실하게 방법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라일 님의 몸을 직접 이동시키는 거라 위험 요소가 큽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디오가 내게 겁을 주려는 의도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괜한 걱정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다.
그놈을 잡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해봐야 한다.
“할 거야. 걱정 말고 한번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라일 님을 돕겠습니다.]
“그러면 한번 시도해볼까?”
아까 탁자의 데이터 구조를 변환했던 것처럼 내 몸의 데이터 구조를 변환해보았다.
이미 내 몸에 대한 데이터 구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존의 데이터 구조를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 구성한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나는 내 몸을 컴퓨터 데이터로 바꿔보았다.
생각보다 데이터 변환은 쉽게 이루어졌고 내 몸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되고 있는 것 같아.”
몸이 점점 사라지면서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라일 님! 용량 초과입니다!]
“엥?”
디오의 알림과 동시에 내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반동 현상으로 그만 나는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크윽!”
다행히 디오가 바로 비물질화로 내 몸을 변환시켜준 덕에 충격은 피할 수 있었다.
“망할. 용량이 문제였다니….”
[라일 님의 몸만 변환한다면 그렇게 큰 용량이 아닙니다만 문제는 라일 님의 뇌입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 너무 많아서 엑사바이트로도 계산이 안 됩니다.]
“…….”
기억의 자아가 넘겨준 지식 때문에 그런가 보다.
그 엄청난 지식을 준 것은 좋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안 되네.
어찌한다…….
사람들이 보통 가지고 다니는 전자기기의 용량이 1테라바이트 미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되도록 용량이 작아야 한다.
“내 지식을 디오 너한테 넘겨줄 수 있나?”
[가능할 겁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저라면 라일 님이 전해준 지식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케이.”
데이터 읽기 연습을 계속한 결과 이제 내 안에 있는 데이터 흐름을 읽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내 기억의 자아가 준 지식을 전부 디오에게로 옮기기 시작했다.
[라일 님의 지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좋아. 잠시 보관해줘.”
[네.]
디오의 성능이 좋아서 그런지 데이터 전달은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신기하게도 이전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흔적은 약간 남아 있어서, 이전에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하하하하. 이거 뭔가 기분이 되게 이상하다.”
기억이 사라졌다는 게 어이없어서 혼자 웃어댔다.
이러니까 미친놈 같기도 하다.
“다시 실험을 시작해보자.”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핸드폰을 부엌 쪽에 둘게. 그래서 여기에서 부엌으로 한번 이동해보는 거야.”
[좋은 생각입니다.]
디오는 기분 좋게 내게 호응해주었다.
“오케이. 그러면 다시 해볼까?”
나는 핸드폰을 부엌에 둔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좋아. 시작한다.”
다시 데이터 변환이 이루어졌다.
기억의 자아가 준 지식이 없어진 덕에 데이터 변환은 확실히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 데이터가 된 기분은 되게 이상했다.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디오! 핸드폰으로 날 전송시켜준 다음 바로 변환시켜줘.’
나는 얼른 디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 곧바로 답이 왔다.
슈웅-!
“허업!”
갑자기 내 눈앞에 부엌이 보이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변환으로 인해 어지러움이 몰려왔고 나는 속이 좋지 않아 기침을 해댔다.
“망할. 매우 거지 같은 기분인데? 익숙해지는 데 좀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어지러움은 금방 가셨다.
“어찌 됐든 성공이네.”
[그러게요. 축하드립니다.]
좀 더 개발이 필요하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분명 큰 성과다.
갑자기 내게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디오야.”
[네.]
“우리 한번 일수한테로 가볼까?”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말고 바로 변환시켜.”
[예.]
나는 몸을 컴퓨터 데이터로 변환시켰고 디오는 그런 나를 곧바로 일수에게 보냈다.
디오는 내가 부탁한 대로 일수의 핸드폰으로 전송된 나를 곧바로 원래대로 변환시켜주었다.
“으아아아아악!”
일수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성공한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지만 너무 허무하게 성공해버렸다.
“뭐, 뭐야?!!!!”
일수는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계속 토끼 눈을 뜬 채로 나를 쳐다봤다.
“나 이제 순간이동을 할 줄 알게 됐어.”
“…….”
일수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오랫동안 녀석을 알아 왔지만 저렇게 바보 같은 표정은 처음 본다.
벌어져서 다물 줄 모르는 입에서 그만 침이 떨어졌고 그제야 일수는 정신을 차렸다.
“아잇. 더럽게.”
“지금 그게 중요해?”
일수는 되려 나에게 성을 냈다.
“만져지지도 않고 이제는 갑자기 나타나고. 넌 이제 진짜 유령이 된 거냐?”
“하하하하하. 살아 있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섭한 소리야?”
끼이이익-!
장수진이 문을 열고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 라일 님. 언제 오셨어요?”
수진이는 신기해하며 내게 물었다.
“방금.”
“순간이동 해서 왔어.”
일수는 부연 설명을 해 줬다.
수진이는 그래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뭔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순간이동 해서 왔어. 난 이제 그런 것도 가능해졌다.”
“아……. 그게 이 현실에서 가능한 소리예요?”
수진이는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물었다.
“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가능하더라고.”
“……진짜 대단하시네요.”
수진이는 질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너희들이 열심히 연구해주는데 나라고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나도 며칠 연구했는데 이렇게 업그레이드가 됐어. 그나저나 너희들 쪽은 어때? 잘 돼 가?”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다.”
일수는 갑자기 씨익 웃었다.
“한번 봐봐.”
일수는 저번처럼 투명한 푸른 구체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 구체는 저번보다 훨씬 정교해진 데이터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자아도 생겼군.”
“맞아. 이제 말도 하더라고. 이름은 ‘베프’라고 지었어.”
하하…….
진짜 작명 센스 하고는.
라고 입 밖으로 말했다가는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해서 그냥 속으로 삼켰다.
“베프야 인사해라. 내 친구 이라일이다.”
[안녕하십니까. 베프입니다.]
일수는 데이터 자아에 스피커를 연결해 직접 소리가 나오게 했다.
이렇게 하니까 느낌이 새로웠다.
“진짜 신박하다. 이러니까 마치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 같네.”
디오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들리는 것이었지만 이건 직접 내 귀로 들리는 거라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했다.
“한번 확인해볼게.”
나는 좀 더 세밀하게 베프를 관찰해보았다.
초창기 디오에게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그 어떤 슈퍼컴퓨터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지닌 상태다.
“대단하네. 내 기억의 자아는 여기까지 오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는데 너는 며칠 만에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그거야 네가 나에게 엄청난 힌트를 줬으니까 그런 거지. 거의 밥을 떠 먹여준 수준인데 그것도 못 하면 쓰겠냐?”
서로를 칭찬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수진이는 어느 정도 했어?”
“일수 오빠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요.”
수진이는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만든 데이터 응집체를 내게 보여줬다.
녀석 말대로 베프에 비하면 훨씬 수준이 떨어지고 아직 자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막 데이터를 다루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수진이 또한 속도가 엄청났다.
“뭐라 하지 마세요. 저도 엄청 노력한 거라고요. 이제 막 배워서 어쩔 수 없어요.”
내가 혼낼 줄 알았는지 알아서 제 발 저려서 변명하는 장수진이었다.
그 모습이 웃겨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야. 아무 말도 안 했다. 왜 혼자 난리야?”
“별로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훌륭해.”
“네?”
수진이는 의외의 소리를 들었는지 많이 놀란 눈치였다.
“뭐야 그 반응은? 훌륭하다고.”
“정말요?”
“그래. 네 말대로 넌 늦게 시작했잖아. 발전 속도로만 치면 네가 최고인 거 같은데?”
내 칭찬에 수진이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뭔데 부끄러워하고 난리야?”
“그냥……. 라일 님에게 이런 칭찬은 처음 듣는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잘했네.”
“헤헤.”
순간 수진이는 소녀처럼 웃었다.
“칭찬받았다고 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시켜.”
“예! 맡겨주십시오.”
수진이는 사기가 한껏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다들 고맙게도 열심히 해주고 있다.
“일수야.”
“어.”
“넌 진도가 빠른 것 같으니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일수는 약간 불안해하며 물었다.
“박이나 씨랑 백기완 대통령을 위한 데이터 응집체도 만들어 줘.”
“……한 개도 아니라 두 개를 더 만들라고?”
일수는 경악하며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너 나를 과로로 죽일 셈이냐?”
“에이. 설마 내가 그러려고. 이제 ‘베프’에게도 자아가 생겼으니까 같이 응축시키면 수월해질 거야.”
“…….”
그 말에도 일수는 여전히 심각해 보였다.
“부탁이야. 박이나 씨랑 백기완 대통령은 데이터를 다루지 못한단 말이야. 좀만 더 수고해줘.”
“……하아…….”
내가 손을 잡고 애걸복걸하자 일수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렇게 고생한 거에 대한 대가는 내가 똑똑히 받아낼 거야.”
“별장 하나 큰 거 만들어 줄게. 우리 집보다 더 큰 걸로. 거기에 500억 얹어서 준다.”
“콜!”
금융치료보다 더 좋은 치료는 없다고 했던가.
갑자기 일수 얼굴에 활기가 돋기 시작했다.
“그럼 또 힘차게 해볼까?”
갑자기 일수는 확 살아났다.
금융치료의 힘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만 연구를 계속하러 가볼게.”
“그래. 잘 가라.”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녀석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집으로 순간이동 해서 돌아왔다.
확인해보니 갑자기 사라진 나를 보며 수진이와 일수는 경악하고 있는 중이다.
그 모습이 웃겨 혼자 껄껄대며 웃었다.
“!!!!!!!!”
그때 갑자기 미세한 데이터 흐름이 내게 접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